천일여행 1568일 2019년 10월 5일(토) 강화/위례/화성/윗다락골/흐림
천일여행 1568일 2019년 10월 5일(토) 강화/위례/화성/윗다락골/흐림
한국 도착 5일째, 아버지 묘원, 나 태어난 곳에 가는 날
어머님은 나와 이모님 등 셋이 여행을 간다는 설렘에 오늘도 새벽부터 쿵쾅쿵쾅...
때문에 생각보다 훨씬 이르게 몸을 일으켰다.
아침도 대충 채비하곤 집을 나섰다.
위례로 향하는 길 절반쯤 갔을 때 막내이모에게 전화를 하니 세수도 안 했단다.
어머님은 들뜬 기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고고씽....
막내이모를 Pick up해서 아버님 유해를 모신 화성의 효원납골묘원으로 출발,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두 자매는 서로 기분이 좋다며 들뜬 마음의 표현이 쉬질 않는다.
실은 내가 오기 며칠 전 아들들 몰래 강화 탈출을 감행한 어머님은
막내이모집 근처까지 와서는 잠시 만나고 허리를 다친 이모는 병원으로
어머님은 아버님을 모신 납골당으로 향한 일이 있었단다.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게 두 분이 만났었고 어머님은 아버님 유해 앞에서 하소연을 한 것.
“하도 아파서 아버지에게 하소연을 하면 좋아 질까 해서 다녀왔다.”며 푸념을 하신 어머님은
그 이후에도 아픈 게 좋아지질 않은 것을 보니 소용이 없었단다.
내가 대부분 모르는 길을 네비게이션의 도움을 통해 납골공원으로 향하는데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떠나질 않더니만 아버님의 유골함을 보곤 정말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님의 절규를 보고도 잘 참았었는데
어쩜 그 때 참았던 눈물을 10년 동안 머금고 있다 흘리는 건지 모르지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두 분께 보이고 싶지 않아 자리를 피해 달래보려 했지만
멈추질 않아 당황하다 결국 이모에겐 들키고 말았지만 다행히 못 본 척 하신다.
다시 길을 떠나 도착한 곳이 나름 추억이 어린 장터 전의역이다.
주차를 하곤 크기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역사에 들어가 둘러보곤 사진을 몇 장 박았다.
“정말 하나도 안 변했다.”를 반복하는 자매는 <전의역>이라는 글자가 나오도록 추억을 남기려
하다 보니 할 수 없이 출입금지 팻말을 넘어 철길 쪽까지 침범했다.
그러자 역의 공무원이 나오며 “거기 들어가면 안 됩니다.”고 만류하자
“여기 추억이 많은데 미국서 와서 사진 몇 장 찍으려 하니 조금만 봐 주세요.”라며 나를 팔고
사정을 하며 얼른 사진을 박고는 역사를 떠나 식당으로 갔다.
더 좋은 곳에서 더 맛있는 것을 먹을 수도 있었지만 추억을 더듬자며 구지 장터로 왔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음식은 나쁘지 않았다.
두 분은 갈비탕(이 또한 나이든 사람들에겐 나름 추억의 음식이다.),
나는 사장님의 추천 도가니탕으로 메뉴를 정했는데 우려낸 국물이 나쁘지 않았고
신선한 겉절이와 콩나물무침, 고추와 마늘종을 간장에 절인 짱아지 등이
일반적인 식당의 것들과는 다르게 좋아서 셋은 맛있다며 거의 그릇을 비웠다.
특히 음식을 많이 가리시는 어머님이 잘 드시는 것을 보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곤 산소에서 사용할 소주와 오징어포 등을 준비하고 윗다락골로 향했다.
어머님이 안달하듯 가시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가 얼마 전 외숙모님이 쓰러졌다 일어나
많이 아프다는 소식에 건강상태가 궁금하셨기 때문이다.
외숙모님을 보자 다행히 생각했던 것 보다 나쁘지 않았는데
쓰러졌을 때 함께 사는 딸 순자가 얼른 병원으로 모셨기 때문이란다.
나는 관심이 적어 그런지 아님 한국을 떠나고 잦은 교류가 적어 그런지
외숙모님과 큰 아들 말고는 볼 때 마다 “오빠!”라며 맞이하는 두 딸은 잘 모른다.
그러니 그들의 가정사는 잘 모르지만 순자는 노나연이라는 딸을 데리고 숙모님과 산다.
특히 더 기억이 없는 1학년의 나연이는 누군가의 사랑이 더욱 필요해 그런지
나를 잘 따르며 관심을 가져달라는 재롱이 끊이지 않았다.
“조카, 아이들 케어하는 직업을 가져도 되겠어!”하는 막내이모의 칭찬에
“내가?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얘가 사람의 사랑에 갈증은 느끼는 가봐”하면서도
깡충깡충 거리면서 내 주위를 뛰는 아이가 귀엽기만 하면서도 아버지가 없음에
안쓰러운 마음이 적지 않았다.
나중에 기억과 추론을 더듬어 알아낸 게 애 아버지가 우울증이 있는 아내와 헤어져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할 예정이라는 씁쓸한 스토리다.
외할아버지·할머니와 외삼촌 산소에서 사용할 돗자리를 메고 재롱부리듯 따르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 좋은 노래 흥얼거리듯 떠나질 않았다.
산소에 소주와 오징어 안주로 성묘를 마친 우리는 서둘러 그곳을 떠나는 데
늘 그렇듯 “자고 가라.”고 성화를 하시는 숙모님, “할 일이 많아 가야한다.”고 맛서는 두 분,
그럼에도 순자는 두 고모들을 위해 고춧가루에 싱싱한 푸른 고추, 늙은 호박까지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콜라까지 있었다.) 꼼꼼히 꾸러미를 두 개 만들었다.
막히는 길을 뚫고 위례에 도착해 막내이모를 Drop하고 동생들이 기다릴 강화로 향했다.
토요일 저녁의 서울 도로는 기어가는 것으론 표현이 다 되질 않을 정도로 느릿느릿....
위례에서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벨이 울리는 어머님의 전화를 통해 들은 소식은
셋째가 이미 강화에 도착했단다.
“먼저 저녁을 먹으라.”는 이야기를 남기곤 강화로 오는 길에 여의도에서 하는 불꽃놀이,
뜻하지 않게 가까이서 좋은 구경을 했다는 어머님 말씀에 도로의 속도 때문에
응어리진 답답한 마음과 종일 오랜 운전으로 싸인 피곤을 충분히 달랬다.
그렇데 집에 도착해보니 둘째와 셋째 부부가 흔히 말하는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벗기도 전에 상이차려지고 둘째가 준비란 등심을 굽고 동생들은 반주까지 곁들이며
늦은 저녁식사를 오래오래 즐겼다.
나도 술을 먹을 수 있었으면 참 좋았으련만 두통이 걱정되어 사양하였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오랜만에 동생들과 함께하였다.
오늘 이렇게 마무리 하였다.
오늘도 무지 좋은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