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 알베르 카뮈 -
이방인 - 알베르 카뮈 -
내가 이 책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가물가물 하다.
하지만 흩어진 퍼즐의 알 듯 말 듯한 그림처럼
중간 중간 단편적인 이야기가 드문드문 한 것으로 보아
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잃었다면 아마도 20년도 더 지난 3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내가 30대 중반 이후에 겪었던
절대 기억하고 싶지 않은 판도라 상자와 같은 쓰라린 과거와
중첩되지 않고 적어도 책을 집어던진 기억이 없으니 그렇게 추정된다.
이 책을 30대 후반 혹은 40대 초반에 읽었더라면
아마도 몇 번을 집어 던졌거나 포기와 읽기를 반복하였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이번에 이 책을 읽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내 길동무 길벗 때문이다.
갑자기 사지 같은 알제리로 발령 나서 그리로 가야 하는
걱정과 안타까움에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음에
길벗이 가야 하는 곳을 조금이라도 더 알아 마음속에 그리며 함께하는 것이
소극적이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그래서 길벗과 내가 위안을 가져보고 싶은
다급함과 간절함 때문에 책을 잡았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이방인이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최고의 권력자나 갑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매일매일 불평과 실의에 빠진 가난한 사람도
다를 것 없는 이방인이다.
단지 권력자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오늘
갑부는 돈을 이용하여 호령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주인이라는 것은 지나친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종교에서 돌고 돌아 무언가로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설이나
영원히 영원을 구원을 한다는 영혼의 영원구원설 역시
이방인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주장한다면
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될까?
바다와 태양을 뜻을 가진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주인공이 1인칭이 되는 독백하는 수기 형식으로 이 소설은 진행된다.
이렇게 진행되는 많은 소설이 저자 자신의 자선적 내용을 많이 담는
특징이 있듯이 뫼르소와 카뮈가 일치되는 부분이 많다는 게 통설이다.
소설은 직장생활을 하는 주인공이 양로원에서 살던 엄마가 죽었다는
전보를 받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부양할 수 없는 경제적 이유 때문에 양로원에 있을 수밖에 없는 엄마의 죽음,
안타깝고 슬퍼해야 하지만 자신의 무기력함 내지는 경제적 이유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지나 어쩔 수없이 순응해야 하는
그래서 모자지간에 애정이나 삶의 기쁨도 포기해야 하는 삶,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주도적 삶 보다는 더욱 이방인처럼 산다.
엄마의 관을 이미 덮었지만 마지막 모습을 보겠다면
다시 열어 주겠다는 관리인의 말에
‘아니요’라고 대답하는 것이나 엄마의 관 앞에서 울지 않은 것,
그리고 엄마의 관 앞에서 커피를 마신 메마른 감정은
나중에 우연한 살인 후 계획적인 범죄 한 요소로 추궁 당한다.
관 앞에서 밤새 훌쩍이는 엄마의 양로원 친구와는 다르게 무표정한 모습이나
절룩거리면서도 장례행렬에 따르는
엄마 말년의 남자친구를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것은
세상 이방인 모습의 한 단편을 보여주는 것 같다.
1부의 마지막 부분에 이웃 친구 때문에 우연히 행했던 살인,
2부는 살인자 주인공의 재판과 감옥생활을 통한
세상을 겉도는 이방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법조인 모두가 그렇다고 볼 수도 없기에
내가 이렇게 표현한다면 많은 법조인이 싸우자고 달려들지도 모르지만
많은 사례와 내 경험을 비춘다면
판사, 검사, 변호사 등은 상당한 엘리트의식이나
우월주위에 빠져 자신들이 세상의 주인처럼 산다.
검사는 범죄자에 대해 자신이 믿는 현상이나 상황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며
자신이 그려 놓은 그림이나 시나리오 안에 피고를 몰아넣으려 하고
변호사는 자신의 이익과 상업주의에 따라 구성한 시나리오를 우겨대고
판사는 그 중간의 어디 쯤 자리하는 것이 주변의 뭇매를 덜 맞을까 고민하는
그러니까 강한 우월과 엘리트 의식에 사로잡힌 착각의 이방인이라고나 할까?
우연적 우발적, 하지만 통속적이지 않은 이유로 살인을 한 뫼르소는
자신의 재판에 철저히 소외당한다.
예비 심리에서 종교적 관심과 개념을 인식시키려는 판사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을 초월해 반항하는 듯한 모습이 사실과 다른
이방인의 모습이다.
살인과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엄마의 장례식에서의 모습이나
장례식 이후 사랑하지도 않는 다는 그래서 결혼 의지도 크지 않지만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일반적 이성욕구와 관심
그로인해 갖는 기본적이며 생리적인 욕정의 해소를 살인과 연결시키려는 시도
배심원이나 판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 조금이라도 유리한 판결을 얻어 보려
피고의 입을 막아버리려는 변호인의 행위 자체도
재판의 당사자인 피고가 소외당하면서 이방인으로 취급한다.
이렇듯 많은 재판이 사실과 진실을 밝히기 보다는
정의를 가장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피고의 진실을 외면하면서
철저하게 고립된 이방인을 양산한다.
물론 피고인 들이 사실을 교묘하게 감추면서 진실을 왜곡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모습이나 색깔로 포장해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그러니까 법조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방인 만들기에 공범역할도 횡행하지만
법조인들이 정의를 외면하고 자신의 구상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이
많은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몰아 실의에 빠지게 하고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뫼르소는 사형을 받고 죽음을 알리는 새벽의 발자국 소리에 촉각을 세운다.
혹여나 그것을 놓칠세라 낮에 자고 밤부터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다 새벽녘까지 발자국 소리가 없으면 또 24시간이 연장되었음을 인식한다.
하지만 사제의 방문은 거절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무감각 무 개념처럼 산 것의
연속인지 사제의 방문을 거절하지만 결국 사제 스스로 그를 찾는다.
뫼르소가 불쌍하다는 표현까지 하면서 이것저것 묻는 것에 단답형으로 대답하지만
머지않아 귀찮게 생각하며,
현재와 다른 생애라는 것이 어떻다고 생각하느냐의 물음에
“지금의 삶을 회상할 수 있는 그런 삶!”이라며 넌덜머리가 난다고 외친다.
이방인 같은 이 세상의 삶, 하지만 사형수로서 얼마 남지 않은 삶을
다른 것으로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절규의 외침.
불쑥 찾아온 사제가 나가고 안정을 찾으며 침대에 몸을 던져 잠을 천한다.
별이 보이는 밤이 돼서야 잠을 깨고 한밤의 냄새, 흙냄새를 맡으며
놀라운 평화를 느낀다.
이 때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자신과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이라 생각하며
이방인이라는 소외된 세계에서 해방됨을 느낀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이방인이다.
젊은 혈기로 넘칠 땐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정열로 산다.
틀리거나 잘못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에 얽매여 많은 것을 뒤로하며
희생하는 삶을 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사는 이방인의 삶,
너무 집착하거나 희생이라 매달리지 말고
오늘 하루를 충실히, 옆에 있는 사람과 즐겁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후회하지 않는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닐런지······
길벗의 다음 근무지의 안전과 건강,
그리고 나와 영원한 우정과 사랑을 위하여······
June 28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