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마음, 아니면 한 바탕 큰 소리로 엉엉 울고 싶은 마음이라고 해야 옳을까? 문밖으로 나오니 잔뜩 흐려져 있는 하늘을 덮고 있는 짙음과 밝음이 엉키듯 섞인 뭉게구름이 뒷맛을 더욱 더럽게 한다. 하지만 기분 나쁜 더러움이 아니라 조금은 마음을 들뜨게 하는 더러움이라 하면 온전한 표현일까? 두통이 있지만 그리 괴롭지 않으면서 즐기고 싶을 정도의 통증, 암튼 환락에 빠진 듯 하다는 형태의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여운을 즐기고 싶은 불쾌함 같은 마음이다.
최근에 소설을 읽으면 소설 속에 너무 빨리 그리고 깊이 감정이입 되어 헤어나질 못한다. 또한 허우적거림 속에 여운을 즐기는 성향이 잦아진다. 그러는 사이 간간히 실수가 있어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기에 소설과 멀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만 꼭 환각제에 중독 된 듯 다시 찾는다. 그래 중독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소설을 멀리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찾은 것이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이다. 지루하지 않고 깊이 빠지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코믹이나 속을 시원하게 해 주는 전투영화 같은 것 말이다. 색계로 유명세가 더해진 탕웨이가 한국의 김태용 감독과 결혼한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영화가 탕웨이, 현빈 주연의 [만추]였다. 색계를 보고 강렬한 인상을 가졌던 탕웨이가 한국 감독과 결혼이라는 뉴스, 또 둘이 만남의 계기가 되었다는 영화라는 것에 관심을 끌려 보게 되었다.
조금한 칙칙한 하늘 조명이 있는 시애틀의 평범한 거리를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의 여자가 달린다. 상처와 멍이 든 얼굴로 달리던 여자는 방향을 바꾸어 오던 길을 거슬러 달린다. 집에서 도망을 가다가 다시 집으로 향하는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 한 사람이 쓰러져 있고 여자는 쓰러져 있는 사람을 관찰한다. 그 집은 여자의 집이고 벌러덩 누워 쓰러진 사람은 죽은 듯하다. 남녀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을 반으로 접어 구기고 널브러져 있는 편지 같은 것들을 쓸어 모은다.
7년 뒤, 교도소에 수감된 여자를 간수가 호출하고 여자는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의 전화를 받는다. 그리고 오빠의 신청으로 엄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72시간 동안 보석으로 풀려난다.
여자가 탄 시애틀로 향하던 버스가 중간 정거장에 멈췄다 막 다시 출발하는데 한 남자가 도망치듯이 뛰어 오면서 문을 두드리며 버스를 세운다. 문을 열자 뛰어 든 남자에게 운전기사는 조심하라며 티켓을 요구하지만 남자는 가진 돈이 부족함을 알고 버스 중간에 앉아 있는 여자를 향해 걸어가 $30만 꿔 줄 것을 요구한다. 여자는 남자를 한 참 바라보다 지갑을 뒤져 현금 $30을 건네준다. “내 친구가 티켓을 잃어 버렸데요”라며 능청스럽게 운전사에게 티켓 비용을 자신의 돈과 합쳐 건넨다. 남자는 여자에게 돈을 갚을 때까지 보관하라며 자신의 시계를 건네준다. 여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다.
남자는 교포여자들을 상대로 즐거움을 선사하며 돈을 받는 미국에 온지 2년 된 한국 사람이고 여자는 중국인이다. 시애틀에 도착하자 남자는 여자에게 돈을 갚을 테니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지만 여자는 갚을 필요도 없고 전화도 없다며 거절한다. 그러자 남자가 자기 전화번호를 주며 돈을 갚아야 하니 꼭 전화하라고 하지만 여자는 남자와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쪽지를 쓰레기통에 버린다.
이렇게 둘이 헤어지고 영영 만나지 못하면 영화가 아니다. 시애틀에 도착한 둘째 날 여자가 변화를 하고 싶은 듯 옻과 귀고리까지 새로 사서 치장을 하고 거리에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교도소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보석으로 출감할 때 교도관은 전화를 건네주며 전화를 꼭 받아야하고 만일 받지 않으면 바로 수배령이 내려 체포한다는 엄포를 놓았기 때문에 전화를 받아야 한다. 그 전화로 여자는 기분 전환하려고 새로 치장 했던 드레스, 자켓, 귀고리까지 모든 것을 공중화장실의 문에 버리고 교도소로 돌아가려는 버스를 미리 사려는 듯 티켓 판매 창구의 줄을 서지만 자신의 차례가 되면 사지 않고 뒤로 돌아 맨 끝에서부터 다시 차례를 기다리다 또 도는 것을 몇 번인가 하며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한다. 여자들을 상대로 즐거움을 선사하는 남자는 여자를 다시 만날까 하여 버스정류장을 배회하다 여자를 다시 만난다. 남자는 빌린 돈 $30을 돌려주려 하지만 여자는 표정의 변화 없이 받지 않는다. 자꾸 건네려는 남자에게 여자는 "Do you want me?"하며 같이 자지 않겠냐고 묻고 둘은 모텔로 향한다.
여자가 남자의 옷을 벗기고 이어 남자가 여자의 옷을 서서히 벗기면서 끌어안고 애무를 시작하려 하자 여자는 남자를 강하게 뿌리친다. 여자가 급히 옷을 입자 남자는 주섬주섬 옷을 입으며 자신이 잘 못한 것이라며 당신에 나를 만족하지 못한 첫 손님이니 오늘은 할인 해 주겠노라며 데리고 씨애틀의 유명한 Farmers Market으로 데리고 간다. 둘은 여전히 서로의 이름을 모른다. 여기서 여자의 이름을 알기위한 전문작업가 다운 남자의 행동이 나온다.
둘은 식사를 위해 Greek 레스토랑에 간다. 남자는 “오늘이 내 생일인데 아내가 예약을 했다”고 한다. 종업원은 여자에게 이름을 물어본다. 하지만 여자는 예약을 하지 않았다고 대답을 하자 종업원은 남자를 도우려는 듯 지금 예약해도 된다며 미소를 지으며 중저음의 목소리로 이름을 알려 달라고 요청한다. 남자의 엷은 미소, 조금은 당황스러워 하는 여자의 표정,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름을 말한다. “애나, 애나 첸”
자리에 앉아 메뉴를 보며 "What do you wanna eat, Anna?"라며 알게된 여자의 이름을 부르고 "i'm a Hoon"이라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자 여자는 애매하지만 엷은 미소를 보인다. 전문작업 남자답다.
영화에서는 3개국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애나는 가족들과 중국어로, 훈은 자신의 일에 한국어로, 애나와 훈은 영어로 대화를 한다. 3개 언어가 교차로 사용되기 때문에 한국어로 듣고 있는 건지 아님 영어인지 중국어인지 가끔은 혼동이 오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많이 이해되는 언어는 한국어, 조금 이해되는 언어는 영어, 거의 이해되지 않는 언어는 중국어다. 영어로 한참 이야기 하는데 이해가 되지 않으면 중국어인가?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둘은 씨애틀 시내관광을 한다. 가이드가 손을 들라면 들고 손뼉을 치라면 손뼉을 치지만 애나는 소극적으로 따라하는 흉내만 낸다 버스 투어가 끝나고 놀이 공원에 가지만 문이 닫혀있다. 문 닫힌 놀이공원에서 범퍼카를 타고 서로 부딪히며 조금은 가까워진다. 그러다 애나가 갑자기 멈춰 바깥쪽을 바라보는데 사람들의 통행을 막기 위해 막았던 가림막이 무대가 열리듯 치워지고 남녀가 등장한다. 여자로부터 도망치듯 떠난 남자가 말을 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그리스에서부터 남자를 찾아 온 여자가 뭐라고 하지만 역시 들리지 않는다.
훈이 입모양을 보고 남자의 말을 따라 하고 여자가 말을 할 때 여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따라한다. 흡사 이수일과 심순애의 무성영화에서 변사가 남녀의 목소리를 내는 것과 비슷하다. 말을 주고받은 지 몇 차례 지나지 않아 여자가 말을 할 때 애나가 받아 소리를 내며 따라한다. 그렇게 애나와 훈이 따라하다 보니 진짜 자신들이 대화하는 것처럼 주고받는다. 어둠이 지고 주변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뜨고 마지막에 남녀는 둘만 남은 무대에서 춤을 추다 퇴장한다.
아무도 없는 Farmers Market을 도망치듯 애나가 달린다. 훈은 놓치지 않으려는 듯 달려가고 애나는 잡히지 않으려는 듯 달리지만 훈을 이길 수는 없다. 훈에게 따라잡힌 애나는 자신은 내일 어머님 장례식이 끝나면 교도소로 돌아가야 한다고 고백하듯이 이야기한다. 더 이상 가까워 질 수 없는 관계임을 아쉬움을 담아 토로하는 것이다.
훈이 내가 아는 유일한 중국 단어는 “하오”인데 그것은 “좋지 않다”라는 뜻이 아니냐고 반문하자 애나는 “하오는 좋다”라는 뜻이라고 알려 주자 훈은 “좋지 않다”는 무엇이냐고 묻고 “화이”라는 대답을 듣는다. 훈이 이곳에 자주 왔었냐고 영어로 묻자, 애나가 어릴 자주 왔던 곳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와도 왔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훈은 “하오”라고 장단을 맞춘다. 애나는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영어로 시작하지만 머지않아 중국말로 설명 한다. 훈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하오”, “하오, 하오”, “화이”, “화이, 화이”하며 장단을 춰준다. 애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기에 때로는 좋지 않은 이야기에도 “하오”, 또 때로는 좋은 이야기에도 “화이”라며 응수를 한다. 둘은 그렇게 엇나가는 대화를 하지만 가까워진다.
애나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끝내고 교도소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밖에서는 훈이 작별의 손을 흔든다. 버스가 출발하였고 눈을 감고 있는 애나의 옆자리에 훈이 앉는다. 애나가 놀라워 하지만 훈은 능청스럽게 처음만난사람처럼 대화를 시작하며 버스여행을 한다. 안개가 짙어 쉬어갈 수밖에 없다는 운전기사의 안내에 이어 허름한 정류장에 버스는 멈춘다. 그리고 훈은 자신을 쫒는 사람들에게 납치를 당하지만 애나는 그냥 갑자기 사라진 것으로 한다. 자신의 팔에는 훈의 시계가 채워져 있고 그것을 훈이 돌아오겠다는 약속의 표시로 이해한다.
2년 뒤 애나는 만기 출소를 하고 훈과 헤어졌던 간이정류장에서 커피와 케이크가 놓인 조그만 레스토랑에서 훈을 별로 가망이 없는 체념의 기다림에 영화의 끝을 알리는 자막이 흐른다.
차를 달린다. 음악을 튼다. Bach의 Concerto가 흐르며 혀가 긴 개구리가 파리를 잡아채듯이 빠르게 영화의 여운 속으로 나를 빠뜨린다. 차를 세우고 눈을 감고 나를 놓는다. 정신을 잃듯 잠에 빠진다······
July 23, 2014
'그리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물어 가는 여름 (0) | 2014.08.23 |
---|---|
일요일 아침의 늦장 (0) | 2014.07.31 |
선교훈련 Mission Perspective (0) | 2014.07.08 |
불꽃놀이 감상의 다른 방법 (0) | 2014.07.07 |
수선화에게(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정호승 (0) | 2014.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