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3권 <최후의 노력> - 시오노 나나미
로마는 도시국가로 시작해서 왕정, 공화정에 이어 아우구스투스가 초대 황제가 되어
제정이라고 구분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의 ‘절대군주정’과 구분하기 위해
제정을 ‘원수정’으로 구별한다.
저자의 기술을 빌리면 후기 로마 제국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재편성한 ‘절대군주정’이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원수정 로마보다 조직체로서 더욱 질서정영하다는 표현을 한다.
그런데 왜 팍스 로마나로 복귀하지 못하고 150년 뒤 멸망할까?
그리고 원수정과 절대군주정의 차이는 무엇일까?
제정의 원수정은 황제가 되려면 원로원의 승인과 시민의 동의가 필요하였다.
원로원의 승인이 어쩔 수 없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경우도 있었지만
황제가 되기 위해선 원로원에서 취임연설을 하고 원로원 근처의 연단위에 올라가
시민을 대상으로 취임인사를 한 후 카피톨리노 언덕에 올라가
신전에 참배하고 신들의 도움을 청하는 절차로 정식 황제의 업무를 시작한다.
이는 ‘시민 가운데 제일인자’를 부각시키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나는 것이다.
왕관의 씌워주는 대관식 등의 절차가 없는 것은 황제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줄 존재가
없기 때문인데 황제를 결정하고 승인해 주는 절차가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시민 가운데 제일인자((Princeps)'는 '지배자(Dominus)'로
‘시민(Civis)'는 ’신하(Servus)'로 바뀌는 것은 물론 왕관과 화려한 토가로 치장하였다.
그리고 제국 개조로 크게 달라진 것이 세금이다.
아우구스투스로가 만든 로마 제국의 세제는 세금은 넓고 얕게 징수한다고 할 정도로
간단명료한 기본 방침에 바탕을 두었지만 절대군주정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 세제는 납세자가 우선이고 국가는 세입이 허용하는 범위의 것에만 손을 댔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세제는 국가가 우선이고, 국가에 필요한 경비가 세금으로 납세자에게
부과되었다는 저자의 설명이다.
팍스 로마나가 실현 가능했던 것은 제국의 안정과 낮은 세금(승자는 피의 세금인 병역의무),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간단한 국가 조직(군과 민간의 인적교류, 지방분권),
일관성 유지(정책, 도로 보수 등) 적정양의 군대 유지로 가능했던 것인데
3세기 후반 로마 제국 농민은 밀려오는 파도처럼 침략을 되풀이하는 야만족한데
벗어나기 위해 농경지를 버리고, 신변안전과 해로운 생활 수단을 찾아 도시로 흘러들면서
제국 자체가 불안하였고 이로 인해 군대 자체가 급격히 팽창하여 경비가 증가한 데다
또한 로마 제국의 모든 사람이 로마시민이 되면서 속주세가 없어지면서
국자 제정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지금 현 세계의 기축통화는 미국의 달러처럼 로마 제국 시재의 기축 통화는 로마 화폐
그 중에서도 데나리우스 은화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혁당시 데나리우스 동전은 3.9그램에 은 100%였지만
제국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3세기 후반 무렵엔 3그램에 은 5%로 떨어진 것을
서기 295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혁으로 3.4그램에 은 100%로 바꾸었다.
하지만 이전 은화도 함께 유통되어 개혁으로 새로 발행된 은화는 장롱 은화가 되었다.
이로 인해 화폐개혁은 성공하지 못하게 된다.
원수정 시대의 로마 제국은 황제, 원로원 의원, 기사계급(관료나 경제인), 평민, 해방노예,
노예로 나뉜 계급 사회였지만 직업 선택의 자유와 거주지 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계급간의 유동성 또한 가능하여 사회에 필요한 새로운 피처럼 인재가 이동하였다.
하지만 절대군주제에서는 군대와 민간 경력이 완전 분리 된,
즉 원로원은 군대로 갈 수 없고 군인은 원로원이나 관료가 될 수 없도록 바뀌었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두정치’라 해서 서방과 동방을 나누고
각각 정제와 부제로 분리하여 네 명의 황제가 다스리는 것으로 개혁하였다.
이렇게 한 이유는 황제 한 명이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리기 어려웠기 때문인데
이는 북쪽의 야만족이나 동방, 그리고 북아프리카에 빈번히 침략하여
적절히 대처한다는 근본적인 원인에서 지역을 네 개로 나누어 황제와 동등한
병권과 경제권을 주어 팍스 로마나의 부활을 계획한 것인데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제국의 안정은 성공하였지만 군대의 급속한 팽창으로 제정의 어려움을 초래하였다.
사두 정치로 네 명의 황제가 있지만 한 명의 황제가 담당하는 최고 제사장이나
제국의 방향 결정권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가지고 있었다.
로마는 왕정, 공화정, 제정으로 정치체제가 바뀌었어도 로마 제국의 수도는
‘로마’로 나라의 모태일 뿐만 아니라 두뇌고 심장이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체제는 수도 로마의 전통을 단절해버렸다.
이로 인해 각 지역으로 보내는 인재의 창구였던 원로원은 군무를 맡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인재 풀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로 경주를 벌이는 경기장에서 손수건을 떨어뜨려
전차를 출발시키는 역할‘이 고작이었다고 한다.
과거에 로마는 병참으로 이긴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하루 밤을 머문다 해도
완전한 숙영지를 먼저 갖추거나 도강이 필요할 때 임시용 다리를 건설하더라도
견고하고 오래 갈 수 있도록 만들고 필요 없을 때는 과감히 철거하는데
이 같은 것은 좁은 의미의 병참이고 로마인은 병참을 훨씬 넓은 의미로 이행했다.
군사 생동을 벌이는 곳 주변의 주민을 어떻게든 교묘히 자기편으로 끌어들인다거나
전투를 하더라도 약탈이나 말살을 가능한 자제하였다.
이 시대의 ‘병참’을 의미하는 라틴어가 ‘아르스(ars)'로 영어로는 ’아트(art)'로
본래는 인간의 모든 ‘기술’을 뜻하는 낱말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하지만 3세기 말 1. 2차 ‘사두정치’에 이어 6명의 황제가 있을 때는
협력하지 않은 도시는 모조리 습격하여 약탈하고 불태워 야만족과 다르지 않은,
그러니까 로마 군대라는 긍지를 잃어버리는 행동으로 주민들이 등을 돌린다.
이 시대에 등장하는 황제가 ‘대제’로 불리는 콘스탄티누스다.
2차 사두정치 시대 서방의 정제 콘스탄티우스가 죽자
아버지에 이어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를 통치하는 부제로 등극한 콘스탄티누스,
차례로 다른 황제들을 물리치고 남은 황제는 로마를 주축으로 관할하는 막센티우스다.
책에 의하면 ‘역사를 창조한 전투’ 중 다섯 번째를 두 황제가 로마 제국을 재패하기 위해
북부 이탈리아의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꼽는다.
역사를 창조한 다섯 전투를 나열해 보면 이렇다.
살라미수 해전 - 기원전 480년,
30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쳐들어온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와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과의 전투인데 지상전의 열세를 해전에서 단숨에 호전시켜
페르시아군을 철수하게 한 것으로 지휘관은 아테네의 테미스코클레스였다.
이수스 회전 - 기원전 333년
이수스 평원에서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그리스군과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의 군대가 격돌한 회전으로 페르시아군은 15만이었지만
5분의 1병력으로 200명의 전사자만 내고 완승을 거둔 전쟁으로
이후에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한다.
자마회전 -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영토 자마 평원에서 당시까지 로마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듭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과 로마의 젊은 피 스키피오,
로마와 카르타고의 향방을 결정하고 이후에 카르타고가 멸망한다.
알레시아 공방전 - 기원전 52년,
오늘날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중앙의 알레시야 평야를 무대로 벌어진 전투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군 5만 명과 갈리아 부족들이 연합한 30만 대군의
전투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을 결정하는 전투가 되어 로마가 알프스를 넘어
유럽 북부까지 로마 세계에 편입시키는 첫걸음의 전투다.
그렇다면 어떻게 로마의 내전인 ‘밀비우스 다리 전투’가 어떻게 역사를 창조한 전투
대열에 합류 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큰 영향력을 가진 전투를 ‘역사를 바꾼 전투’나 ‘역사를 창조한 전투’라고 부른다.
312년에 벌어진 ‘밀비우스 다리 전투’도 그런 의미의 한 사례로 꼽힌다.
이 전투가 그 후 1천년 동안이나 계속된 중세로 가는 문을 열었기 때문이고,
중세 1천 년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기독교 세계를 향해 첫 발자국을 찍게
되었기 때문이다.>
312년 10월 37세의 콘스탄티누스가 공격하고 34세의 수비하는 막센티우스의
‘밀비우스 다리 전투’가 전쟁사에서는 다루어지지 않는 세 가지 이유를
첫째, 전쟁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들 중에서 저자가 설명하는 관점으로 보는 사람이
극시 소수파였었고
둘째, ‘기라성 같다’고 표현하고 싶은 명장이 등장하지 않았고
셋째, 이 전투가 전쟁사 전문가 들이 관심을 끌 만큼 탁월한 전략과 전술이 없다.
는 것이다.
어떻든 이 전투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는 수도 로망에 입성하였고
원로원 의원과 시민들은 앞을 다투어 정복자 앞에 무릎을 꿇고는 부제에서 정제로
승격시키기로 의결해서 같은 로마인을 상대로 한 전투임에도
개선문을 세워 승리자 콘스탄티누스에게 바치기로 결의했다.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사만이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위인으로 꼽히는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그가 기독교 진흥에 크게 이바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제’라는 뜻의 ‘마그누스(Magnus)'를 붙여 부르는 역사상 인물은
알렉산드로 대왕, 콘스탄티누스 대제, 그리고 사를마뉴(사를 대제)로
알렉산드로를 빼면 둘은 기독교와 관계가 깊은 것으로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역사가들 중에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도래와 함께 로마사 서술을 그만두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그때부터 로마 제국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공화정과 제정 시대를 통해 로마적이라고 여기진 많은 특질들이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결정적으로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인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비로마화를 살펴보면
새로운 제국, 새로운 수도, 새로운 종교에 새로운 기축 통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볼 수 있다.
서기 313년,
제국 서방의 정제가 된 콘스탄티누스와 동방의 정제 리키니우스가 밀라노에서 회담을 열었다.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인정한 것은 311년 제국 동방의 정제였던 갈레리우스가 처음이었지만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가 공동으로 ‘밀라노 칙령’이 명실공이 기독교를
인정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를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삼았던 로마 제국에서
<오늘부터 기독교들이 자신의 공동체를 재건하는 것을 인정한다
(즉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것도 허용한다). 다만 제국의 법률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안에서
허용 한다는 점을 명기한다.>는 칙령을 내린 황제가 갈레리우스였다면
밀라노 칙령에서는 그것을 더해
<어떤 신이나 어떤 종교도 명예와 존엄성이 훼손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훼손당하는 일이 많았던 기독교도에 대해서는 특히 몰수당한 기도처의 즉각 반환을 명하는 것으로 보상하고자 한다. 몰수된 기도처를 경매해서 사들여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는 그것을 반환할 때 국가로부터 정당한 값으로 보상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여기에 명기한다.>
‘밀라노 칙령’이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종교에 비해 우대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라
로마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을 공표한 칙령인데
주목할 것은 몰수한 기도처를 돌려주고 경매로 구입한 사람들에게 국가가 배상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설명에 의하면 ‘밀라노 칙령’이 신앙의 자유는 인권 존중의 한 기둥이라는 점에서
18세기 유럽에 널리 퍼진 계몽주의의 선구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천연의 요새로 불리는 비잔티움으로 옮겨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로 명명한다.
왜, 그곳을 도읍으로 정했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어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지리적 조건이라는 게 정설이다.
모든 걸 자신이 원하는 형식이나 조건에 맞게 새로이 건설하여 자신의 이름을 붙여
도읍을 정한 것 또한 후세는 비로마적으로 평한다.
콘스탄티누스는 원로원도 무력화 시켰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새 수도를 건설한 뒤에도 로마를 계속 수도로 남겨놓았고,
원로원 또한 그대로 두었지만 새 수도에 역시 원로원과 회의장을 만들었지만
황제가 임명하는 원로원은 실권이 없는 명예직이었고 이 때문에
로마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시작하여
콘스탄티누스 때에 이르러 원로원은 철저히 무력화 되어 군주제정을 확립하였다.
군대와 방위선 또한 바뀌었는데 주로 말을 타는 북방 야만족의 침략이 많았던 3세기에
야만족에 대응하기 위해 로마군도 중무장 보병에서 기병으로 주전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로마군은 회전이라 불리는 평원에서의 전투에서는 무적이었지만
말을 타고 약탈과 파괴 후 달아나는 야만족 대응에는 부적절하여 바꾸는 것이
필요불가결 했겠지만 이로 인해 방위선을 지키는 병력은 농사꾼의 파트타임이 되었다.
물론 방위선에 살고 있는 농사꾼들의 대부분이 로마군에서 병역을 마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이는 제국의 안정보장 시스템의 큰 변화를 뜻한다.
또한 이전엔 야만족이 침략하면 즉각 대응하고 야만족의 지역까지 쳐들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패자동화정책에 의해 적절한 보상과 협의 과정을 가졌지만
콘스탄티누스의 시대에는 야만족이 침입하여 방화와 약탈을 하면 쫓아가 격퇴하는
수준의 전략, 그러니까 피해를 당한 지역에서 몰아내는 정도의 전략으로 수정하였다.
로마 제국의 기축통화는 앞에서 이미 서술하였듯이 데나리우스 은화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은본위’를 버리고 ‘금본위제’로 바꾸었다.
금화는 시장에서 잘 유통하지 않았지만 금 함유율이 100%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금화를 제국 통화제도의 기축으로 삼기로 결정한 것이다.
현재시대의 금괴라는 것이 이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평하듯이 군사관계자나 전문가들
행정 관료들에게 봉급을 금화로 지급하고 관청에 물자를 납품하는 생산업자도
제국으로부터 금으로 지불받았지만 이로 인해 당시까지 기축 통화였던
은화나 동화의 가치가 계속 떨어져 공무원이 아닌 일반사람들은 계속 가난해졌다.
콘스탄티누스의 가장 큰 문제로 보이는 것이 가정 내의 유혈사태다.
310년 아내의 아버지였던 선제 마시미아누스를 죽였고 2년 뒤 312년엔
아내의 오빠인 막신티우스를 무찔러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325년엔 이복누이와 결혼시키고 함께 밀라노 칙령을 공표했던 정제 리키니우스를
전투에서 무찌른 야만족과 반란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에서 살해하였다.
또한 326년 부제 크리스푸스가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심문에도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황후 파우스타와 불륜관계를 맺었다는 이유로 29세에 생을 마쳤는데
크리스푸스는 콘스탄티누스가 전처와 사이에 태어난 친자로 리키니우스를 무찌를 때
해상에서 도와 큰 공헌을 하였지만 필요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살해했을 것이라는 게
역사가들의 평이라 한다.
크리프수스와 불륜관계를 맺었다고 한 황후는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궁에 있는
욕실에 가두여 열탕의 수증기로 죽이곤 목욕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공표하였다.
저자는 누가 한 말인지는 잊었지만,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로마인은 세 번 세계를 지배했다.
처음에는 군단으로, 다음에는 법률로, 마지막에는 기독교로.’
이럴 정도로 콘스탄티누스는 왜 그렇게까지 기독교회 진흥에 열심이었을까?
연구자들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편든 것은 그 자신이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틴에 건설한 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기독교 교회는 지어도
로마 신들을 모시는 신전은 짓지 않았고 다신교의 메카라는 느낌이 강한 로마에도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예루살렘에 성분묘 교회를 세운 것도 콘스탄티누스였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에게는 호시우스라는 고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왕권신수설이
시작되는 것으로 평하기에 더욱이 비로마적이라고 평하는 것이 아닐까?
콘스탄티누스가 그러하였음에도 정치를 잘 한 것으로 평가하는 역사가가 많다.
또한 기독교에서는 대제로 불리 울 정도로 많은 도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가지만 팍스 로마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100년 뒤 멸망도 막지 못했다.
February 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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