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11권 <종말의 시작> - 시오노 나나미
로마는 그리스 시대의 특색처럼 도시국가로 출발할 때 왕정이었다.
그러다 두 명의 집정관과 원로원이 다스리는 공화정의 시대로 이어졌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이은 아우구스투스 때에 제정시대로 바뀐다.
카이사르가 종신 독재관이 되면서 공화정이 끝날 것을 우려한 주변사람들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이어진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을 체청하고 나섰지만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의 표현에 의하면 교묘한 속임수로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꾸어
최초의 황제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제정의 황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앞에서도 여러 번 반복 설명하였지만 11권에서 저자가 자세하게 쓴 글을 소개하면
‘현대인은 고대 황제라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로마 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법을 무시하는 것은 황제에게도 허용되지 않았다.
새로운 일을 하고 싶으면 우선 법을 해로 제정해야 했다.
공화정이든 제정이든, 국가 로마의 주권자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권 소유자였다.
로마를 나타내는 ‘S.P.Q.R.'는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Senatus Populus que Romanus)'의
약자이고, 여기에는 ‘시민 가운데 제일인자(Princeps)’의 약자인 P도 없고,
‘황제(Imperator)'의 약자인 I도 없다.
로마 황제는 주권자인 로마 원로원과 시민으로부터 통치를 위임받은 존재다.‘
이를 뒷받침 할 근거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명상록에서
자신이 이끄는 로마 제국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집행되고, 개인의 권리와 언론의 자유도 보장된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백성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기반을 둔
군주정의 존재 이유다.>
이런 로마인의 철학은 판테온을 보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지명한 아우구스투스가 군사적 재능이 부족한 것을 알고
같은 나이의 도우미로 지명했던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 아그리파가 서기 1세기에 지은 것이
판테온인데 서기 2세기에 하드리아누수 황제가 이전의 정사각형을 원형으로 바꾸고
신들의 위치를 중앙에서 둥근 벽면으로 바꾸고는 이후에 다시는 그 같은 건물을
짓지 않았는데 ‘판테온’은 다신교의 산물이기에 로마 이후에 자기가 믿는 신이 아닌
다른 신을 믿는 종교는 모조리 사교로 여겼기 때문에 신보다는 인간 중심의
로마인의 철학을 담은 건물을 지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 왜 이 판테온이 로마인의 철학이라고 할까?
나는 가 보질 않아 모르기에 저자가 설명한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자.
‘판테온을 찾아가 그 내부로 들어가서 완전한 동그라미를 이룬 넓은 바닥 한 복판에 서보라.
바로 머리 위에 동그랗게 잘린 푸른 하늘이 보인다.
수많은 관광객도 사라지고, 그들이 내는 시끄러움도 사라질 것이다.
넓은 판테온 안에는 한복판에 서 있는 당신과 벽면을 딸아 늘어서 있는 신들만 남는다.
다른 신전에서는 거기에 모셔져 있는 신이 주인공이지만,
판테온에서는 신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인간이 주인공이다.‘
이는 다민족, 다문화, 다신교 정신을 기리는 로마의 철학이라는 설명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인데 로마인은 인간이 중심이고 신은 인간의 조력자로
로마인들이 신들에게 드리는 ‘기원’은 이 불행에서 우리를 구해주십시오 하고 비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이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신들도
그런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비는 것이다.
유대교나 기독교 같은 일신교는 신이 중심이고 모든 것을 해결하며
인간은 원하고 신이 주는 대로 받는 그러니까 신이 인간에게 살아갈 길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 같은 차이 때문에 로마의 판테온과 같은 건물은 로마 이후에 지을 수가 없다는 결론이다.
로마인 이야기 11권은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로 불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부터
내란기를 거쳐 종말로 치닫기 시작하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까지의 이야기로
두 황제는 비슷한 점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속주 갈리아의 아탈리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속주 북부 아프리카 출신에 둘 다 속주 출신의 황제며
제정시대 로마에서는 흔치 않게 둘 다 친아들에게 세습한 황제다.
또한 두 황제는 전쟁 중에 죽은 공통점이 있고 죽음 뒤에 일어난 일도 비슷하여
아울레리우스 황제의 아들인 콤모두스 황제는 거의 승리해 가는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서두른 강화조약으로 로마로 돌아 왔고,
칼레도니아(현재의 스코틀랜드)와 전쟁 중에 죽은 세베루스의 뒤를 이은 카라칼라 역시
강화를 맺고 로마로 돌아가 칼레도니아를 완전 재패하려는 계획을 무산시켰다.
또한 마루크수 아울레리우스의 자녀들은 누나와 남동생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경우에는 아들 형제가 불화가 일어난 것도 공통점이다.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의 마지막 유언에
“죽으면 황제나 노예나 마찬가지”라는 우수가 감도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기 전까지는 황제오 노예가 마찬가지가 아니라는 로마인의 긍지를 삶의 버팀목을 가지고
주도권을 휘두를 수 있었던 시대는 끝났다는 평가를 저자는 서슴없이 하였다.
이번에도 책의 겉표지에 있는 글을 인용해 보기로 하자.
‘후세 사람들이 오현제 시대라고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는 시대는
서기 96년부터 180년까지 약 1세기,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다섯 황제가 다스린 시대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는 제1장부터 제3장까지
제정을 총괄한 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주고 아들 콤모두스가 즉위한
180년을 기점으로 하는 제4장부터 쇠퇴와 멸망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한다. 즉 로마 제국의 쇠망은 오현제 시대의 종말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역사관이다. 이런 생각은 기번의 시대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이 글은 저자가 쓴 본문 중의 내용으로 지금으로선 이해가 잘 안 되긴 하지만
15권 전체를 마치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친자에게 세습한 일이 거의 없는
제정시대에 친자인 콤모두스의 나이 15세에 집정관에 취임시키며 자신과 동등한
권한을 부여해 달라는 요청을 원로원에 하였고 승낙을 받았다.
로마의 제정시대는 물론이고 특히 오현제 시대의 뚜렷한 특징은 황제가 가장 적합한 인재라고
판단한 사람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하는 방식으로 계승되었다는 점이다.
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트라야는 하드리아누스를 뒤를 이어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으로 이어지는 후계자를 양자로 삼아 즉위하였다.
이는 인재를 등용할 때는 무엇보다 실력을 존중했고 양자로 삼는 것은
황제 등용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실력주의만으론 다른 실력자들이
납득하지 않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는 특징이다.
물론 이 같은 양자의 전통은 오현제 가운데 네 명이 아들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은 콤모두스는 다른 황제들에 비해 실력이 뒤 떨어진다는
것은 역사가들의 공통적인 견해로 분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기왕에 콤모두스가 나왔으니 영화이야기를 잠시 하고 넘어가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러셀 크로 주연의 <글래디에이터>가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와 콤모두스 황제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저자의 설명을 빌면 영화초반에 막시무스가 벌이는 전쟁이 게르마니아와의 전쟁으로
고증을 잘 거친 것 같기는 하지만 다소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로마군은 전술의 주는 회전(回戰)이라고 하여 평원에서 중앙에 중무장 보병,
좌우에 기병을 배치하여 기병이 적의 좌우를 돌아 포위하여 섬멸하는 방법으로 무적이었다.
이 같은 회전의 근원은 로마 이전의 번영을 누렸던 강국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이 주로 사용하여 로마를 괴롭혔던 전술로 2,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이긴
스키피오 아프리카나가 로마군에 도입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평원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였지만 당시 게르마니아 지방은
산과 숲이 많아 평원에서 벌이는 회전이 어려웠기에 분산 격파 혹은
근접전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도 고증의 결과가 크게 틀리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에서 콤모두스가 아버지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황제를 비밀리에 암살 한 것이나
엄마처럼 생각하는 누나와의 관계, 그리고 장군으로 나오는 막시무스,
그리고 검투장에서의 싸움 등은 역사와는 많이 동떨어진 단순한 영화라는 이야기다.
물론 콤모두스 황제는 치세에는 관심이 적으며 검투경기를 좋아했고
자신이 직접 검투사와 겨룬 것도 사실로 그로 인해 측근으로부터 암살을 당하는 게 역사다.
철인 황제로 평가받는 마르쿠스 아울레리우스는 무능한 친아들에게 세습한 특징 말고도
황제 즉위할 때도 원로원의 허를 찌르는 요청을 한다.
안토니우스 피우스가 죽자 이미 후계자로 충분한 절차와 교육을 거친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안토니우스 피우스의 양자인 동생 루키우스와
함께 황제 취임을 원로원에 요청해서 원로원은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지만 승인하며
마루쿠스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루쿠수 아우랠리우스 안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로
루키우스는 ‘임마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수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로
완전한 동격인 황제로 즉위 한다.
단 한 가지 황제가 겸임하는 ‘최고의 제사장’은 한 사람이 맡는 것이 로마의 전통이기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혼자 취임한 것만 달랐다.
이 때가 서기 161년으로 마루쿠스는 40세, 루키우스는 31세였지만
루키우스는 서기 169년 도나우강 전선으로 출정하였다가 이듬해 수도 로마로 출발해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쓰러져 혼수상태에 있다 사망하고 마루쿠스 혼자 치세를 한다.
마루쿠스는 기질적으로 사색과 철학을 좋아하기에 어떠한 것을 결정할 때
친구들과 먼저 의논한 뒤에 결정을 내리는 성품이지만 꼭 그렇게만 하지 않았고
긴급한 일이나 위급한 일에는 속전속결로 판단과 결정을 내렸기에 철인황제라고 불렸다.
위기에 직면했을 때 타개책은 중요성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 순서대로 실시하는 것이
가장안전하고 확실하지만 우선순위를 정할 수 없을 때는 몇 가지 방책을 동시에 추진
할 수밖에 없는 데 그럴 경우 신속한 결단과 단호한 태도,
즉 빨리 판단을 내리고, 마음먹은 일은 과감하게 실행하는 것이 중요한데
마루쿠스는 필요에 따라 그랬다는 것이다.
그러한 예로 마루쿠스 황제가 병사했다는 잘못 된 정보에 의해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자신의 속주인 시리아에 주둔해 있는 3개 군단에서 승인을 받았다며
황제로 자칭하는 모반이 일어났을 때 갈리아나 브리타니아, 라인강 전선 등에 있는
군단의 기지를 확인하고 모반자 카시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단죄하는 원로원의 결의나
공부하러 외지에 나가있는 콤모두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들을
동시에 추진했다고 한다.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이어 황제에 즉위한 코모두스가 측근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근위대의 설득과 후원으로 즉위한 페르티낙스 황제는 제위에 오른 지 87일 만에
근위대에 의해 살해를 당하고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황제로 즉위 했지만 가까운 판노니아 속주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리아 총독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각각 휘하 군단병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하고 나서 제의 쟁탈전이 시작되었고
결국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다른 사람들을 제압하고 제위를 차지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했던 말
“결과는 나빴다 해도, 당초 의도는 훌륭하고 선의로 가득 찬 것이었다.”
이는 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 인간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듯
베베루스 황제가 했던 개선책이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져 셉티미우스 세배루스 황제에 대해
‘비로마적인 전제군주, 로마 제국의 군사 정권화로 방향키를 돌린 통치가’
역사가들은 평가 하였다.
군인 황제인 세베루스 황제의 군사 정권화의 예로 군단병의 봉급을 인상하고
모든 군단병들에게 금반지를 낄 권리를 주었으며 정식 결혼을 허가하는 등의
개선책을 추진한 것이다.
당시 이전까지 로마는 군단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17세 이상이어야 하고
20년의 만기를 채워야 하며 만기 전에는 결혼을 금지했고 봉급 인상분이 있어도
적립했다가 만기 전역할 때 퇴직금과 함께 한 번에 지급했다.
그랬던 것을 봉금 인상분을 월말 지급되는 액수에 그대로 반영 한 것이나 징병제였던 당시
결혼을 인정해 가족이 군단 주변에 살면서 휴일 등에는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군단 생활이 너무나 편해져버린 것이 군사정권의 단초가 되었다는 평이다.
이는 당장의 군사비 증액으로 이어져 국가 재정을 압박을 받게 되는 것이나
편해진 군대에서 굳이 제대하지 않으려는 현상 등이
카이사르가 말한 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로마 제국의 동쪽 파르티아는 300년 동안 로마와 숙적, 숙명의 관계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는 중에 암살을 당했고
이후에 황제들도 파르티아로 인해 계속 골머리를 앓는 풀리지 않는 숙제였지만
한 편으로는 문명국 파르티아가 있어 줌으로 인해서 견제와 균형을 이룬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세베루스 황제는 파르티아를 점령하겠다는 야심으로 전쟁을 일으켜 막대한 국고의
손실을 끼쳤지만 당시 파르티아는 페르시아 세력에 밀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기에
오히려 본의 아니게 신흥 세력인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돕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전쟁에 승리하였다고 세베루스 개선문을 세우도록 한 것이나
자신의 고향인 북아프리카 렙티그 마그나를 개조 공사하여 금의환향 한 것도
다른 속주 출신의 황제들과 다른 길을 걸었고
또한 베세루스의 제1의 계승자 장자 카라칼라가 황제가 되기도 전 자신의 장인이자
세베루스 황제와 고향친구이기도 한 근위대장 플라우티아투스와 불화로
아버지의 면전에서 칼로 찔려 죽이는 행위,
카라칼라는 황제로 즉위 1년도 지나지 않아 공동 황제 동생 게타를 어머니 면전에서
칼로 찔러 죽이는 등의 어찌 보면 무능한 친자에게 세습토록 한 것도
역사가로부터 비로마적인 전제군주로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이후로 로마 제국은 역사가들이 말하는 ‘3세기의 위기’로 돌진하게 되고 저자는 이를
<생선은 머리부터 썩는다지만, 로마 제국도 ’머리‘부터 썩어들기 시작했다>는 글로
11권을 마무리 하였다.
January 1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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