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혹은 2학년 음악 과목의 방학 숙제 중 한 가지가 3옥타브 건반을 그려 오라는 것 이었다. 건반은 알겠는데 3옥타브가 뭔지 몰라 숙제를 하지 못하였다.
중학시절 교실을 떠나 수업을 하는 과목이 많지 않았다. 체육이 그랬고 음악이 그랬었다. 체육은 좋아 했지만 음악은 좋아 하지 않았다. 체육을 잘 해서가 아니라 교실을 떠난다는 것 자체가 좋았지만 같이 교실을 떠나는 음악은 그러지 못했다. 음악교실은 검정색 피아노 한 대와 피아노 의자, 그리고 나치 문양의 한 조각과 비슷한 그러니까 의자 등받이에 뒤 사람이 음악책을 올려놓을 수 있는 조그만 책상이 달려(다음의 두 기호를 위 아래로 연결 한 것 같은 “「」”) 제일 앞자리에서 뒤로 밀면 줄의 끝까지 도미노처럼 넘어가는 의자가 있었다. 음악 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 갈 때 밀어 넘어뜨리고 줄행랑을 치는 말썽꾸러기가 있어 선생님으로부터 주의를 듣곤 하였는데 어느 날 내가 수업이 끝나고 아무도 없는 시간에 제일 앞의 의자를 밀고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순간 음악선생님께 들켜 출석부로 머리통을 맞은 기억 이후 음악이 더욱 싫어졌다.
이후 음악 시간에 기대할 것은 짧은 주름치마를 입은 선생님이 피아노 의자에 앉을 때 치마 뒤 부분을 들었다 놓으면서 살짝 보이는 엉덩이를 보는 호기심 말고는 가장 싫어하는 과목 중의 하나가 되었다.
덕분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 할 때까지도 기본 도래미만 알 뿐 악보를 전혀 볼 줄 모르는 음악에서는 젬병이 되었다. 그렇게 음악과 멀어지다 보니 유행가는 물론 아는 노래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흥얼거릴 줄 아는 노래는 거리마다 귀 따갑게 들려오던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하는 새마을 노래나 막내 동생이 다방의 tv 아래서 재롱을 부린다고 폼 잡고 따라 부르던 남진의 ‘님과 함께“, 중학교 때 반 친구가 수업 시간에 부르던 뽕짝 ”번지 없는 주막“ 등, 몇 가지가 내 아는 노래며 음악의 전부였다. 덕분에 중학교 때 소풍 가서 장기자랑 시간에 기타 치며 노래하는 고등학교 형과 누나들은 모두 날라리 같아서 가까이 가서는 안 될 사람들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반의 한 녀석이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하며 시작하는 나훈아의 “고향역”을 저음으로 구성지게 부르는 모습을 보며 나도 “저렇게 노래를 잘 불렀으면” 했던 것이 음악에 대한 첫 동경 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고등학교 시절, 1학년인지 2학년 때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이문동에 사는 친구 집을 찾아 가면서 골목골목 잘 포장된 동네를 걸어가고 있는데 어느 집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연주에 마음을 빼앗긴 일이 있었다. 클래식이라는 단어도 몰랐고 피아노에서 나오는 소리는 큰 소음을 내며 하늘을 지나는 헬리콥터 소리보다도, 길거리에서 시주를 위해 두드리는 목탁소리 보다도 더 상관없게 들리던 음악의 무지랭이인 내가 피아노 소리에 처마 밑에서 걸음을 멈추고 듣고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정말 그랬다. 무슨 곡인지는 관심도 없고 저렇게 아름다운 연주를 하는 사람은 분명히 피부가 하얗고 생머리를 단정히 뒤로 묶은 맑은 눈을 가진 서울소녀일 것이라는 상상과 함께 한 참을 서서 들었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음악에 홀린 사건이다. 클래식이나 피아노 음악은 더 이상 진전이 없었고 고등학교 내내 “술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춰바도~”하는 송창식의 고래사냥이나 “삐빠빠 룰라” 어쩌구 저쩌구 하는 팝송 내지는 기타를 치며, “너의 침묵에 매마른 나의 입술~”하는 등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나의 음악 발전이었다.
대학 1학년, 영어와 함께 불어가 필수 과목이었다. 불어라고는 중학교 시절 여자 동창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있는 언어가 프랑스어”라고 들은 것 이외에는 이전에 한 번도 들어 본 기억이 없었던 것 같은 언어 불어가 필수과목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불어의 첫 수업, 강의실에 들어서니 다른 과목과는 다르게 20개 정도의 의자만 있는 작은 방의 오디오 앰프에서 “Je 어쩌구, Vous 저쩌구..”하는 소리만 나오다 피아노 소리가 나온다. 그리고 알아 들을 수 있는 소리가 “베토벤 소나타”라는 단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녀가 불어로 대화를 하는데 "너는 무엇을 좋아 하냐?“는 남자의 물음에 여자가 “나는 베토벤 소나타를 좋아한다.”라며 나오는 음악이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였다. 이 음악이 내가 생애 처음 알게 된 피아노 음악의 제목이다. 그리곤 다시 클래식에 대한 발전 없이 “나 어떻게 너 갑자기 떠나가면...”하는 등의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에 등장하는 노래들을 술에 취해 부르면서 세상에 물들어 가는 것이 발전이었다고나 할까?
대학을 졸업한지 30여년이 지난 오늘 운동을 하면서 노랗고 하얀 국화꽃의 미니어쳐 같은 들꽃이 군락을 이룬 지역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거인 로봇같이 자리한 큰 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고등학교 시절에 피아노 선율을 처음으로 음악으로 들었던 것처럼 누군가 직접 연주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능이 좋은 듯 한 스피커를 통해 집밖으로 들리는 음악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맑고 밝은 푸르른 하늘, 그리고 넓은 하늘을 수영하듯 서서히 흐르는 하얀 구름, 군락을 이룬 들꽃과 나, 모두가 음악을 들으려 귀를 쫑긋이 세우고 음미하는 자세가 된다. Love Story의 테마 음악인 "Where do I begin"의 피아노 연주다.
어느 때부터 인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 음악에 대해 문외한이 클래식을 들으며 마음을 안정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음악에 빠져 춤을 추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는 미친 듯이 웃어대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듣는 대부분 음악의 제목도 모르고 작곡가나 연주자도 모른다. 음악의 본래의미나 배경을 모르면서 자꾸 듣다보니 어떤 음악은 시작을 하면 눈을 감고 내가 연주 하듯 아님 내가 지휘하듯 심취해 듣기도 한다.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음악에 숨 쉬는 것을 멈추기도 하고 애절한 부분에서는 뭔가를 조용히 내려놓든 한숨으로 응답하기도 하고 큰 광장의 분수대처럼 웅장하게 뿜어내는 순간에는 내 가슴속에 움켜지고 있던 한을 함께 토해 내기도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먼저 클래식을 틀기도 하고 잠자리에 들 때 잔잔한 음악을 일정시간 작동하도록 세팅하고 잠을 들기도 하고 잠자는 중간에 깨어나 허전함이나 외로움이 엄습하면 음악을 틀어 혼자가 아님을 달래 보려는 노력도 한다.
오늘 그렇게 만난 음악에 국화의 미니어쳐 같은 들꽃과 바람, 푸르른 하늘, 해와 구름이 함께 연주회를 즐기듯 감상 하였다. 피아노 선율에 따라 몸을 좌우로 움직이기도 하고 코를 벌름 거리기도 하면서 한 참을 들었다. 귀가 정화 되었고 마음이 정화 되었다.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시각이 가까워지는 이 시각 글을 쓰면서 쇼팽의 야상곡을 듣는다. 낮에 들었던 음악을 상상하고 또 고등학교 시절 들었던 피아노 음악이나 대학 1학년 첫 불어 수업에서 들었던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마음으로 들으며 귀로는 쇼팽을 듣는다. 나 참 용 되었다.
June 3,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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