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소설이다-기욤 뮈소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궁금한 것에 깊이 있게 생각을 했다. 그 첫 번째는 <현실과 픽션>에 관한 것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이 현실인가, 아님 픽션인가에 대해 혼란스럽다며 생각에 빠지는 때가 있었다. 너무 좋은 일이 있을 때 '이게 꿈은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드는 데 영화나 소설에서 처럼 정말로 나를 꼬집어 보고 아프면 '아! 현실이구나.'했는데 때로는 꿈에서도 꼬집어 보고 아픔 때문에 화들짝 놀라 깼을 때 '꿈이 아니고 현실인가?'라는 의문이 들 때도 있으니 쉽지는 않다. 반대로 너무 나쁜 일이 있을 때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하는 데 대부분은 현실이었는데 때로는 그게 정말로 꿈일 때 깨서는 '다행이다.'라고 하면서도 '현실 일지도 모른 다는 불안감을 가질 때도 있었다.
본문의 내용 중 이런 글이 있다.
현실 세계와 픽션 세계라?
나는 평생토록 현실과 픽션의 경계가 대단히 모허하다고 생각해 왔다. 픽션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건 없으니까? 인간이 현실 속에서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픽션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마치 실존하는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결과적으로 실존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본문 중에서-
또한 <보르헤스>의 말이라며 이런 부분도 있다
어느 누구도 세상이 상상에 불과한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고, 꿈과 현실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본문 중에서-
어쩌면 양자역학에서 초기처럼 빛이 입자인지 파장인지 논란이 많았지만 결국 입자이기도 하고 파장이기도 하다는 결론(지금으로서 결론)에 도달했는데 지금의 삶이 현실이면서도 픽션일지도 모르는 것 아닐까? 신 또는 우리가 모르는 제3의 세계사람 입장에서 봐야 현실인지 픽션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또 어쩌면 지금의 삶이 이미 살아온 것에 대한 재생일지, 아님 살아 갈 미래의 영상 일 가능성은 0 인가?
허튼 생각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소설을 읽는 중에, 읽고 나서도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어 좋았다.
두 번째는 본문에서도 나오는 <문학적 분신>이다. 소설 속에서의 소설을 의미하는 건데 소설을 쓰는 사람, 즉 작가가 소설 속에 등장하고 등장한 사람이 또 소설을 쓰거나 또 다른 나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옮긴이의 말 '인생이 소설이면 우리는 모두 소설인가?'의 글에서 '학창 시절 배운 격자소설이니 '심연 체계'니 하는 이 기법은 회화, 사진, 영화 등의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자주 이용된다.'라며 앙드레 지드의 소설 <사전꾼들>에서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담는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이 책 '인생은 소설이다.'에서 기욤 뮈소는 작가, 소설, 소설 속의 작가, 그리고 출판자를 뒤섞어 현실과 픽션까지 다층 구조를 그려 냈는데 나는 읽으면서 이게 진짜 소설인지 내 픽션 중에 있는 건지 정신 줄을 놓아 어디에 있는지 몰라 읽기를 중단하고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한 부분도 있었다. 살짝 어지러우면서도 심연의 호흡을 하며 가다듬을 수 있는 여백을 즐기기도 했다.
소설을 쓴다는 거, 쉬운 일이 아니지만 어쩌면 이 책의 저자 기욤 뮈소가, 적어도 소설 속의 작가가 글을 쓰면서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만들고 사라지게 하는 지에 대한 부분이 있어 인용한다.
나는 내 자신을 신이라 믿었다. 소설가로 제법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사람들을 대할 때 늘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글쓰기에 착수하는 순간 거침없이 내 멋대로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나는 항상 내 상상력이 만들어낸 등장인물들을 무대에 세우고, 현실에 저항하게 만들었다. 내 소설은 현실을 향해 엿을 먹이는 저항 정신, 상상력을 초고조로 발휘해 부조리한 현실 세계를 내가 바라는 세상으로 채색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글쓰기는 기존 질서를 흔들고 새로운 가치를 제시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행위이니까, 세상의 불공정, 부조리, 부정을 제거하는 행위,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행위이니까. -본문 중에서-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작가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작가의 의도대로 좋고 나쁨, 현명하고 그렇지 못함 등이 표현되니 본인이 신이나 절대자처럼 할 수 있다는 내용인데 한번쯤은 시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본문에 또 이런 내용도 있다.
스티븐킹은 소설 쓰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 깊숙이 깃들어있는 어두운 감정들을 표현으로 끄집어낼 수 있게 되었죠. 백지 위에 분노, 증오, 좌절 따위의 감정들을 모두 쏟아낸 거예요. 스티븐 킹에게 소설 쓰기는 일종의 심리치료이자 어두운 그림자를 쫓아버리는 퇴마의식이기도 했어요. -본문 중에서-
노래방에서 토해 내듯 노래를 부르면 개운해지는 것과 비슷하게 글에다 마음을 쏟아내면 개운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였다.
소설은 물론 예술에 대한 평이나 의견을 듣고 읽고 할 때 '정말 작가도 같은 의미나 생각이었을까?', '나는 조금 다른 데 내가 틀렸나?'하는 의구심이 드는 경우가 있다. 예전에 내가 작품이라고 찍었던 사진에 그것을 본 어떤 사람이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평을 할 때 '저건 아닌데'라는 실망감을 가진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비슷한 내용에 대한 작가의 설명에 큰 깨달음이 있어 소개를 한다.
많은 독자들이 [미로 속의 소녀]를 읽었고, 대단한 수작이라는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소설을 읽고 나서 나의 창작 의도와 일치하는 견해를 피력하는 독자들도 있었고, 일부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나는 이미 출판되어 세상에 나온 소설은 내 작품이기도 하지만 독자의 몫이기도 하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본문 중에서-
어떤 사람이 글이나 예술을 보고 나와 다른 평가를 하든 혹은 나도 잘 모르는 어려운 평가를 하던 그것에 대해 내가 평가나 판단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생각 하게한 문장이다. 나와는 다르구나, 내가 모르는 것을 알려 주면 그렇구나, 너무 어려워 이해 못하면 어렵구나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노력해야 겠다는 다짐을 했다.
'저속노화'의 한 가지 방법으로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쓰라고 한다. 책을 읽지 않는 이유가 많지만 글을 쓰지 않는 이유도 많다. 그 중 '글재주가 없어서.', 혹은 '글을 써 놓고 보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는 이유를 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도 한 때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소년(소녀)였는 데.’라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용기를 내지 못하는 데 이 책에서 용기를 주는 글이 있어 소개하는 것으로 책의 후기를 마친다.
문학과 예술의 본질은 일단 시도해보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결과물을 내야 하는 건 아니죠. 시도한 흔적을 모두 남겨두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본문 중에서-
November 2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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