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6월 10일,
내가 오늘 시작한 책이 태어난 날로
오늘이 2011년 12월 25일 이니까
25년 하고도 6개월이 넘었다.
1983년에 첫 출판하여 23판으로 명시되어 있는 이 책은
그동안 어떤 경로를 통해 미국으로 왔는지 모르지만
내 손에 들어와 내 새끼로 시작한지 2년 정도 되었다.
그렇지만 누군가 한 번도 읽지 않았는지
커버를 벗겨내고 본 책장이 너무도 가지런히 눌려져 있고
실로 만든 책갈피는
한 여름 길거리에 외출하였다가
수많은 차들이 지나가 임의로 구부러져 납자콩이 되어있는 지렁이처럼
책 중간에 가지런이 화석이 되어 첫 손길을 기다린다.
제3세대 한국문학 18권, 김주영
80년대 초입에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작가로 부상한 김주영은
최근 방대한 분량과 스케일의 <객주>를 연재 중...
이라며 소개한 사람은 <홍어>의 작가이기도 하다.
딱딱한 표지를 넘기자
흡사 7080년대 유행하던 꾳 무늬 벽지 같은 종이로
표지의 안쪽과 책의 첫 장 사이에 발라 제본을 마무리 하였다.
조금씩 다른 손톱만한 크기의 수많은 그림을 자세히 보니
여러 형태의 학 그림이다.
80년대 풍의 촌스러운 작가의 컬러사진과 소개 몇 장을 넘기고
누렇게 변한 조금은 고급스러운 갱지로 차례의 장을 넘기는데
확 풍겨오는 약간은 눅눅한 종이 냄새에 이어
온 몸 짜릿한 전율로 이어지면서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2011년의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보내고 있다.
책을 끼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 보니
오래전부터 이런 삶을 살았다는
즉, 외출이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느끼며
신선의 삶을 사는 듯한 행복을 만끽한다.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우중충한 날씨이지만
내리는 빗소리 그리고 지붕의 물받이에 모여
홈통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가 요한 파헤벨의 캐논변주곡 같이 들리며
책과 함께 하는 널부러진 삶에 운치를 더한다.
다른 생활은 한 번도 안 해본 것처럼
그리고 다른 생활은 한 번도 안 해볼 것처럼
나는 이렇게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다.
책장 넘기는 짜릿한 소리를 들으며......
Dec 25, 2011
'그리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개 짙은 아침에... (0) | 2012.01.11 |
---|---|
한 해를 마무리하며... (0) | 2011.12.30 |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0) | 2011.11.29 |
걱정하던 대로였다 (0) | 2011.11.02 |
꿈이었으면 좋겠다 (0) | 2011.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