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생활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운동 후 아침식사를 하고나면 골프를 합니다. 걸어서 골프를 했으면 오후에 수영으로 마무리 운동을 하고 카트를 타고 골프를 했으면 트래드 밀에서 4마일정도 걸어서 운동량을 맞춥니다. 그리곤 예전에는 책을 좋아해서 책을 읽었는데 나이가 들이 눈이 나빠 대신에 다운 받은 영화 한 편을 보고 컴퓨터와 52인치 TV를 연결시켜 바둑 기보를 봅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면 정말 하루가 빨리 갑니다. 그렇게 즐겁게 생활하고 있는데 너무도 틀에 박힌 생활 때문에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게 좋은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지난 주말에 들은 현업에서 은퇴를 한 60대 후반에 가까운 노년의 삶을 살고 계신 한 분의 하루 생활이야기다. 골프와 바둑, 동서양에서 최고의 신선놀음으로 은퇴를 즐기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노년을 살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가끔 회의를 느낀다고 하니 의아해 하면서도 그런 노년을 꿈꾸는 나에게 “무엇이 아쉬울까?“하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그렸던 대로 노년을 즐기고 있지만 세상과 이별해야 하는 시간이 점점 다가올수록 뭔가 이별의 준비에 대한 아쉬움이 아닐까?
수의
동양인 특히 한국 사람들은 윤년에 나이든 분의 죽음을 대비해 수의를 준비하는 것이 좋은 관습으로 인식되어 있다.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여러 해 전 윤달이 있는 해에 할머니의 수의를 준비하여 장롱과 천장사이에 보자기로 곱게 싸서 방문에 들어서면 보일 듯 말듯하게 보관하였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는 기분이 좋다고 했지만 장손이 나로서는 “세상과 이별하는 마지막 옷을 보고 정말 좋을까?”하는 의구심을 가져 가능한 잘 안 보이게 뒤쪽으로 조금씩 밀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십 수년이 흘러 정작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수위를 입은 모습은 보지 못하고 이별하고 말았다.
유언장
3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일어나서 서둘렀던 것이 유언장 작성이었다. 미국인들은 젊었을 때 유언장을 작성하는 관습이 있는데 그것은 갑자기 무슨 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유언장이 없으면 국세청(국가)이 재산을 압류하고 재산분할 판결 후 세금을 먼저 제외하고 해당 가족에게 주는 관행이 있어 그것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들었을 때 “맞아 내가 어렵게 만든 재산을 남아 있는 내 가족이 손대기도 전에 세금으로 왕찬 뜯기는 것은 막아야 해”하며 유언장을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죽음을 너무 성급하게 준비하는 것 같은 유쾌하지 않은 것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 뇌졸중이라는 그야말로 무슨 일을 당하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서둘게 되었다.
변호사를 통해 여러 번의 조정과 수정을 거쳐 두툼한 유언장(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한 권의 책 분량)을 받아 들었을 때 꺼림직 한 기분이 들어 펼쳐 보지도 않고 눈이 보이지 않는 안전한 곳에 보관 하다 할 수 없이 대하게 될 때 펼쳐보며 익숙해져 나도 이런 준비를 했구나 하는 안도의 마음이 될 정도는 되었다.
아버지
내 아버지는 그야말로 황급히 세상과 이별하였다. 사고사도 아니고 죽을 병이 걸렸던 것도 아닌데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뜨셨다. 멀쩡히 잘 사시다가 배가 아파 자주 찾아오는 신장결석으로 자신이 판단하여 손쓰는 것을 늦추다가 장폐색으로 수술을 시도하였지만 열어보고 늦었다는 판단에 닫지도 못하고 이렇다할 유언한 마디 못하고 세상과 이별하였다. 그 기간이 불과 4일,
장폐색은 신장결석에 비해 고통이 훨씬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본인이 신장결석이라는 진단으로 며칠 늦춘 것이 급작스러운 이별을 하였을까? 병원비를 부담해야 하는 아들에게 덜 미안하겠다고 그것이 돈을 아끼는 것이고 늘 그랬듯이 자신의 진단이 옳을 것이라는 판단을 해서 그랬을 것이고 나로서는 통증으로 괴로워 하실 때 강권을 하지 못한 것이 가슴의 응어리로 남아 내내 아쉬움을 더 한다. 그렇게 아버지는 세상과 충분한 이별의 시간적 여유도 없이 떠나 버리셨다.
장인
정기 건강진단을 위해 병원을 방문하였다가 이상이 있으니 입원하라고 하였고 며칠 뒤 퇴원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안심하였다. 그러나 며칠 뒤 가망이 없다는 진단으로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하며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받아 그래도 희망을 가져보고자 집 가까운 다른 병원으로 옮겼지만 급격히 나빠져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소식을 듣고 한국을 방문하여 장인을 보았을 때 내 느낌으로는 눈동자가 맑아지면서 뭔가를 이야기 하는 듯 하였지만 소통할 수가 없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면서 나 혼자 중얼 거리듯 많은 말을 하였지만 말로 표현은 하지 못하고 초롱하게 눈동자만 굴리다 눈가로 눈물이 주룩 흐르는 모습을 보며 얘기하고픈 것이 많은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였다.
뇌경색으로 팔다리는 제대로 쓰지 못하는데 그나마 가끔 하는 행동이 오른 손으로 허공에 뭔가를 쓰는 것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해 할 수가 없었지만 아직은 살아 있고 어쩌면 더 좋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도 하였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서로의 소통 방법은 뭔가 물으면 눈을 깜박이거나 눈동자를 돌리는 것뿐, 장인이 먼저 뭔가 의사표현을 하거나 요청하는 것은 알 수가 없었다. 서로가 말로 소통할 수 있을 때 더 많은 대화를 하지 못한 아쉬움이 마음 한 켠을 차지하고 이따금 그 아쉬움이 튀어나와 마음을 쓰라리게 한다. 그렇게 충분한 소통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별을 하였다.
별사(別辭) : 이별(離別)의 인사나 말
오정희의 가장 대표 소설이다. 낚시를 떠나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고통스러워하는 40대 중년 여인 정옥이 아이를 데리고 친정집에 와서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집에 두고 어머니와 함께 부모님이 묻힐 공동묘원을 찾아 갔다가 다시 빈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그린 소설이다.
한국에서 공원묘원이 한 참 개발되어 유행이던 때에 죽어서도 가능한 멀리 보고 싶은 의도에서 공원묘원의 높은 곳에 부부 합장묘지터를 마련한 어머니가 딸과 외손자를 데리고 가는 여정에 버스의 종점에 내려서도 1시간을 넘게 걸어하며 개발이 덜 되어 차가 지나가면 먼지를 뒤집어 써야 하는 더운 여름의 고행 길, 폭우로 여기저기 부서지고 무너져 처음의 계약과는 다른 어설픈 관리에 대한 실망, 묘지 터를 알리는 조그만 말뚝의 번호를 찾아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으며 묘지사이를 헤매는 상황, 그 고행 길에 이유도 모르고 같이 가며 더위와 먼지에 칭얼대는 아들을 업어야 하는 상황, 어느 것 하나도 정옥을 행복하거나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묘지 터에 앉아 싸온 과일을 먹으며 멀지 않은 다른 터에서 벌어지는 매장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땅에 묻히는 과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꼼꼼히 보는 어머니, 철없이 묘지 사이를 뛰어다니느라 정신없는 아들, 그런 모든 광경을 바라보는 정옥 등 3대의 모습에서 우리네 삶의 과정을 한 눈에 보는 듯하다.
“오늘 내려가겠니?”
“그래야겠어요.”
며칠 묶어 갈 작정이었지만 정옥은 불쑥 대답했다. 어머니의 말투에서 정옥이 돌아가기를 바라는 암시를 느꼈던 것이다. 막상 대답을 하고 보니 갑자기 P시의 빈 집에서 뭔가 긴한 일이 기다리고 있는 듯, 고작 하루를 떠나 있었을 뿐인데도 굉장히 오랫동안 비워 두었던 듯 갈 길이 바쁘게 생각되었다. P시까지는 버스로 세 시간의 거리였다.
급한 마음에 왔던 반대 쪽 고개에 길이 다른 차편이 있을 것 같아 방금 사람들이 떠난, 갓 생긴 무덤 앞을 지나니 산자락 끝에 갑자기 절이 나타난다. 하늘이 검어지면서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할 요량으로 처마 밑의 툇마루에 들어서며 비를 그을 장소를 빌기 위한 속셈으로 늙은이 특유의 음흉하고 교활한 웃음을 띠며 어머니는 “재가 들었나부죠?”하며 몸을 들이 미는 과정의 묘사로 소설은 마무리 되어간다.
우리는 엄격히 따지면 매순간 마다 이별을 해야 한다. 단지 그것이 이별이라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거나 개념 없이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매순간 애절하게 이별을 하다보면 이별의 순간과도 이별해야 하는 것은 뫼비우스 띠 같은 평행하거나 무한 반복되는 답답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하기에 아니면 다음에 오는 어떠한 것으로 인하여 잊혀 지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지도 모른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하루를 설계하고 일주일을 시작하는 날의 아침에 일주일을 설계하고 달력을 넘기며 한 달을 설계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며 1년을 설계하지만 그 매 때마다 지난 시간에 대한 참회와 반성을 하며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을 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에서 행복을 찾는다고 하지 슬픔을 찾는다고 하지는 않는다. 슬픔을 탈출한다고 이야기 하지 행복을 탈출한다고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계획을 세우고 기도를 하는 것은 슬픔을 맞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이다.
대게의 경우 죽음을 기쁨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죽음을 대비해서 수의를 준비하고 유언장을 만들고 묘지 터를 준비하는 것은 슬픔을 맞이하는 것일까 아니면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일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본인에게는 안정을 주는 것 일 수도 있겠지만 남은 가족들에게도 같은 것 일까? 이건 모순이다. 그렇지만 받아들여야 하며 기회가 될 때 남는 가족들과 이별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작가 오정희는 주장하는 것은 아닐까?
가족들에게 불편한 부탁을 한다. 내가 죽어 마음이 아쉬움이 많고 슬픔이 있다 할 지라도 더 나쁘지 않음에 감사의 기도를 하고 그게 모순이라 할지라도 나는 느끼지 못할 것이기에 참아 내 주기를 바란다. 내가 늘 주장하는 죽는 순간까지 누구의 수발을 들지 않고 편안하게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식물인간이 되면 생명 연장을 위해서 의학의 힘을 빌리지 말 것이며 죽으면 화장을 하고, 화장 후 뼈는 일정한 장소에 보관하지 말고 그냥 세상에 뿌려 주기를 바란다.
Jan 2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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