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로마인 이야기 3권 <승자의 혼미> - 시오노 나나미

송삿갓 2017. 10. 31. 00:14

로마인 이야기 3<승자의 혼미> - 시오노 나나미

 

3권의 겉표지에 이런 글이 있다.

성공한 자에게는 성공했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대가가 따라다니는 법이다.

로마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라쿠스 형제 시대로부터 시작된 로마의 혼미는

그들의 사치나 퇴폐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이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

이것이 그들 입가에 머물던 우수의 정체며 고뇌였다.“

 

1, 2, 3차의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주축이 되어

이탈리아반도와 시칠리아, 그리고 카르타고를 비롯한 북아프리카로

로마의 확장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로마가 외향적 일로 시민을 비롯한 로마연합의 결속의 시기이기도 했다.

 

어느 나라든 안정기에 접어들면 내분을 겪기 마련인데 로마 또한 예외가 아니었으며

그 이야기를 풀어 놓은 부분이 2권 승자의 혼미다.

 

한니발로 인한 비상시국을 넘긴 로마는 안정기에 접어들며 내실을 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시작한 로마인은 티베리우스 크라쿠스로 기원전 로마의 가장 뛰어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외손자이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정책을 제대로 펴 보지도 못하고 반대파인 보수파들에게

철봉으로 내리쳐 죽임을 당하고 동생 가우시스가 뒤를 잇지만

그 역시 폭동으로 인해 도망치다 자신의 노예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리우스,

그는 크라쿠스 형제처럼 로마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귀족도 아니었다.

로마에서 남성의 경우 로마 시민은 보통 세 개의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개인이름, 일족 이름, 가문이름 등인데

예로 티베리우스는 개인이름이고 셈프로니우스는 일족이름,

크라쿠스는 가문이름으로 즉 성()이라고 한다.

영어로 줄리어스 시저가 되는 인물의 라틴어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인데,

어머니가 그를 부를 때 가이우스야, 밥 먹어라.”고 한다는 데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비롯한 몇몇 시민이 두 개의 이름밖에 갖지 않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평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크라쿠스 이후에 마리우스가 등장하는데 이 때가 로마에 실업률이 높고

군대를 가야하는 시민이 턱없지 부족해 자산이 적은 시민까지 확대 된

그러니까 빈부의 격차가 심해진 이 때 최초의 징병제를 실시한 지도자가 마라우스다.

또한 당시까지의 군대 편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과감한 전법을 가능케 하였다.

 

마리우스는 로마의 공화정, 2명의 집정관 시대에 7번이나 그 자리를 지낸 지도자로

혼미의 시대에 나름 정책을 잘 세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원한 때문에 무차별 살생을 저지른 포악한 지도자로 생을 마감한다.

 

마리우스의 뒤를 이은 술라,

술라는 독선과 욕심으로 인해 동지중해 전쟁 중에 반역자로 몰려 직위를 박탈당하지만

권모와 술수로 소아시아 지역을 평정하고 로마로 돌아온다.

하지만 자신을 반역으로 몰아붙인 원로원과 귀족 등의 반대파 소탕을 위한 살인을 한다.

술라의 살생부에는 80명 가까운 원로원 의원과 1600변의 기사(경제인)을 포함하여

4700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고 한다.

이들을 재판도 없이 살해하고 재산을 몰수 하는 것은 물론 자손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공직에서 추방하는 일까지 하지만 마리우스의 가족 중 단 한 사람,

측근의 부탁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훗날 로마의 가장 유명한 마리우스의 처조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술라는 살생부 처리 이후에 죽을 때까지 장기 집권을 위한 내부 정리를 하고자

300명이던 원로원의 인원을 600명으로 늘렸지만 무력화 시켰고

집정관이 될 수 있는 조건과 나이를 변경하기까지 하였다.

 

술라에 이어 등장하는 지도자가 로마의 영토를 동지중해를 넘어 소아시아까지 확장한

폼페이우스.

그 또한 술라가 마리우스의 체제를 붕괴시킨 것처럼 술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

폼페이우스의 가장 큰 성과는 술라도 해결하지 못한

알렉산더 대왕의 후손 중 하나인 포토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 6세를 자결도록하고

그의 왕국을 영원히 지우게 한 일이다.

미트라데스는 50여 년 동안 소아시아에서 로마를 넘본 골치 아픈 존재였지만

폼페이우스가 군대를 동원한 압력으로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폰토스는 물론 예루살렘이나 그 보다 동쪽 아르메니아까지 로마의 동맹으로 만든 인물이다.

그렇게 오리엔트를 평정했을 당시가 기원전 63, 폼페이우스는 43세의 장년이었다.

 

저자는 3권을 이렇게 끝을 맺었다.

폼페이우스가 갖고 있었던 것은 장년의 체력만이 아니다.

그는 뭐든지 다 갖추고 있었다.

정치력도, 군사력도, 대중의 지지도 갖추고 있었다.

당시 로마인들 가운데 아프로 부르크하르트라 말한 의미에서의

하나의 인물’, ‘위대한 개인이 될 가능성을 폼페이우스만큼 갖추고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아니, 적어도 다 갖추고 있은 것처럼 보인 인물은 폼페이우스밖에 없었다.

그러나 로마는 아직도 한니발이 예언한 내장질환을 극복하고,

그것을 성장한 육체에 어울리는 것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혼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로마 역사상 위대한 개인위대한 폼페이우스(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으로 맺음을 하였다.

 

어느 나라든 위기 속에서는 뭉치고 권력다툼이 거의 없지만

안정기에 접어들고 평화로워지면 한 곳으로 모였던 시선과 힘이 분산되고

빈부와 권력의 차이가 심해지고 그로인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

혹은 내부에서 투쟁이나 다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많이 가진 자가 더 갖기 위해 독재를 하며 살상을 하고

못 가진 자들이 연합하여 반기를 들고 투쟁하는 것도 예삿일인데

기원전 1~2세기의 로마가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개혁하려는 시도와 맞서는 세력

외부와의 전쟁을 위해 권력자가 자리를 비운 틈에 내부의 연합으로 반기를 들며

도륙하는 시기를 <승자의 혼미>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풀었다.

로마가 탄생하여 안정기에 접어들 시기까지 왕정에서 공화정의 시기를 보냈고

민의에 의한 정치가 안정기에는 혼란을 거듭한다는 과정을 말한다.

이제 어떻게 공화정이 제정시대로 이어지려는지 기대가 된다.

 

October 25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