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로마인 이야기 4권 <율리우스 카이사르(상)> - 시오노 나나미

송삿갓 2017. 11. 15. 05:48

로마인 이야기 4<율리우스 카이사르()> -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전체 15권 중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가장 두꺼운 2권으로 되어 있어

적어도 전체의 15%는 차지 할 것으로 생각 될 만큼 많은 이야기와 중요성이 있다는 뜻이다.

이탈리아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다음 다섯 가지다.

지성, 설득력, 지구력, 자제력, 지속적인 의지.

카이사르만이 이 모든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고 되어 있단다.

영어로 시저스로 발음되는 카이사르는 한니발의 국가 카르타고 언어로

코끼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데,

이는 로마가 한니발을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었던 때

율리우스 씨족에 속하는 한 인물이 카르타고를 무찔러,

그 공로로 카이사르라는 별칭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인해 가문이름이 코끼리라는 뜻의 카이사르로 바뀌었다고 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명문 가족이기는 하지만

현재 이탈리아 고교 교과서에 지도자의 모든 자질을 갖춘 지도자로 표현 될 수 있는 근원은

명문가 어머니의 보살핌과 가르침 때문으로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 집정관 다음의

중요한 공직이 해마다 민회에서 6명씩 선출 되는 법무관인데

그의 아버지가 법무관 이었지만 아마도 빨리 세상을 떠났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당시에 남편이 일찍 죽거나 헤어지면 재혼을 하는 풍습이 일반적이었지만

집정관을 지낸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누이동생인 카이사르의 어머니는

혼자서 아들을 키우고 교육시키며 평생을 살았다고 하니

어머니로부터 지도자로서 충분한 기본교육은 받은 셈이다.

 

그렇게 어머니의 각별한 보살핌과 교육을 받은 카이사르는 2·3십대에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여자 친구가 많고 끝없는 난봉꾼임에도 모든 여자들에게 배신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삼두정치로 함께 로마를 움직였던 당시의 맹장 폼페이우스 아내 등

웬만한 상류층 부인들의 정부라 할 정도로 바람기가 많았다.

두 번째는 돈을 펑펑거리며 쓰는 습관 때문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빚이 많았는데

오히려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 돈을 더 빌려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당당했다는 것이다.

 

술라의 보복으로 죽음에 직면했던 카이사르는 어리다는 이유로 죽임을 면하고

아시아와 그리스로 피신해 낭만을 즐기고 유학도 하면서 십대 후반과 이십대 전반을 보낸다.

술라가 죽은 후에야 로마로 돌아와 살면서 기원전 62년인 37세에 법무관에 선출된다.

 

역모를 시도한 카틸리나 일당 중 로마를 떠난 카릴리나와 카시우스를 제외한

다섯 명을 체포해서는 로마 시민이라 할지라도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 원로원 최종 권고를 부여 받고 당시 법의 인간으로 불리는

가장 유명한 변호사인 키케로가 원로원 최종 권고에 따라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게다가 항소권도 인정하지 않고 로마 시민을 처형하는 행위의 합법성에

일말의 불안을 느꼈는지 원로원들에게 토의를 요구했을 때 법무관으로 선출 된

카이사르의 처녀작이라 할 수 있는 카이사르의 발언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한다.

원로원 의원 여러분, 여러분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말이지만,

의심스러운 일에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증오나 우정, 분노, 자비 같은 감정은 일단

잊어버리는 것이 정당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중 략~

여러분은 역사를 상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많은 군주와 많은 민족이 분노나 자비에 사로잡힌

나머지 멸망했습니다. 그보다도 내가 기쁨과 긍지를 가지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조상들이 한 일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한가, 아닌가에 따라 매사를 결정했습니다.

~중 략~

모든 인간이 언행의 자유를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 밑바닥에 살고 있는 천민이라면 분노에 사로잡혀 행동하는 것도 용납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 상층부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행동의 자유는 제한됩니다.

지나치게 친절해도 안 되고 지나치게 미워해도 안 되며,

무엇보다도 증오에 눈이 멀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중 략~

형벌에 관한 내 생각을 말씀드리면, 눈물과 불행 속에서 당하는 죽음은 형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구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어야 할 운명을 가진

자가 맛보는 온갖 비참함을 경험하지만, 일단 죽어버리면 기쁨도 없는 대신

고통도 사라지니까요.

~이하 생략~“

 

이는 카이사르의 나이 18세에 술라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주변에서 아직 어리니 살려주자는 조언에 따라 술라는 그에게 권하였다.

너의 아내와 이혼하여라. 그러면 살려주겠다.”

이랬던 이유는 카이사르의 아내가 술라 정적의 집안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절하고 로마를 떠나 해외 망명생활과 유학을 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경험으로 인하여 그는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선뜻 동의하지 않고

어떻게든 공정해야 한다는 지도자 삶의 기반을 원로원 처녀작 발언에서 볼 수 있다.

 

카이사르는 흔히 말하는 대기만성의 인물이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나 위대한 폼페이우스 등 내 노라 하는 인물들이

10대 늦어도 20대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이름을 떨친 반면

카이사르는 30대 중후반에서야 공직에 오르고 30대말, 40대에 들어서야

명함을 내밀 정도의 자리를 차지한 대기만성형 지도자다.

기원전 5940대에 접어든 카이사르는 드디어 로마 공화정에서 최고의 자리인

2명 중 한 명의 집정관이 되어 충분히 이름을 알리는 지도자의 길을 시작하고

집정관을 마친 이듬해에 현재의 프랑스인 갈리아 총독을 부임하여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 8년 동안 갈리아 전쟁을 하면서

로마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서 확고히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리고 그 8년의 전쟁 중 7년 기간 동안 <갈리아 전쟁기>를 직접 쓴다.

이 갈리아 전쟁기는 오늘날에도 계속 출간 될 정도로 화려하고 세심한 글로 평가된다.

카이사르 당시 원로원이었던 키게르는 51년에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이 책은 모두 알몸이고 순수하며, 인간이 몸에 걸치는 의복과도 비슷한 미사여구를

죄다 벗어던졌을 때 생겨나는 매력으로 충만해 있다.

카이사르는 역사를 쓰려는 자들에게 사료를 제공할 작정으로 썼을지 모르나,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은 군더더기를 덧붙여 화려하게 장식한 역사를 쓰는 바보들뿐이고,

사려 깊고 현명한 이들에게는 역사를 쓸 의욕마저 꺽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중에 지금의 독일인 게르만족을 공격하기 위해 라인강을 건넜고

지금의 영국인 브리타니아를 공격하기 위해 도버해협을 넘은 로마의 첫 지도자이기도 하다.

갈리아 전쟁은 지금의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인 프로빈카 속주에 접해있는

아르베니족의 젊은 지도자 베르킨게토릭스를 섬멸함으로써 대부분의 갈리아를 평정한다.

베르키게토릭스는 갈리아 내의 여러 부족 중 반 로마파를 결집하여 카이사르와 대결하는데

카이사르가 한때는 곤경에 처해 전장에서 철수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갈리아 족을 몰아 알레시아를 포위하여 멸망시키게 되는데

이 때 만든 포위망은 후세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 시대에

고고학 발굴 조사로 방벽의 모양과 위치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 당시 카이사르는 5만의 병력으로 알레시아 안에 베르킨게토릭스가 지휘하는 8,

밖에 다른 갈리아 인 26만 등 합계 34만 명의 갈리아 군을 격파하여 자신의 입지를 굳힌다.

갈리아 전쟁 8년을 마쳤을 때 카이사르의 나이 49

이제 로마를 개혁하기위해 갈리아에서 로마로 발길을 돌려 루비콘 강으로 향하는 것으로

로마이야기 4권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권은 끝을 맺는다.

 

역시 이 책의 겉표지에 버나드 쇼는 이런 글을 썼다는 것으로 마친다.

인간의 약점에 대해서는 그토록 깊이 통찰한 세익스피어였건만,

율리우스 카이사르 같은 인물의 위대함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리어왕>은 걸작이지만 <줄리어스 시저>는 실패작이다.‘

 

November 8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