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로마인 이야기 6권 <팍스 로마나> - 시오노 나나미

송삿갓 2017. 12. 4. 13:51

로마인 이야기 6<팍스 로마나> - 시오노 나나미

 

루비콘을 건너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의 주인공

율리우스 카이사르

 

공화정 시대의 로마사를 쓴 독일 역사가 몸젠이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라고 평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가 암살을 당하기 6개월 전

자신의 제1상속인이자 양자로 삼은 옥타비아누스의 나이가 17세였다.

자신의 대를 이을 사람을 일찍이 알아보고 상속자로 정한 것은 물론

옥타비아누스의 부족한 부분을 알고 같은 나이의 젊은이 아그리파를

곁에서 보좌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은 몸젠이 평했던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라는 것이 틀림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 중 하나다.

 

카이사르의 유언을 받들고 그의 힘을 바탕으로 19세에 집정관이 된 옥타비아누스는

양아버지 카이사르의 좋은 점은 유지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로마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꾸고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초대 황제가 된다.

건강이 좋지 않고 부족한 군사적 능력은 카이사르가 지명한 아그리파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자신은 원로원을 아우르고 구슬리는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여

로마를 안정시켜 팍스 로마나를 만들고 권력을 지켜냈다.

 

저자는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와 목표는 같았지만 수단이 달랐다면서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첫째, 그는 본디 매사에 신중한 성격을 타고났다.

둘째, 살해되기라고 하면 대사업도 중단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카이사르 암살에서 얻었다.

셋째, 연설에서도 저술에서도 자신은 카이사르에 필적할 만한 설득력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고 싶은 현실만 보여주는

방식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자신만은 보고 싶지 않은 현실까지도 직시하도록 명심하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기원전 27113, 원로원을 가득 메운 의원들 앞에서 35세의 절대 권력자는

공화정 체제로의 복귀를 선언한다.

내 한 몸에 집중되어 있는 모든 권력을 여러분 손에 돌려주겠소.

무기와 법률, 로마의 패권 하에 있는 모든 속주를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손에

되돌려 줄 것을 선언하는 바이오.“

율리우스 카리사르를 암살한 범인들이 외친 가장 큰 원인이 공화정이었음을 염두에 두고

선언 한 것이기에 원로원과 로마의 시민들은 환영하였다.

 

그렇게 공화정 복귀가 선언 되고 사흘 후 116,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는 데

저자는 이를 정치 드라마의 연출이라는 표현으로 극찬하였다.

절묘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공화정 복귀 선언과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 부여 사이의 간격을 사흘밖에 뒤지 않았다.

둘째,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하자고 제안한 사람의 선정이다.

셋째, 다른 이름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사흘이라는 기간은 아무도 예상치 않은 공화정 체제로 돌아가겠다는 권력자의 선언을

기뻐하기에 충분한, 하지만 그 참뜻을 탐색하기엔 충분하지 않은 절묘한 기간이라는 뜻이다.

 

이를 제안한 사람은 지방 유력자인 아들에 불과한 폴리오라는 사람을

고위 관직에 취임하여 출셋길에 들어 설 수 있도록 한 사람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카이사르가 루비콘을 건널 때 26세의 나이에 따랐고 루비콘 도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 폴리오로서 당시 로마인들에겐 무인인 동시에 교양인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로마인들은 별명으로 부르기를 좋아하는 민족으로

한니발을 무찌른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있던 아프리카를 재패한 자라는 의미에서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으로 불렸고

카이사르의 정적인 폼페이우스도 위대한이라는 뜻을 담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로 불렸다.

아우구스투스는 무력이나 권력을 연상시키는 의미는 없고 신성하고 경배를 받아 마땅한

인물이나 장소를 말하는 것으로 절대적 권위는 아니라고 한다.

권력과는 결부되지 않는다고 믿어 원로원 의원들은 쉽게 찬성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부여한 명예는

집의 현관 양쪽에 서 있는 기둥을 월계수 가지와 잎으로 장식하고

현관문 위에 시민관을 놓고

절대 권력자가 되었으면서도 공화정 복귀를 선언한 공로를 평가하여

그 사실을 새긴 황금 방패를 원로원 의사당에 안치하는 것이다.

이 같은 것을 어느 연구자는

철저히 합법성을 획득하는 아우구스투스의 탁월한 수완.”으로 평하였다.

 

기원전 27년은 로마인들이 공화정 복귀를 경축한 해였지만

그로부터 반세기쯤 뒤에 살았던 후세인들은 그 해를 제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로 기록하며

옥타비아누스의 정식 명칭이

임페라토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자신의 입지를 굳힌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다른 대표적인 것 두 가지가

게르마니아에 대한 정벌과 핏줄에 대한 집착이다.

야만인으로 불리는 게리마니아에 대해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라인강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만 하였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공략을 명령하여 자신의 아들을 잃은 아픔을 겪기도 한다.

핏줄에 대한 집착은 자신의 사위가 죽자 그 딸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동반자로 지목한

아그리파를 이혼시키고 딸을 주어 사위로 삼는 행위까지 한다.

하지만 말년에 적당한 친족이 없어 핏줄이 아닌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후계로 삼아

2대 황제로 등극하게 하게 된다.

 

그럼에도 현재의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로마로 확대한 아우구스투스는

인구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국세조사나 세제개혁을 단행하고

근위대를 창설하고 상비군을 만들어 언제든 전쟁에 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

모든 동맹국과 속주의 통치를 위해서 지방자치를 강화하고 로마 시민권자 퇴역병을

이주시켜 로마 화 식민도시를 건설하는 팍스로마나를 구축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 티베리우스를 불러들여 단 둘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죽음을 이미 예감한 듯 서기 14년에 들어서자마자,

동시대 사람이나 후세에 알리고 싶은 것만 적은 <업적록>을 마무리했고

후계자인 티베리우스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특권을 부여하여

후계자에게 자리를 물려줄 준비를 끝낸 것은 물론

어떻게 장례를 치를 것인가에 대한 지시도 문서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티베리우스와 이야기한 지 얼마 후,

서기 1481977세의 생일을 한 달 앞 둔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의 품안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죽은 후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부여 받았다.

 

이와 같은 그를 팍스로마나를 만든 정치가였으며,

팍스 로마나는 그를 선택하였다는 글로 표현한다.

 

December 4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