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사는 지금 조선시대에 있었던 반상(班常)을 논한다는 것이 옳은가?
어렸을 때 일 년에 몇 번씩 돌아오는 제사나 명절에 조상께 예를 올리고 난 후
어른들은 모여 앉자 우리의 조상이 어떠했고 누가 무슨 벼슬을 했다며 책장에 있는 족보를 껴내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양반의 자손이었음을 그리고 나는 한 지류의 장남으로
종손의 대를 이어가고 있기에 그에 대한 집안의 기둥으로서 역할을 주입받았다.
조상 중에 영의정을 하신 분도 없고
그렇다고 왕족과 결혼하지도 않아 크게 뛰어나지도 않은데 이럴 정도니
세도를 누리던 집안이나 왕족의 일부가 된 집안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며 자랐다.
황순원은 중학시절 국어 교과서에 거의 끝에 가장 많은 페이지의 “소나기” 저자로
고등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달달 외워서 기억나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예쁘지만 병약한 도시 소녀, 시골에서 자란 소년 그리고 장마철의 비, 징검다리, 원두막
그리고 비련의 여주인공 등으로 기억하고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황순원의 소설 일월(日月)은 1962년에 [현대문학]에 3부로 나누어 연재된 소설이라고 하니 내 나이와 비슷한 반백년이 넘은 소설이며 도축업 그러니까 백정에 관한 소설이다. 백정은 조선시대에 특히 남쪽 지방에서는 무당과 함께 천민 중에서도 최하층에 속하는 계급이었다.
백정에 대한 차별이 어떠했는지 소설에서 이렇게 소개한다. 조선말엽까지의 백정에 대한 차별 대우는 의관 제도에서 남자에게는 망건은 허용되었지만 탕건은 못 썼고, 여자는 여하한 경우에도 비녀를 꼽지 못하였다. 백정은 장례에서 상여를 쓰지 못했고, 혼인 때도 신랑이 말을 색시가 가마를 타지 못하고 남자는 소를 타고 여자는 가마 대신 웃집이 없는 하장에 앉아 시집장가를 들었다. 게다가 보통사람은 성혼하면서 곧 상투를 틀었지만 백정은 아이를 난 후에 틀어야 했다.
물론 50여전 전의 이기는 하지만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근래에 와서 천민을 가려내는 제도상의 벽은 완전히 무너졌지만 관념상의 벽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백정 세계를 파고들면서 절감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인철은 건축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다. 어느 날, 형과 대화중이던 아버지 상진노인이 갑자기 인철을 부르고 인철의 형 인호는 무척 흥분해 있었다. 경기도 광주의 군청 군수인 인호는 국회의원 출마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군내에 예전부터 내려오는 백정마을에 사는 한 백정 노인이 군청에 민원을 접수하러 왔고 그 분이 자신의 큰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철의 아버지 상진노인은 그 백정노인의 동생이었지만 백정의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출신 성분을 감추기 위해 본적을 옮기는 것은 물론 고향인 경기도 광주의 백정마을과는 인연을 끊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인철의 형 인호는 지금과 같은 사회구조에서 천민인 백정의 후예로서는 국회의원 선거는 물 건너갔다며 울분을 토한다.
인철의 아버지가 상진노인이 서울로 와서 오래 정착하며 살던 이웃에 지씨 성을 가진 대학교수가 살고 그 다혜라는 딸이 있다. 지 교수의 딸 다혜는 인철의 누이 같고 쉼터 같은 여자다. 인철네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고나서도 사귀는 여자, 혹은 주변에 일어났던 일 등 거의 모든 일을 보고하듯 하며 고민에 대해 상담을 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동갑인 다혜는 인철의 그런 언행을 모두 받아주면서 “언젠가?”라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여자...
지 교수는 우연히 경기도 광주의 백정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백정마을에 살고 있는 백정을 만나면서 그 백정노인이 나름 크게 성공한 대륙상사의 사장 상진노인의 형이자 인철의 큰 아버지 임을 알게 된다. 자기 딸과 인철의 관계를 아는 지 교수, 백정이 그리 천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연구를 거듭한다. 지씨 성과 교수, 딸 그리고 백정의 후예인 인철...
인철은 해수욕장에 갔다가 은행장의 딸인 나미을 알게 되고 연극을 하는 나미는 연극배우를 꿈꾸는 인철의 동생 인주와 연결고리를 갖는다. 나미는 인철을 자기사람으로 만들려 무엇이든 관계를 이끌어 가려 한다. 자신의 새로운 집의 설계를 인철에게 부탁하고 자연스럽게 은행장인 아버지에게 소개를 하는 또 하나의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인철의 사촌 기룡, 그러니까 경기도 광주에 사는 백정노인의 아들로 현재도 서울의 도축장에서 백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호기심과 사실 확인을 위해 인철은 기룡을 찾아가 접근을 시도하지만 “나에게는 사촌이 없다”는 답으로 접근을 거부한다. 그러나 인철은 혈육으로써의 정 때문인지 자주 찾게 되고 서로의 관계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서울에서 나름 성공한 중견기업 대륙상사의 사장 상진노인의 아들 인철은 백정가문이라는 집안 내력에서 받은 충격, 종교 때문에 가출까지 하는 어머니, 연극배우가 되겠다며 방황하는 듯 위태위태하게 살고 있는 동생, 국회의원 출마를 자신의 내력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며 전전긍긍하는 형, 현재 백정의 큰 아버지와 그 아들 기룡과 혈육으로써의 관계, 나미와 다혜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 거기에 가문으로 인물을 평가하려드는 사회의식 구조와 벽에 부딪쳐 느껴지는 소외감은 청년으로써 감당하기 쉽지 않은 난관을 적절하게 묘사한 소설이 [일월]이다.
인터넷을 뒤지면 이 소설에 대해 이런 소감의 글이 있다.
주인공 ‘인철’은 자의식(自意識) 과잉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자기가 백정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부터 그 병이 싹튼 것이다. 그의 방황은 여기서 시작된다. 물론 그에게는 누이 같은 살가운 이해로서 감싸주는 ‘다혜’가 있고, 깜찍하고 구김 없는 애정으로 접근해 오는 ‘나미’가 있다.
그러나 그녀들의 이해나 애정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는 이제 없게 되었다. 그들과 언제나 관찰자로 머물게 하는 또 하나의 시선. ‘자의식’이 그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버지처럼 자기 위장 속에 숨어버릴 수도 없고. 어머니처럼 종교라는 이름의 행복한 착각 속으로 도피할 수도 없다. 그가 줄곧 ‘기룡’을 찾는 것은, 그를 통해 이제껏 허위의 그늘에 가리워 있었던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함이다. 그것으로 말하자면, 허위나 과장 없이 자기 자신의 숙명과 대결하려는 의지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결말 부분에서 인철은 나미네 집 파티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자기가 이제껏 쓰고 있었던 고깔, 즉 가면을 벗어버린다.
자신의 고독을 투철하게 의식한 새로운 삶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천이두: <한국문학대사전>)
소설의 끝은 잔인할 정도로 처참하다. 인철이 가면을 벗어버리기는 하지만 세상을 떠난 백정인 큰 아버지, 교통사고가 나서 불구가 된 동생, 사업의 실패로 자살한 아버지, 그리고 종교로 인해 죽음을 택한 어머니 그리고 종적을 감춘 형 등으로 인해 철저하게 고립된 혼자가 되어 버린다. 가면을 벗어버렸다고 그가 자유하게 될 수 있을까?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작은아버지를 비롯한 일가친지들에게 강하게 주입되어 있는 장손으로써 살아왔던 내가 다른 사람들을 보고 “저사람 가문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던 내가 소설의 여운이 길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은 호락호락 하지도 않고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관대하지도 않다. 물론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무조건적으로 품어 주는 경우도 많지만 내 자신이 받아들이고 잊어지는 것은 내 자신의 몫이다. 이 소설이 태어나고 반백년이 지난 반상이 절대 있을 수 지금 21세기, 통념을 언제나 떨쳐버릴 수 있을까?
이 소설을 대하며 흑백사진이나 클래식 음악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컬러사진의 경우 때로는 아름다운 색상에 빠져 구도나 조명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흑백은 그럴 확률이 거의 없다. 현대 대중음악은 노랫말에 이끌려 음의 흐름이나 깊이를 느끼지 못하지만 클래식은 내 나름대로의 주제를 선정하고 상상하기 때문에 자유스럽다.
이 소설 “일월”은 그랬다. 흑백사진에서 주는 것 같은 조명과 구도처럼 집중할 수 있었고 클래식 음악에서 주는 것처럼 상상의 나래에 따라 깊이 몰입하였다. 몰입도가 심한 나머지 다른 감정, 생각으로 전환하지 못하고 몇 주를 혼란 속에 있다는 것이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깊이 빠져 있었다. 아마도 내 속에 잠재해 있는 토속적 고정관념과 현실의 삶이 치열한 투쟁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여운의 꼬리가 잘리지 않는다.
Jan 2013
'책을 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격동 30년 (0) | 2013.02.28 |
---|---|
톨스토이 - 인생론 (0) | 2013.02.19 |
하늘이여 땅이여-김진명 (0) | 2013.01.16 |
칼-이외수 (0) | 2013.01.09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조세희 (0) | 2012.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