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책을 읽어도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소화해서 내 지식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톨스토이의 인생론을 읽으면서 한계를 느끼기도 하고
내가 이해 할 수 없는 내용도 있구나 하는 좌절감을 맞보게 하였다.
서문에서부터 “생명”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서술하고
또 반복하는데 질리지 않을 수 없었고
어느 순간에는 내가 책을 읽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드넓은 평원의 도로를 멍 때리면 운전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의 지루함,
그러다 몇 페이지를 지나 정신 차리고 뭐를 읽었지? 하면
머릿속에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고 생가 없이 글씨를 읽은 것 같은 느낌의 반복이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면서 정리를 해보고자 중요한 단어 메모를 하고 있노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단어 비슷한 내용의 반복,
흔희 하는 말로 미쳐버릴 것 같은 답답함이 엄습해 오고는 하였다.
대체적으로 번역한 사람의 서문을 읽으면 책이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이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어 본문을 읽는데 도움을 주는 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책의 번역자 또한 미치도록 어려운 말과 구성으로 혼란에 빠뜨리게 하였다.
“자기과신, 비상식, 논리의 약점, 사상과 실천 간의 모순” 등과 같은 설명은
도저히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더 어렵게 느끼게만 하였다.
이렇게 어렵게 시작한 내용은 책의 중반에 이르도록
거듭되는 혼란과 정신적 공허함 그리고 나의 한계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끊이질 않았다.
거기에 요즘은 일반적으로 쓰지 않는 희구(希求)나 미오(迷誤) 같은 단어 들이
나를 더욱 질리도록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였다.
그러다 책의 중반쯤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인생”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와
삶을 살아야 하는 추구의 방향에 대한 눈이 뜨이기 시작하면서 몰입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중간 중간에 공허함이나 씁쓸함이 있었던 곳은 있었지만
결론을 어떻게 이끌어 갈까 하는 기대감으로 지루함을 덜어낼 수 있었다.
톨스토이가 인생론에서 말하는 인생은 “행복에 대한 희구(希求)”라 하고 있다.
“희구?”,
한자를 보고 대충 이해하기는 하였지만 뒤로 읽어갈수록
정확하게 이해한 것인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켜 사전을 들추게 하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톨스토이가 말하는 인생을 풀이하면
“행복을 찾아 사는 것”이라고 하면 부족한가?
행복이라는 것은 “참된 행복”이어야 하고 참된 행복은 “참된 생각”에서 오며,
참된 생각이란 올바른 생각으로 동물적 개성을 잘 조절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이것은 동물적 개성을 잘 조절하지 못하는 것은 진짜 행복이 아니라 ‘쾌락’이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것을 ‘생명’이라고 정의를 하였다.
톨스토이는 또한 인생을 “행복에 대한 희구”를 강조하기 위하여
다른 성인들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는데 다음과 같다.
「인생이란―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그들 속으로 광명이
남김없이 비치는 일이다」라고 공자(孔子)는 기원 600 년 전에 말했다.
「인생이란―끊임없이 더욱 큰 행복에 이르고자 하는 영혼의 순례이며
완성이다」라고 공자와 같은 시대의 바라문교도들은 말했다.
「인생이란―행복한 열반(涅槃)에 이르기 위한 자기 부정이다」라고
석가모니는 말했다.
「인생이란―행복에 이르기 위한 온량 겸허(溫良謙虛)의
도(道)이다」라고 노자(老子)는 말하였다.
「인생이란―인간이 신의 법칙을 지키면서 행복을 얻도록 신이 인간의
콧구멍 속에 불어넣으신 입김이다」라고 유대의 어느 현인은 말했다.
「인생이란―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이성에 따르는 일이다」라고 스토아
학파의 사람들은 말했다.
「인생이란―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예수는 모든 선인들의 정의를 자기의 정의 속에 총괄해서
말하였다
이와 같이 “인생”이라는 것의 공통점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하여
톨스토이는 “인생을 행복에 대한 희구”로 요점 하였다.
톨스토이는 행복에 대한 희구를 강조하기 위하여 이렇게 설명도 덧붙인다.
모든 인간은 오직 자기의 생활을 잘하고자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있다. 자기의 행복에 대한 희구(希求)를 느끼지 못할 때, 그때 인간은
자기를 살아있는 것으로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의 행복을 바라지
않고서는 인생을 생각할 수 없다. 개개인에 있어서 산다는 것은, 행복을
바라는 것, 즉 행복을 얻는 일이다
톨스토이는 그 행복에 대한 희구의 방법론을 설명하면서 반복하는 단어가
“이성적 판단의 동물아(我)”과 “사랑”, “죽음”이다.
참된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만의 행복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도 함께 추구하는 것이 옳은 인생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과정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한 한 단면을 양심으로 이야기한다.
양심이야 말로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길잡이이며 세차게 들려오는 유혹이나 허영의 소리를 다스릴 수 있는 것
또한 그러한 것으로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막아 주는 것이 양심이라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타인의 행복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다. 그리고 신(神)을 그의
목적으로 삼는 인간은 참으로 위대한 인물인 것이다.
그는 행복 추구를 잘 못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보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 때 “저 사물은”이라 하는 것은 자기 눈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보는 위치가 내 안에서 내 눈으로 보기 때문에 “저 사물”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사물”이라 하는 것은 “저 사물”인 것으로
반대로 “나”를 내 안이 아닌 밖에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생명”이러면 내 안에서 바라보는 “내 생명”으로 보기 때문에
인생이 행복에 대한 희구를 내 중심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행복에 대한 희구”를 생각하면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는데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내면의 성숙 필요하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사랑]
자신만의 행복이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사랑이다.
톨스토이는 다른 사람의 행복추구에 이르도록 이끌어 가는 도구가 이성인데
그 부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인생이란 이성의 법칙에 따르는 동물아의 활동이다. 이성이란 인간의
동물아가 그 행복을 위해서 따라가야 할 법칙이다. 사랑이란 인간의
유일한 합리적 활동이다.
어쨌든 동물아는 행복 쪽으로 끌리기 쉽다. 이성은 인간에게 개인적
행복이 잘못임을 가르쳐서 하나의 길을 남겨준다. 이 길에서의 활동이
사랑이다.“
톨스토이는 인생론을 펼쳐 나가면서 예수와 성경의 많은 부분을 인용하였는데
참된 사랑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참된 사랑의 가능성은 오직 인간이 자기로서는 동물아의 행복 따위는
없다고 깨달을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그의 생명의
액즙(液汁)은 모조리 이미 동물 아닌 야생의 어린 나무 줄기의 모든 힘을
받아서 번성한 참된 사랑의 높고 아담한 접지(接枝)에 옮아가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 사랑의 접목이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말하다시피
그는 말했다. 「이 접목, 즉 그의 사랑은 과일을 맺게 할 수 있는 하나의
나무 가지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모조리 잘려버려지라고.」
「자기의 목숨을 보전(保全)하려는 자는 이것을 잃고, 나를 의해서 그
목숨을 잃는 자는 그것을 보전하리라」고 함을 이해했을 뿐더러,
생명으로써 그것을 이해한 자만이―즉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망치고, 이 세상에서의 자기목숨을 미워하는 자는 영원한 삶에서
그것을 보전한다는 것을 이해한 자만이―오직 그자만이 참된 사랑을
인식하는 것이다.
「나보다 너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합당치 못한
자니라. 나보다 너의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자도 나에게는 합당치
못하니라. 너희가 만약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너희는 너희의 적을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라.」“
많은 사람들은 만인이 나를 위해서만 사랑해 주길 바라고 또한
그들 자신이상으로 나를 사랑해 주길 바란다.
정말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사랑할 경우에 인간의 행복과 생활은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죽음]
삶이란 사람이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살다가 죽는 것이란 심장이 고동치고 허파가 숨쉬고, 분해되지 않는 육체에서
심장이 고동을 멈추고 호흡이 중단되고 육체가 분해되는 것에 이르는 것이 죽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잘 못된 인생관에 의해서 갖게 된다고 하며
이렇게 설명한다.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이 그들의 그릇된 인생관에 의해서
제한된 삶의 일부분을 인생으로 알고 있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우리들은 육체의 죽음에 직면해서 시간 속에 나타나는 의식의 열과
육체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자기의 특수한 자아의 상실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나의 이 특수한 자아는 나의 출생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 아니므로,
어떤 시간적 의식의 중단이 모든 시간적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을
절멸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톨스토이 설명에 의하면 인간은 살아 있으면서 수 없이 순간의 죽음을 경험한다.
살아 있는 우리들의 육체는 늘 같은 것이 아니다.
육체가 내 것으로 인식함은 시간적 연속이 아니라
변화하고 있는 의식의 일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삶에서 많은 경우에 육체의 의식을 잃는데 예를 들면
잠자는 동안 우리의 육체는 의식을 잃게 된다.
우리는 매일, 매시간 의식을 잃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의식을 잃은 육체는 죽는 것이다.
육체가 분해되느냐 아니냐?
심장이 뛰고 허파가 호흡을 하고 있다는 것이 다른데
그것 때문에 우리가 매일, 매시간 경험하는 의식과 육체의 분리
즉, 순간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를 이렇게 설며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이 죽음에 의해서 잃게 됨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자아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 자아는 우리들이 자기의 것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 육체에 있음이 아니라, 무엇인지 더욱 다르게 연속되는 의식의
전열(全列)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는 그 무엇 속에 있어야만 되는 것으로
된다.“
그렇다면 죽음의 공포를 가질 필요가 없는 이유를 톨스토이는 어떻게 설명할까?
“생명의 의식이 환영이 아니라, 모든 공간적인 것, 시간 적인
것이 환영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적 생존은 시간적이며, 공간적인
휴지(休止)는 이 견해에 있어서는 아무런 실제적인 의의가 없고, 나의
참된 생명을 중단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환할 수 조차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견해에 있어서의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인생관 중 그 어느 것이라도 사람들이 굳게 간직하고
있다면, 그 어느 쪽에도 죽음의 공포는 있을 리 없다.
동물적 존재라 하더라도, 또 합리적 존재라 하더라도,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할 것까진 없다.“
우리의 생명 그러니까 육체와 의식을 두 가지 개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시간적 개념”과 “공간적 개념”이라는 것인데
우리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있는 것은 시간적 개념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골간적 개념으로 생각하면 내 육체가 의식이 있고 없음을 떠나서
공간의 어느 곳에선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것은 분명 공간적 개념이다. 그렇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태어난 시점과 죽는 시점과 같이 시간적 개념으로 의식하면
죽음 뒤의 시간에 내 육체는 의식을 잃어 다시 결합하지 않는 것이다.
크리스천 들은 “영혼이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한다.
이는 “천국”이라는 공간적 개념과 “영원히“라는 시간적 개념의 혼합이다.
따라서 내 육체가 의식을 잃고 심장이 멈추고 허파가 호흡을 하지 않더라도
“천국”이라는 공간을 인식하면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없어진다.
톨스토이는 인생이 “행복에 대한 희구”인데
나 자진만의 행복을 추구하다 보면 시간적 개념의 죽음에 종속되어 두려움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행복 즉, 더불어 사는 것을 추구할 때 공간적 개념을 인식하고
영원히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설명을 한다.
이를 톨스토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대체로 죽음의 공포는 그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삶의 행복이 상실된다는
공포로부터 생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약 자기의
행복을 다른 존재의 행복 속에 상정(相定)할 수 있다면, 즉 그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면, 죽음도 역시 자기 하나만을 위해서
생활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 같은 행복과 생명의 중단은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남을 위해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것이 행복과
생명의 소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결론에 앞서 행복을 불가능 하게 하는 것에 대한
세 가지를 이렇게 이야기 한다.
“첫째는, 서로가 개인적인 행복만을 찾고 있는 생물의 투쟁이며, 둘째로는 생명의
낭비(浪費)와 포만(飽滿)과 고통으로 이끄는 열락(悅樂)의 속임이고,
셋째로는 죽음이다.“
인생이 행복에 대한 희구이지만 자기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낭비와 고통으로 이끌지 말고 죽음의 두려움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렵고 복잡하고 장황하고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며 미치게 이어지는
톨스토이의 인생론에 대한 “결론(結論)”아주 간결하고 분명하다.
그리고 성경의 구절로 최종 마무리를 하였다.
“인간의 생활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다. 그리하여 그가 희구하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다. 죽음과 고통의 형태로 나타나는 악이 사람에게 보임은,
그저 그가 육적(肉的) 동물적인 존재의 법칙을 자기의 생활 법칙으로 알고 있을 때만 이다. 그저 그가 인간이면서도 짐승의 정도로까지 타락할 때, 그때 비로소
그는 죽음과 고통을 보는 것이다. 죽음과 고통은 도깨비처럼 여러 곳에서
그를 불러서 그의 앞에 열린 이성(理性)의 법칙에 따라 사랑 속에
표현되는 인간 생활의 오직 한 갈래의 본도(本道)로 그를 몰아넣는
것이다. 죽음과 고통은 그저 인간에 의해서 행해지는 자기 삶의 법칙에
대한 배반(背反)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의 법칙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죽음도 고통도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들을
쉬게 하리라.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제 11 장 28∼30 절).
백작의 지위로 태어난 톨스토이가 이 인생론을 펼친 나이가 59세였다.
처음 읽을 때 한계를 느끼면서 읽는 것을 포기하려다 결론이 궁금해져 끝까지 왔다.
만일에 결론을 먼저 봤더라면 중간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읽기를 그만 뒀을지도 모른다.
결론이 너무도 간단하면서도 명쾌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간 모두 읽은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이나, 고통, 죽음에 대해 체계적으로 잘 서술하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방식과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정리에 크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다. 내 스스로 그 희구하는 것에 따라
배우고 생각하며 더불어 살고 죽음이나 고통 혹은 악에 막혀
결코 중단하지 않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나의 인생이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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