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로마인 이야기 7권 <악명높은 황제들> - 시오노 나나미

송삿갓 2017. 12. 10. 09:52

로마인 이야기 7<악명높은 황제들> -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7권은 제정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집착한 ’,

그러니까 세습으로 이어지는 황제의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투쟁 같은 이야기다.

저자는 와 결별하게 되는 이 책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카이사르가 청사진을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하고

티베리우스가 반석처럼 튼튼하게 만들고 클라우디우스가 손질한 제정은,

심정적으로는 공화주의자였던 타키투스조차도

제국의 현재 상황에 적합한 정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훌륭히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인은 이데올로기의 민족이 아니었다.

현실과 싸운다는 의미에서의 현실주의자 집단이었다.‘

 

카이사르가 암살을 당하고 약관의 나이에 제1상속자이며 후계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정적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제거하고 원로원이 바라는 공화정으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을 한 것은 교묘한 속임수'의 정치체제였다는 저자의 표현이다.

그리고 다음 후계자를 자신의 피로 세습하려 했지만

가능한 가족들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를 선택하지만

아내인 리비아에게 권력의 1/3을 물려주며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인

게르마니쿠스에게 티베리우스의 다음 황제를 세습하도록 유언장에 기록했다.

 

리비아는 옥나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본명)와 결혼할 때 3살 바기인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왔다.

둘이 결혼 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두루수스이고

게르마니쿠스는 누나의 딸한테 태어나 양자로 삼은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유언장에 제1상속자를 티베리우스로 하며 2/3을 주면서

자신의 손자인 게르마니쿠스를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받아들일 것 또한 명기하였으니

아내인 리비아에게 남겨준 1/3의 권력은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예정 상속인 셈이다.

이렇게 아우구수투수가 율리우스 씨족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집념의 절반은

로마 정국의 안정을 꾀했다고 저자는 서술하고 있다.

그러니까 티베리우스는 율리우스 씨족 세습의 징검다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티베리우스가 황제를 계승하여 치세를 할 때

원로원 의원들이 티베리우스의 업적을 찬양하고 그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우고

싶다고 할 때 그는 이렇게 연설하였다.

나 자신은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에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

그런 내가 하는 일도 모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여러분이 나에게 준 높은 지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겹다.

후세는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내가 한 일이 조상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는가.

원로원 의원 여러분의 입장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제국의 평화 유지에 공헌을 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국익을 위해서라면 나쁜 평판에도 굴하지 않고 해낸 것도 후세는 평가해줄까.

평가해준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에게는 신전이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영원히 사람들 마음에 남을 조상(彫像)이다.

후세의 평가가 좋지 않으면 대리석에 새겨진 석상조차도 묘소를 짓는 것보다

더 무의미한 기념물에 불과하다.

나의 소망은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신들이 계속 나에게 마음의 평정과 함께

인간의 법을 이해하는 능력을 주시는 것뿐이다.“

 

현대 연구자 가운데 한 사람은 다음 라틴어 격언만큼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어울리는

말도 없다고 주장한다.

불확실한 것은 운명이 지배하는 영역, 확실한 것은 무릇 인간의 재주가 관할하는 영역

 

티베리우스는 말년에 수도를 떠나 나플리만에 떠 있는 작은 섬 카프리에 은둔한다.

그렇다고 자리에서 물러 난 것은 아니고 카프리 섬에 있으면서 로마 제국을 계속 통치한다.

저자는 이를 가출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역사가 타키투스는 겉으로는 착한 사람처럼 행세하면서 뒤에서는

나쁜 짓을 일삼는 위선자라고 비난하였지만 작가는 본심에 충실한 사람으로 평한다.

다른 말로는 티베리우스의 결점이 일관되게 자신의 본심에 충실한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저자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적을 이렇게 평가한다.

로마 제국은 타키투스 같은 동조자가 뭐라고 비판하든 간에

카이사르가 기획하고 아우구스투스가 구축하고 티베리우스가 반석처럼 다져놓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티베리우스가 새로운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바로 새로운 정치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아우구스투스가 훌륭하게 구축한 제정도 그를 뒤이은 사람의 방식에 따라서는

한때의 개혁으로 끝났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가 그 체제를 견고하게 다지는 일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제정 로마는 다음에 누가 뒤를 이어도 튼튼한 반석일 수 있었다.‘

 

77세에 생을 마감한 티베리우스 황제를 뒤를 이은 황제는

247개월의 가이우스라는 아름다운 젊은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가 라인 강 방위선의 군단에서 근무할 때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그에게 병사들이 만들어준

유아용 칼리가(로마 군화)를 신고 놀았기 때문에,

군단병들의 마스코트가 되어 그를 칼라굴라(작은 군화라는 뜻)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원래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에는 게르마니쿠스가 티베리우스를 승계하도록 되어있었지만

게르마니쿠스가 일찍 죽는 바람에 이루지 못했다.

라인강 전선에 있는 게르마니쿠스를 유프라테스 강변의 동방으로 옮기도록 했다.

이곳은 동방의 강국 파르티아가 있었는데 카이사르가 죽기 전 원정하려고 준비했던 곳이다.

게르마니쿠스 31세 시절, 그는 미남인데다 전선의 병사들과도 사이가 좋은 인기 남 이었다.

2천년 뒤 현대의 어느 역사가는 그를 열의가 넘치는 딜리탕트라고 평했지만

실제 성격은 개방적이고 누구한테나 상냥하고 예의바르게 대했다고 한다.

서기 19년 봄, 시리아의 총독 피소를 만나 격론을 벌이며 함께 지내다

자신의 임지인 안티오키아로 돌아오자마자 고열로 쓰러졌지만

아침이면 거짓말처럼 사라지기를 몇 번 반복하다 쇠약해져 열흘도 지나기 전에 눈을 감았다.

주위에서는 갑작스러운 병의 원인에 대해 티베리우스의 밀명을 받은

시리아 총독 피소가 독약을 먹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게르마니쿠스도 그렇게 믿으며 죽음에 이르렀을 때

아내와 친구들에게 복수해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아내인 아그리피나는 남편의 유골을 품에 안고 일곱 살 바기 칼리굴라와

태어난 지 1년 된 막내딸을 데리고 로마로 떠나 두 달 만에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로마에서 국장을 치렀는데 양아버지이자 황제인 티베리우스는 참석하지 않았다.

게르마니쿠스는 33녀의 자녀를 두었지만 장남과 차남까지 세상을 떠나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에 따라 게르마니쿠스의 3남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의 뒤를 잇게 되었다.

이는 신격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 받은 사람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부모 양쪽에서 피를 받은 칼리굴라는 정통성의 회복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낭비와 폭정을 일삼던 칼리굴라 황제는 4년도 채우지 못한

서기 41124일 자신의 근위대 대대장 2명과 소수의 근위병들에 의해

아내, 딸과 함께 살해되었다.

살인자들은 가이우스 황제의 작은 아버지인 클라우디우스를 근위대 병영으로 데러가

임페라토르라는 환호를 받게 하여 로마의 제4대 황제로 세운다.

 

테리우스의 조카이자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고 칼리굴라의 숙부인

4대 클라우디우스는 이렇게 갑자기 황제가 되었지만 신체적 결함이 있었다.

어렸을 때 소아마비를 앓아 걸을 때 오른쪽 다리를 질질 끌곤 했으며

때문에 체형이 좌우가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머리는 작아 불구자는 아니지만

볼품없는 사람으로 허약한 체질이었다고 한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클라우디우스는 역사 연구와 저술을 하였는데

로마사 142권을 간행한 티투스 리비우스가 역사 연구과 저술을 가르친 스승이다.

칼리굴라가 살해당하고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의 등극의 나이가 50,

로마의 원로원이나 시민들은 어린 칼리굴라가 방만하고 사치스러움으로 국가를 망쳤기에

50세의 원숙기에 접어든 황제의 등극을 환영하였고 또한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처럼

야망이 없었다고 보여 쉽게 조종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황제의 등극을 승인 했을 수도 있다.

클라우디우스는 황제에 즉위 했을 때 아우구스투스의 정치를 계승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그리스인 해방노예 중 우수한 사람을 골라 비서관 체제의 정치를 하였다.

편지, 회계 청원서, 필기, 지식·정보, 공부 담당 등의 비서관을 두었다.

이는 업무를 보좌하는 좋은 점이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비서관들의 횡행이 커져갔다.

원로원들조차 황제를 만날 때 비서관을 통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국가의 귀족이라고 생각하는 원로원들이 무시를 당하는 것 같은 상처가 쌓여

황제에 대한 불만으로 가슴에 담아 쌓여가는 형태가 되었다.

 

클라우디우스는 네 번째 결혼의 상대가 직전 황제의 누이동생인 아그리피나다.

그녀는 황제의 아내가 되고 12세의 아들을 후계자로 만들어

황제의 어머니로 로마 제국을 통치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황제의 비서까지 포섭하는 끈질긴 마음으로 공작하여 숙부와 질녀의 결혼이 성사된다.

아그리피나는 황녀가 된 후 자신의 아들을 황제의 양자로 받아들여 후계자로 만들고

철학자인 세네카를 선택하여 제왕 교육을 시키며 준비를 마쳤다고 판단되었을 때

버섯요리를 좋아하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독버섯을 먹여 암살하고

비서관 치세를 하여 마음이 돌아선 원로원의 추인을 받아 황제로 등극 시킨다.

이렇게 17세도 안되어 등극한 청년이 제5대 로마 황제인 네로다.

가수로 데뷔까지 하여 노래하는 황제로 알려진 네로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인과의 관계를

반대하는 어머니를 살해하는 만행까지 저지른다.

네로가 황제로 즉위한 지 10여 년 네로와 친한 주변사람들 위주로 피소 음모라고 알려진

암살계획이 결행을 앞두고 발각되고 자신의 스승이자 보좌관인 세네카까지 가담자로

죽게 되었는데 암살의 실행자로 가담한 근위대 대대장에게 충성을 맹세한 황제에게

왜 칼을 들이 댈 마음이 났느냐는 네로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를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폐하가 황제답고 존경할 만한 분이었을 무렵에는

저만큼 폐하에게 충성스런 부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폐하가 어머니를 죽이고 아내를 죽이고 운동경기에 열광하고

가수 노릇에 열중하고 심지어 방화까지 저지르게 된 뒤로는

폐하에게 증오밖에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청년장교들에 의한 암살계획이 있었지만 사전에 밝혀져 위기를 넘겼지만

이후에 에스파냐의 총독 갈바의 궐기로 원로원은 네로를 국가의 적을 선언하여

지방으로 피신한 네로는 체포의 손길을 느끼곤 자살한다.

네로는 14년을 통치하고 305개월 20일 만에 자살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로마의 황제는 제정이라 할지라도 원로원과 시민이 용인하고 외면하지 않아야

황제의 자리에 앉고 유지할 수 있으며, 시민의 안전식량을 보장 할 수 있어야 한다.

원로원과 시민들이 권력 위임을 철회하고 군단이 충성 서약을 거부하면

어제까지의 황제도 한 순 간에 보통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 생을 마감해야 했다.

칼리굴라나 네로의 경우 식량과 안정을 주지 못했기에

원로원과 시민이 외면하였기에 권좌에서 물러나야 한 것이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의 왕조가 100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 것도

로마인은 보다는 실력을 존중한 나라로 로마인이 생각하는 혈통은

요즘 말하는 부가가치였던 것으로 저자는 풀이하였다.

아우구스투스의 와 결별한 로마인들도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제정이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도 저자의 풀이가 옳은 것으로 판단된다.

 

7권을 읽으며 전쟁과 외교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있어 소개하며 마친다.

전쟁은 무기를 사용한 외교이고, 외교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전쟁이다.’

 

December 8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