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로마인 이야기 9권 <현제(賢帝)의 세기> - 시오노 나나미

송삿갓 2017. 12. 26. 07:02

로마인 이야기 9<현제(賢帝)의 세기> - 시오노 나나미

 

9권의 이야기는 표지에 따르면 로마인이 진정으로 행복한 시대라고 이야기하는

로마제국을 최전성기의 반열에 올려놓은 3현제 즉,

로마제국의 판도를 최대로 넓힌 정면 돌파형 인물 트라야누수

제국 전역을 순행하며 통치체제를 재구축한 하드리아누스

온화한 인품과 덕행으로 개혁을 정착시킨 아토니누스 피우스의 이야기다.

 

제정 로마 시대의 최고 역사가 타키투스가 보기 드물게 행복한 시대고 했던

트라야누스는 이때까지 제정 로마의 황제로서는 처음으로 속주 출신이다.

에스파나 남부의 베티카 속주에 있는 오늘날에도 로마 시대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

이탈리카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기원전 206년 자마회전에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을 무찌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로마 본국 이외의 땅에 건설한 최초의 식민지(콜로니아)

저자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의 로마 시민권 소유자 퇴역병이 현지 여자와 결혼한

후손일 것이라는 예측을 하였다.

그렇다 치더라도 조상이 본국 이탈리아 출신의 로마 시민인 것은 확실한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트라야누스를 행복한 시대의 황제로 칭송을 받을까?

공화정이나 제정시대의 로마 정치의 기본은 보편타당성을 추구하였는데

이는 공감이라는 것이 우선 되어야 보편타당이라는 평가에 이를 수 있는 것으로

트라야누스의 시대가 가장 큰 공감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귀결된다.

 

황제에 즉위 했을 당시에는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임을 의식해서인지

매사에 겸손하고 수수하게 처신하면서 로마 황제의 3대 책무라고 불리는

안정보장, 내치, 사회간접자본 정비인데 도나우강 북쪽에 위치한

다키와의 전쟁에서 승리 후 그 곳에서 풍부한 금광과 은광,

그리고 다키아 왕이 남긴 엄청난 양의 보물을 이용하여

아폴로도로스를 비롯한 건축가와 엔지니어를 활용하여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는 물론

속주 등의 제국 전역에 걸친 공공사업의 열의와 기력에 압도당하였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특히 도나우 강에 놓은 트라야누스 다리는 뛰어난 기술, 웅장함, 실용성의 결정체라고 한다.

이 같은 공공사업이 많다는 것은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여 제국의 행복을 이끌었다.

 

로마는 패자도 승자도 로마 제국이라는 공동운명체 일원으로 보는 정책은

암살당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개방노선이 제국의 속주 통치 기본 이념이 되었고

그로 인해 트라야누스라는 속주 출신의 황제가 탄생하여 행복한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64세의 생일을 한 달 남짓 앞두고 20년간에 걸친 치세를 끝낸 트라야누스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하였다.

평판이 좋았던 황제인 만금, 트라야누스 초상은 1900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많이 남아있다.

그 중 하나 앞에 선 나는 자연스럽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당신은 왜 그렇게 맹렬히 애를 썼습니까?”

물론 대리석상이 대답할 리는 없다.

그래서 대답은 질문한 내가 대신하지만 이런 것을 학문적으로 바꿔 말하면 가설이 된다.

사전에 따르면 가설은 어떤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가정이라고 풀이 되어 있지만,

요컨대 상상이지만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고도 할 수 있다는 공상이 아니라,

여러 가지 사실을 토대로 한 상상이다.

그래서 나는 트라야누스의 속마음을 짐작하여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남들보다 훨씬 노력한 까닭은, 속주 출신으로는 최초의 황제였기 때문이오.”

흔히 있지 않은가, 여자로서는 처음이니까. 또는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이니까

남들보다 휠씬 노력하는 사람들이.

어쨌거나 진심으로 성실하게 황제의 책무를 수행한 것이 20년 동안

로마 제국을 다스린 트라야누스였다.‘

 

트라야누스에 이어 황제가 된 푸불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역시

트랴야누스와 같은 도시 태생으로 23살 아래로 트라야누스의 황후인 플로리타의 천거를 받아

황제의 곁에 있게 되어 즉위 당시 마흔 살 이라는 것과

다양한 경력이 있어 최고책임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고 군단 장병들에게 인망이 두터웠고

명석한 두뇌로 원로원의 충분한 지지를 받으며 황제가 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수도인 로마에 있었던 시간보다

제국의 주요 방위선을 순행하는 기간이 더 길었다.

라인 강과 도나우 강, 브리타니아, 북아프리카 그리고 흑해와 홍해를 잇는 유프라테스 강을

황제가 몸소 시찰하면서 필요 없는 것은 폐기하고 필요한 것은 추가하면서

로메 제국 방위를 튼튼히 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구축한 로마군단은 어떠했을까?

책에는 로마 군단의 현실에 대해 로마인이 아닌 유대인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기>의 내용을 조금 길기는 하지만 발췌한다면서 소개하였는데

행복한 시기의 로마를 방어하는 로마군의 특성을 잘 표현 한 것 같아

나 역시 그 중 주요한 부분을 재 발췌한다.

로마 병사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비로소 무기를 드는 것이 아니다.

평화로울 때는 인생을 즐기다가 필요할 때만 무기를 들고 전쟁터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마치 무기를 손에 들고 태어난 것처럼, 그것도 실전에서 시험해볼 기회를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듯이 날마다 훈련과 연습에 힘쓰고 있다.

이 군사훈련의 격렬함은 실전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실제로 전투를 할 때와 똑같은 기백으로 혹독한 훈련을 거듭한다.

그 때문에 실제 전쟁터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고, 지쳐서 비명을 지르는 일도 없고,

전투 대형을 무너뜨리는 일도 없다. 그래서 언제나 승리를 얻는다.

어떤 적도 그들만큼 엄격한 군단생활을 하지 않는다.

로마 병사와 다른 나라 병사 사이에 뚜렷한 격차가 생기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

그들에서 군사훈련은 피 흘리지 않는 실전이고,

실전은 피 흘리는 훈련이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같은 평가에 로마군이 숙영지를 만드는 것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하룻밤을 묵어도 견고한 숙영지를 짓는 것은 공화정 때부터

로마가 변함없이 고수한 방식으로, 근대전의 전문가들도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병사들은 여차하면 도망칠 곳이 있어야 용감하게 싸울 수 있고,

전투에서 지더라도 숙영지로 도주하여 공포에서 해방된 상태로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으니까, 다음번 전투에서 지난범의 패배를 만회하기 쉬워진다는 것이

이들의 의견이다.

견고하고 안전한 진지를 만드는 데 드는 수고는 병사들을 심리적으로 우위에 서게 하는

이점으로 충분히 보상된다는 뜻이다.‘

 

요세푸스는 로마군대의 계획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였다.

전투에서도 그들은 무엇 하나 무계획적으로 하지 않는다.

개혁은 행동으로 이어지고, 행동은 다음 계획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극히 적다. 또한 잘못을 저질러도 금세 만회할 수 있다.

게다라 로마인은 생가지도 않은 행운으로 성공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정황을 엄밀히 조사한 뒤에 실패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

계획 없는 성공은 조사의 중요성을 망각시킬 위험이 있지만,

완벽하게 조사한 뒤에 실패하는 것은 두 번 다시 실해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효과적인 훈련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운으로 인한 성공은 누구의 공적도 아니지만,

정황 조사를 완벽하게 하면 설령 실해하더라도 최소한 대책만은

충분히 강구했다는 위안을 얻을 수 있다.

 

- 중략-

 

지금까지 로마군에 대해 길고 상세하게 서술했지만,

그것은 결코 로마군을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에게 정복당한 것은 정복당한자의 결함 때문이라기보다

로마인의 뛰어난 자질 때문이라고 피정복자들을 위로하고,

혹시라도 반란을 꿈꾸고 있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적인 로마인이 어떤 민족인가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폭거를 단념시키기 위해서다.

또한 로마군의 조직에 대한 서술이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도 담겨 있다.‘

 

기왕에 유대인이 나왔으니 로마와 유대의 문제를 조금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로마는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로 전쟁에서 승리하여 속주나 동맹국으로 만들었다 해도

그 지역이나 나라의 사람들을 로마식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기본 정책이라는

설명을 수도 없이 반복한다.

그 중 다종교라는 의미는 속주나 동맹국의 종교를 탄압하거나 말살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로마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국가인데 반대로 유대인은 정교일치의 민족이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자유에는 선택의 자유도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로마적인

자유의 개념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유대교도와 근대까지의 기독교는

선택의 자유가 자유에 포함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신의 가르침에 맞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자유다.

로마는 유대인에게 가능한 많은 자유를 보장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

예로 유대인은 신이 용납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로마의 공직이나 병역에 종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불평등한 것에 대한 불만은 알렉산드리아 대왕의 동아시아 재패에 따라

그 지역으로 많이 이주한 그리스인들과의 문제가 대부분이었다.

일상생활에서의 문제는 한 때 유대인을 지배했던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대립이었다.

그리스인들은 황무지에 도시를 건설하고 항로를 개척하고 그 항로를 직접 돌아다니는

그리스계 주민들로서는 다 건설된 도시에 어느새 눌러앉아서, 항로를 개척하기는커녕

위험한 바닷가에는 나가지도 않고 그저 남들이 실어오는 물건을 팔아서 돈을 버는 것 밖에는

생각지 않는 유대계 주민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이 같은 두 민족의 분쟁에 로마는 중재자로 나서거나 정치를 펴며

어찌 보면 유대인들에게 많은 특혜와 자유를 줬지만

유대인들은 그걸 자유와 특혜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오늘날 유대인이나 기독교에게

로마는 탄압자료 묘사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로마가 유대인을 전혀 탄압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로마의 정치 특성 중 하나가 속주나 동맹국을 존중하다가도 반란 등의 배신을 하면

그 족속을 말살시키려 하거나 흩어지게 만드는데

그 중 하나가 1~3차의 포에니 전쟁의 주역인 한니발의 국가 카르타고를 불살라 없앤 것과

틈만 나면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쫒아내 이산(디아스포라)시킨 것이다.

잦은 반란을 일으킨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쫒아내 분산시킨 황제가 바로

하드리아누스 황제다.

그 때문에 지금도 유대인이나 기독교에는 로마를 좋게만 표현하지 않을 수도 있듯이

유대인은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 확고한 신념이 있는 사람들로

앞에서 언급한 유대출신 로마인 <유대 전쟁기>의 저자인 요세푸스는 유대인을 변호하는

<아피온에 대한 반론>에 이렇게 변호하였다.

유대인과 같은 율법에 따라 살고 싶어 하는 이민족은 환영하지만,

율법을 공유하지 않고 생활의 편의만 공유하기 위해 들어오려는 이민족은

거부하는 것이 옳다고 율법에도 쓰여 있다.‘

하지만 당시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유대교도는 자기들과 생활방식이 다른 사람에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때라도 항상 격렬한 증오심을 품고 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21년을 치세하고 6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뒤를 이은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인데 하드리우스는 말년에 원로원으로부터

충분한 존경을 받지 못해서 죽은 뒤 새 황제가 선제의 신격화 요청을

일부의 원로원이 거부하는 동의안을 제출하자 눈물을 흘리다시피 하여 의결하자

자비로운 사람을 뜻하는 피우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말년에 원로원의 환영을 받지 못했을까?

로마 시대 사람이 쓴 유일한 하드리아누스이 전기인

<황제실록(Historia Augusta>의 저자가 평한 하드리아누수는 이렇다.

시와 문학에 관해서는 상당한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수학과 기하학, 회화에도 꽤 높은 수준의 이해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악기 연주와 노래도 좋아해서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 열심이었다.

악기와 노래를 연습할 때는 남몰래 숨어서 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을 노래한 사랑의 시도 몇 편지었다.

무예에서는 제일급의 달인이었다.

검투사가 사용하는 복잡하고 위험한 무기까지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다.

성격은 복잡했다. 엄격한가 하면 상냥하고, 친절한가 하면 까다롭고,

쾌락적인가 하면 금욕적이고, 씀씀이가 야박한가 하면 시원시원하고,

불성실한가 하면 더없이 성실하고,

잔혹해 보일 정도로 무자비할 때가 있는가 하면 딴 사람처럼 온화하게 관용을 베푸는 식이다.

요컨대 변덕스럽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았던 것이 하드리아누스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여기서 변덕스럽다는 점에서 한결같다.‘는 것에서

하드리아누스의 됨됨이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좋은 말로 하면 자신에게 충실하게 행동했다는 의미이지만 고집과 아집이 있어

하드리아누스적 기준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결정되면,

같은 인물도 때와 경우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충분한 것으로

사람들을 혼란시켰고 그 결과 변덕스럽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았다.’는 평가로 나타난 것 같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말벗이었고 황제가 후계자로 안니우스를 지명하고 교육을 위탁하자

그를 가르친 스승은 카르타고 출신의 철학자 프론토는 자신의 제자가 제위에 오르자

옛 제자에게 쓴 편지를 보면 하드리아누스가 어떤 황제였는지 더욱 참고가 된다.

하드리아누스에게 친밀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를 대할 때먼 그 명석한 사람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고작이었다.

마치 전쟁의 신 마르스나 저승의 신 플루토 앞에 서기라도 한 것처럼 바싹 긴장하곤 했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냐고?

애정을 품으려면 자신과의 친밀감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그와 나 사이에는 친밀감이 서로 통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앞에서는 나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

하지만 친밀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안토니우스는 정반대다. 나는 해를 사랑하듯, 달을 사랑하듯, 아니 인생을 사랑하듯,

사랑하는 숨결을 사랑하듯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친밀한 애정을 품고 있듯이 그도 나에게 친밀한 애정을 느낀다고

언제나 확신할 수 있었다.‘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안토니누스의 치세 5년째 접어든 해에 소아시아 태생의 철학자

아일리우수 아리스티테스가 황제와 원로원 앞에서 했던 말로 9권을 마무리하였다.

그 중 끝 부분을 소개하면

로마는 누구한테나 통하는 법을 마련하여, 인종이나 민족이 다르고 문화를 공유하지

않아도 법을 중심으로 공존공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생활방식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는 가를 보여주기 위해

수많은 권리도 보장해 주었다.

이 로마 세계는 하나의 커다란 집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로마 제국이라는 대가족의 일원임을 날마다 상기시켜주는 커다란 집이다.‘

 

저자는 이어 마르쿠스 아울레이우스가 묘사한 안토니누스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아버지의

상이 아닌가라는 글로 맺음 하였다.

 

책 한 권의 후기라고 하기엔 너무 길어진 느낌이 든다.

하지만 천이백 년을 유지한 로마의 근간, 그러니까 전쟁과 공격 위주의 공화정시대에 이어

제정 시대는 주로 방어 위주였지만 행복한 세상으로 구축한 기본의 중요한 부분이

이 한 권의 책에 대부분 담겨있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현제(賢帝)의 세기라는 제목을 부여한 것 같지만 황금시대의 이야기임에는 분명하다.

 

이 후기를 마무리 한 날이 20171225일 크리스마스다.

어느덧 2017년 한 해도 마무리하는 시점에 차가운 날씨, 텅 빈 도로를 보는 마음이

이루 말 할 수 없이 허전하지만 책과 음악을 즐기며 보낼 수 있다는 것에 위로가 된다.

 

December 25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