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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권 <위기와 극복> - 시오노 나나미

송삿갓 2017. 12. 13. 23:59

로마인 이야기 8<위기와 극복> - 시오노 나나미

 

8권의 위기와 극복은 네로 황제가 죽고 트라야누스가 등장할 때까지의 29년 이야기인데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사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네르바 등

7명의 황제인데 첫 1년에 3명의 황제가 죽거나 죽임을 당하는 등 혼란기를 겪는다.

이 시대에 13세부터 40대 초반까지 살았던 제정 로마 시대의 최고 역사가

타키루스는 <역사>라는 저서의 첫머리에 자신이 듣고 경험한 이야기를 이렇게 썼다.

내가 이제부터 서술하고자 하는 것은,

로마 제국에는 고뇌와 비탄으로 가득 찬 시대의 이야기다.

적과의 참혹한 전쟁, 동포들 사이의 불화와 반목, 속주민의 반란이 되풀이 되었고,

본국의 평화조차도 많은 피를 흘린 뒤에야 겨우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가 넷이나 비명에 죽고(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도미티아누스 등),

로마 시민까지 전투를 벌인 것도 세 차례나 된다.

속주민이나 외적을 상대로 한 전쟁은 그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것도 로마인끼리 벌인 전쟁의 여파에 불과했다.

제국 동방에서 벌어진 전쟁(유대 전쟁)은 로마에 바람직한 결과로 끝낼 수 있었지만,

제국 서방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도나우 강을 건너 침입해온 야만족에 대해 대책을 세우느라 고심하고,

제국에 대한 갈리아 속주의 충성심은 흔들리고,

브리타니아는 제패가 이루어졌는데도 방치되고

- 중 략 -

 

게다가 본국 이탈리아도 잇달아 일어나는 재해에 시달렸다.

캄파냐 지방의 풍요로운 도시들은 매몰되고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페르쿨라네움 등이 매몰 된 것을 가리킨다),

수도 로마에서는 대 화재가 일어나고, 유서 깊은 신전들은 파괴되고,

카피톨리노 언덕에 서 있는 최고신 유피테르의 신전까지도

같은 로마인의 손으로 불타버렸다.

- 중 략 -‘

 

당시에 이러한 내전과 속주국의 반란에도 로마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에 익숙한 것과 황제와 원로원의 견제와 상호보완의 정치가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노래하는 황제 네로가 자살하고 1년여 동안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등이 바뀌면서

내전과 속주국의 거센 반란이 있었지만 로마인은 반란 민족에 대해서 보복으로만

일관하지는 않고 반란의 주동자 역할을 맡은 부족에게도 로마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한다.’는 방침으로 일관했다.

로마는 승자의 권리’(유레 빅토리아)를 행사하기보다 관용’(클레멘티아)를 택했다.

휴머니즘에 눈을 떴기 때문이 아니라, 그쪽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술라를 비롯한 몇몇의 지도자가 살생부까지 만들어 정적을 무참히 살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방을 점령할 때 정복한 부족은 로마화 시키기 보다는

그 부족의 존재를 존중하고 부족의 리더들을 그대래 세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의 성을 주어 사용하게 하였던 것이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일은 아무리 상관의 명령이라 해도 잘하지 못하는 법이지만

반대로 일시적으로 분노가 일었다 하더라도 정당한 명령은 복종하는 것도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가 보복을 주장하는 부하 병사들을 통제 할 수 있었고

내전을 일으킨 반대편에서 배신자라고 낙인 된 군단병들도 순순히 원상태로 돌아가고,

로마에 반기를 들었던 속주민도 다시금 로마위 패권을 인정할 것을 승낙하고

주모자들도 저항을 포기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다문화 다신교나 일신교의 차이의 예를 들면

그리스나 로마의 다신교 신들은 인간을 지켜주고 도와주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와는 반대로 유대인이 신봉하는 일신교의 유일신은 인간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명령하고, 그 명령을 어기면 벌을 내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 존재다.

그렇다면 당연한 귀결이지만, 다신교 민족의 경우에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는 반면,

일신교 민족의 정치체재는 종교가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신권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카이사르가 창시하고 교묘한 아우구스투스가 오묘한 속임수로 건설한 로마 제정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네로를 마지막으로 무너지고

1년 동안 세 명의 황제를 갈아타는 혼란을 거듭한 끝에

플라비우스 왕조의 창시자인 베스파시아누스가 이어받았다.

 

로마 제국의 재건을 맡은 베스파시아누스의 공식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베스파시아누스 아우구스투수

(Imperator Caesar Vespasianus Augustus)‘가 되었다.

로마의 제정은 카이사르가 창시하고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하였기에 누가 황제가 되 든,

로마 제국 황제의 공식 이름에는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가 붙는 것이 관례가 된다.

공화정의 향수에 황제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어도 황제 통치체제는 계속된다는

로마인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원로원과 황제는 견제와 상호보완 작용을 하지만 귀족정치의 공화정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원로원은 기회만 있으면 황제를 궁지에 몰아넣으려 하거나 공화정 성향의 황제 등장에

환영하며 너무도 쉽게 이전 황제를 저버리는데 대표적인 예료 네로 황제 같은 경우다.

수도 로마 출신의 갈바가 반란이 움직임이 있을 때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여

자살로 자리에게 물러나게 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보완 하려는 듯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황제법을 만들어

원로원은 이제 황제를 탄핵제판에 회부하거나 다수결에 따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여

정권 담당자를 바꿀 수 없게 만들었다.

황제법 중 한 조항인 7조를 보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제도 그랬듯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원로원 회의나 민회의 결의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를 가진다.‘

이는 호민관 특권을 가지면 행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다른 황제들은 굳이

글로 명시하지 않은 것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명문화 한 것이다.

이는 원로원이 제정 창시자인 아우구스투스도 인정했던 황제 견제 기능을 잃어버린 것으로

면책특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또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이전에 내전으로 3명의 황제가 바뀌는 혼란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의 장남인 티투스와 차남인 도미티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1 후계자인 티투스에게 자신과 동등한 임페라트로를 개인 이름으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으며 그 밖에도 절대 지휘권호민과 특권까지 주어

공동 동치자로 지명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이 같은 황제의 입지를 구축하는 것만 했더라면

로마의 시민과 원로원의 반발이 있었겠지만 빵과 써커스로 통하는 경제와

교육과 의료에 대해서 충분히 공감할 만한 정치를 하였다.

그렇다고 네로에 이어 내전의 혼란으로 바닥 난 재정을 위해서 무작정 세금을 올리진 않고

제국 전역의 국세조사(켄수스)를 하여 수입을 늘리기 위한 조치를 하였다.

당시 로마는 카이사르가 만든 농지법에 의해 국유지를 임차할 수 있는 면적의 상한선을

정했는데 일정한 크기의 이하인 자투리땅은 빌려주거나 공여할 수 있는 대상에서 제외되어

옆에 있는 땅을 빌려 경작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경작했던 농지를 일일이 측량하여

임차료를 부과하여 조세 수입이 상당히 늘었다.

 

또한 베티갈 우리나이(Vertigal urnae)'라는 오줌세를 신설했는데

당시 로마에는 섬유업자들이 공중변소에 있는 오줌을 수거하여

양털에 포함되어 있는 기름기를 빼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황제는 오줌을 수거하는 업자에게 수거료를 신설하여 세수를 늘렸다.

오늘날 유럽에서 베스파시아누스라는 이름이 공중변소로 통칭하고

이탈리아에서는 베스파시아노라고 말하면 공중변호를 가리키는 게 보통이라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10년을 통치하고 제국 재건자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죽고

장남이 티투스가 39세에 황제로 즉위하지만 23개월 재위하고 죽는다.

젊은 나이임에도 일찍 죽게 된 것은 티투스 황제 재위기간 동안 잇따른 재난으로

심신에 피로가 쌓였기 때문 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유명한 폼페이와 헤르클라네움의 매몰은

본국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가장 큰 전재지변의 재난으로 기록되어있다.

이어 다음 해에 있었던 수도 로마의 대화재와 전례 없는 전염병이라고 불리는 전염병이

화재의 다음해애 일어나 진두지휘하던 티투스 황제가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피로가 쌓였다고 판단 할 밖에 없을 것 같다.

 

티투스가 치세 2년 만에 죽음을 맞이하고 황제를 물려받은 사람은

아버지의 후계자선정에 따른 동생 도미티아누스다.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나 형인 티투스 황제가 가지고 있는

군인으로서의 실전경험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지방출신으로 군에 들어가 바닥부터 올라온 베스파시아누스황제는 속주국의 임지에

장남인 티투스는 데리고 다니면서 군대의 경험을 쌓이게 하였지만

작은 아들인 도미티아누스는 수도 로마에 두고 질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게 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자칭할 무렵 로마는 유대와의 전쟁을 벌였는데

본인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대기하고 있으면서 실제 유재와의 전쟁은

장남인 티투스가 전권을 위임받은 장군으로서 승리로 이끌게 할 정도로 경험을 쌓게 하였고

황제가 되어서도 장남은 공동 통치자로 지명하여 황제 수업을 미리 받게 하였지만

도미티아누스는 형인 티투스 황제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준비 없이 황제가 되었다.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도미티아누스는 황제로 즉위하곤 독단과 독재의 정치를 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와 형과 비교하는 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서

더욱 잘 하기 위한 의욕이 앞서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경험이 부족한 상태의

실정과 공포정치를 이어간다.

 

서기 96918,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암살되었다.

155일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 45세에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원로원 내부의 반대파나 속주의 불만이 아니고 아내 도미티아 황후를 모시는

해방노예가 침실에 침입하여 빗장을 걸고 암살하였다.

죽음 뒤에 호위병들이 달려와 암살자들을 현장에게 모조리 죽였다.

저자는 이후의 처리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도미티아누스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에 원로원은 횡재라도 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당장 회의가 소집되고, 그 자리에서 모든 대책이 결정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근위대만이 아니라 국경을 지키는 군단에도 인망이 있었기 때문에

일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구구의 의향에 따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황제로 지명된 네르바에게는 즉석에서 황제에게 주어지는 모든 권한이 인정되었다.

공식으로 고마 황제의 지위에 오르려면 원로원의 승인이 필요하다.

원로원은 재빨리 네르바를 황제로 승인한 것이다.

게다가 죽은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기록말살형에 처한다는 결의까지 해버렸다.

근위대나 군단의 움직임을 미리 봉쇄하자는 것이 기록말살형의 진짜 이유었을 것이다.

왕제 암살의 주모자가 누구인지는 문제 삼지도 않았다.‘

 

견제와 상호보완이라는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에 그리고 도미티아누스의 아버지가 만든

황제법이 있음에도 원로원은 이렇게 일사천리로 다음 황제를 승인하고

기록말살형이라는 결의까지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분명 황제의 독선과 독재에 불만을 품은 원로원 의원이 많았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된 기록말살형은 무엇인가?

채의 내용을 빌면 이렇다.

로마 제국에는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라는 형별이 있었다.

의역하면 기록말살형이 될까.

원로원에서 원고측이 고발 이유를 진술하고 피고측 대리인인 변호사가 변론을 전개한 뒤에

비로소 의원 전원이 판결을 내리는 정당한 재판 절차를 거쳐야만 성립되는 황제 탄핵제도로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조치가 내려진다.

(1) 유죄 판결을 받은 황제의 조상(彫像)은 모두 파괴한다.

(2) 모든 공식 기록, 비문, 통화에서 당사자의 이름을 삭제한다.

(3) 그 황제의 자손은 대대로 프라이노맨(개인 이름)으로 인정받은 임페라토르를 사용할 권리를 박탈당한다.

(4) 황제의 치세 중에 이루어진 잠정조치(원로원 의결을 거치지 않고 발표된 칙령)

모두 폐기된다.

 

당시까지 이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황제는 네로에 이어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두 번째로

이들은 황제묘에 묻히지도 못했다고 한다.

 

도미티아누스의 구원투수라고 불리는 네르바 이후 다섯 명의 황제를 후세는

오현제(五賢帝)라고 부르게 되는 데 네르바가 제위에 오른 96년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가 사망한 서기 180년까지를 로마역사에서는

오현제 시대라 부른다고 한다.

 

70세에 재위에 오른 네르바 황제는 1년 뒤 44세의 트라야누스를

입양형식으로 후계자로 지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14개월의 짧은 치세를 하고 이어받은 트라야누스 황제는 이베리아 반도 남부,

즉 첫 속주 출신의 황제지만 사회적 지위나, 군사경험, 연륜도 흠잡을 데 없는 인물로

아주 짧은 기간 치세를 한 네르바가 오현제에 포함된 이유는 오로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고른 한 가지 업적 때문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December 13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