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동경의 대상이었던 여학생이 있었다.
아버지는 항공회사 회사 해외시자에 근무하고 있었고
그 여학생과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 둘 그렇게 넷이 살고 있었다.
그 여학생은 어릴 적 고전무용을 배워 목과 머리를 좌우로 움직일 수 있는 재능이 있었고
약간은 각진 듯 둥근 얼굴이었지만 하얀 피부가
늘 까맣던 나에게는 호기심의 여학생이었다.
집에는 성능 좋은(정말 좋은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없었기에) 전축이 있었고
내가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리기도 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
그 노래 제목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알게 된 영어 노래제목이었다.
아마도 그 여학생을 좋아 했던 것 같았다.
아니 좋아했다. 늘 마음속으로만.
그렇지만 좋다는 내색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아주 작은 키에 학교성적도 그리 좋지 않는 나
그녀는 다른 계급의 사람으로 여겼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와 그녀 집 주위에 맴돌곤 하다가
그녀의 엄마가 필요하다는 일을 서슴없이 도와주기도 하였다.
벽에 못을 박을 일이나 혹 뭐라도 고장이 나면
그래도 내가 남자라고 나서서 해결해 주곤 하니까
그녀의 어머니는 필요한 일이 있으면 찾았고
나는 한 걸음에 달려가 해결하였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를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인도인가에 근무한다고 들었지만
“거기서 똥 푸는 일 하냐?”하며 놀리곤 하였다.
그러던 한해 년말 쯤 그녀의 아버지가 집에 왔고
그녀의 어머니가 남편에게 이야기 하였다.
“저 녀석이 당신에게 통 푸는 일 한다고 놀리는 놈이라우”
나는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숙이고 껄껄껄 웃는 소리를 들어야 했었다.
하얗고 예쁘게 생긴 그녀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선생님도 여학생도 그리고 남학생들도 가능한 접근하려는 노력을 하였고
어쩌면 나는 그녀의 집을 하시라도 드나들 수 있다는 것에
자랑스럽게 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 졸업식 날
졸업식을 끝내고 늘 그렇듯이 부모님을 돕기 위해 철가방을 들고 배달을 하고 있을 때
내가 좋아하는 수학선생님이 “송짱!” 하고 부르신다.
돌아보는 순간 아뿔사!
수학선생님 옆에는 손 한번 잡아보지 않은 내 첫사랑의 여인과 그녀가 함께 있었다.
선생님이 손짓으로 부르신다.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숙이고 다가가자
“너 얘가 좋아 아님 얘가 좋아?”
한 번은 그녀의 어머니가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권식아! 미안해서 어쩌지? 필요하면 널 자꾸 부르게 된다.”
속으론 “나야 영광 이지요. 더 자주 불려 주세요.”했다.
내가 결혼을 할 때
그리고 첫 아이의 아빠가 되었을 때
그녀에게 전화를 했었다.
“나 결혼한다.”
“나 아빠가 되었다.”
얼마 전에 다른 동창을 통해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결혼하지 않다가 일본에서 결혼을 했고
돈도 많이 벌어서 어머니 아버지 잘 봉양하고 있다고...
요즘 그녀의 어머니 말씀이 귀에 맴돈다.
“권식아! 필요할 때마다 자주 불러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나야 영광이지요. 매일이라도 불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