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 - 김연

송삿갓 2013. 4. 17. 23:55

나도 한때 저 소년처럼 자작나무를 휘어잡았었지.

그래서 나는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근심이 쌓이고

인생이 길도 없는 숲속 같고

얼굴에는 거미줄이 걸려서 근지럽고

그리고 작은 가지에 눈을 맞아

한쪽 눈에서 자꾸만 눈물이 흐를 때

더욱 더 어린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와서

새로 출발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운명의 신이 일부러

나의 소원을 반만큼만 들어 주셔서

나를 아주 데려가 다시는 못 돌아오게 하시지는 않을 거야.

세상은 사랑하기에 좋은 곳,

나는 어디에 이 세상보다 좋은 곳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자작나무를 기어오르듯 살고 싶어라.

하늘을 향해, 흰 눈이 덮인 거무스레한 줄기를 타고 올라

자작나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올랐다가

줄기의 끝이 휘어져 다시 땅 위에 내려서듯이 그렇게 살고 싶다.

돌아감도 돌아옴도 다 좋은 일이다.

자작나무를 흔들어대는 꼬마보다도 훨씬 못한 삶을 살 수도 있으니까.

 

자작나무, 로버트 프로스트, 시집 ‘휘파람새’ 중에서

 

이 소설은 386세대의 이야기다. 386이라는 용어는 원래 PC에서 사용하는 Intel사의 CPU 명칭에서 온 것으로 86, 286, 386, 486 등으로 진화되는 과정에서 나온 숫자이지만 90년대에 30대의 젊은이들에게 386세대라 하였다. ‘386세대’라 함은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의 학번으로 1990년대에 30대 나이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뜻이다.

 

386세대의 첫 주자들은 1979년 10.26에 현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이 총격에 의거 서거하고 혼란의 틈을 타 12.12라는 사건으로 전두환이 군부를 장악한 상태에서 대학에 입학하여 3개월이 지나지 않아 5.18로 휴교되었고 8월에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제 5공화국에 대학시절을 보낸 사람들로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20대에 경험한 사람들이다.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대학생 혹은 대학졸업이라는 학력과 신분을 숨기고 생산현장에 위장취업을 하여 노동운동을 하며 노동조합을 설립하도록 유도했던 시절로 이 소설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의 주인공들은 진보적 가치를 내걸고 노동운동의 이끌었던 사람들이다.

 

등장인물

수민 : 노동운동을 하다 선배(철호)와 결혼하였지만 노동운동에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몇 차례 유산을 시키다 임신한 상태에서 갈등을 겪다 남편과 이혼을 하여 희민이라는 딸을 낳아 혼자 키우는 여자로 술집으로 재산을 모은 어머니가 재산을 물려줘 조그만 카페를 운영하며 하는 여자다.

 

인실 : 학창시절에 ‘로자’라는 별명으로 투철한 노동운동가로 학업을 중단하고 위장취업으로 열렬 노동자였지만 수민과 마찬가지로 선배 노동운동가(영수)를 만나 딸 둘을 낳은 딸딸이 엄마다. 그러나 아들을 선호하는 시어머니와 남편 영수에 갈등과 번민을 하지만 집 살림에 전혀 관심이 없고 노동 운동만 하면서 아무런 경제적 도움을 받지 못하여 딸 둘을 친정엄마에게 맞기고 과외로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는 여자로 번민과 갈등으로 알콜 중독자가 되기도 한다.

 

‘로자’는 1910년대 독일 베를린에서 무장봉기의 선봉에 서다 군에 의해 체포되어 살해되고 란트베르 운하의 리히텐슈타인 다리에 버려졌다가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세계 노동운동의 불씨를 지핀 여전사로 소개되어 있다.

 

영도 : 수민과 인실 수민의 선배이자 남편 철호, 인실의 남편 등의 선배 운동가로 어느 날 폐암선고를 받아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는 노동운동가다.

 

이 소설은 수민이 딸 희민을 데리고 강원도 산골로 여행을 떠나는 과정으로 시작된다. 지난날 열렬한 노동운동가였고 선배 노동운동가와 결혼을 하여 임신을 하였지만 노동운동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남편, 운동이냐 한 엄마로 살 것이냐의 갈등 끝에 남편과 이혼을 하고 딸 희민이를 낳아 키우지만 당시까지도 노동운동을 하는 옛 동료들의 질시와 비난 그리고 부분적이지만 성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번민과 갈등을 하다 자신을 돕는 예전 후배 노동운동가에게 자신의 비즈니스를 맞기고 딸과 훌쩍 여행을 떠나곤 한다.

 

수민은 이제 막 말을 배워 의사표현을 하는 딸의 의사를 무시하고 딸 희민이를 데리고 여행을 한다. 여행을 하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이키며 깊은 상념에 빠지기도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

 

수민은 저도 모르게 아, 하는 감탄사를 내지르고 말았다. 창유리 건너편 외등 아래는 미끈하게 잘 뻗은 자작나무 숲이 하얀 수피를 드러내며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산골 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보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구절마다 자작나무가 들어가는 시를 읊조리며, 산 너머에 평안도 땅이 보이지

도 않는데도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로구나 행복해하며 팔짱을 낀 채로 계단참에 서 있었다. 하얀 수피를 드러내며 하늘로 곧게 쭉 뻗어 있는 자작나무 숲을, 눈보라를 일으키며 마차가 달리던 영화 <차이코프스키>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아침, 쏟아져 들어오는 환한 햇살과 새 소리에 눈이 떠졌다. 벌떡 일어나기가 아쉬워 손을 뻗어 원시림의 숨결이 느껴지는 통나무를 만지며 숨을 크게 들이쉬어 수민을 둘러싸 고 있는 나무들의 진한 내음을 음미했다.

 

다른 옛 동료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조금 넉넉한 덕분에 혼자서 딸을 키우지만 여유를 부릴 수 있는데 반해 인실은 그럴 여유조차 없다. 선배와 결혼하였지만 딸을 낳았다는 것 때문에 시집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고 남편으로부터 외면 받는 딸딸이 엄마, 아니다 남편으로부터 외면 받는 정도가 아니라 노동운동을 한다고 한 푼도 집에 가지고 오지 않는 것에 부족하여 남편의 입신양면을 위해 희생을 강요당하기까지 하지만 ‘로자’라 불리웠던 과거의 자신 때문에 한 마디의 불평이나 불만을 이야기할 수 없다. 오히려 산업전선에 뛰어 들어야 하기에 자신과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것에 가슴 아프지만 딸 둘을 형편이 여의치 않은 엄마에게 내 던지고 살아야 하는 고달픔에 지치고 쓰러지고 싶은 마음에도 딸을 키우는 친구 수민을 부러움과 안쓰러움에 속내를 쏟아 내고 듣는 동무다.

 

소설 속에서 인실의 고민을 알 수 있는 이런 부분이 있다.

자유란, 늘 달리 생각하는 사람의 자유란 로자의 명제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 자식을 낳아 기르고 그것들이 크는 것을 지켜보며 만족해하는 그런 삶이 아니라 뭔가 다른 것, 자신이 꿈꾸고 있는 이상을 위해 한평생을 헌신하다 죽어가는 것, 그러면서 난 정말 행복했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되길 소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꿈은 지금 어디에서 표류하고 있으며 무엇이 인실의 그 꿈을 꺾이게 만들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싶다는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도 사회라는 관계 속으로 들어오면 너무나 왜곡되고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앗을 봐서라도 꼭 자기 핏줄을 타고 난 자식을 얻어야 하고, 그리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한 가족에 아들 하나씩은 있어야 하고……. 이쯤 되면 자식은 사랑의 산물이 아니라 욕심이나 집착일 것이다.

 

인실이 집을 돌며 과외를 시키는 대부분 가정의 엄마들은 주문한다. “다음 달까지 혹은 다음 시험에 우리 아이가 수학에서 만점을 맞게 해달라.” 그것이 자신의 몫이 아니고 학교와 학생 본인의 노력여하에 따라 달려 있음에도 그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며 과외선성의 부족으로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세상, 그러한 것이 그들 방식의 자식사랑인가? 아니면 욕심이나 집착일까?

 

수민의 남편 철호는 아내가 아이 낳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이혼을 하였고 노동운동을 쉬지 않지만 자신의 핏줄에 대한 연민이 있음을 거부할 수 없다. 그럼에도 노동운동가라는 의무 혹은 체면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며 이혼한 아내와 딸 주변을 맴돌기도 한다. 그러한 반면 인실의 남편 영수는 일반가정을 꾸려가는 사람들로써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노동운동가다. 자신의 딸들을 외면한다. 딸이기 때문이다.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비법을 찾아 아내에게 아들 낳을 것을 종용하는 남아선호사상을 굽히지 않는 노동운동가, 가정의 경제적 문제는 노동운동가이 자신과 무관한 것에 부족해 아내가 어렵사리 모아 놓은 것을 서슴없이 강탈해 가듯 한다.

 

철민과 영수의 젊은 시절의 생각 그리고 지금도 가지고 있는 사상을 잘 표현한 부분은 이렇다.

 

돈을 벌기 위한 자본주의의 상인들이 그리고 그러한 메커니즘을 조종하는 하부구조가, 그곳에 들어가 커피와 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에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젊음을 요구한다는 것은. 젊음을 순간이나마 되돌려 받고 싶어 그곳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철호가 이곳에서 대학을 다니던 때에도 록카페란 것이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있었을지도 모른다. 도통 그런 데 관심이 없었으니까. 관심을 가졌던 것이라곤 뒷골목의 어떤 술집이 고래고래 노래를 불러도 주인이 눈감아주고, 외상을 잘 해주고, 안주는 안 시키고 술만 축 내도 눈치를 주지 않는가 하는 것 뿐이었으므로.

과거를 추억하는 세대가 되었다는 건 기성세대에 편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중년을 바라보는 사내가 되어 먹물보다 더 진한 빛으로 촘촘히 배겨 있던 머리카락을 거슬러 올라 성긴 앞머리칼을 쓸어 올린다. 장미 향기가 코끝을 스쳤던가. 이 거리엔 꽃집들도 많다. 옛날에도, 철호가 학교를 다니던 때에도 투명비닐에 싸인 붉은 장미 한송이를 든 여자들이 정문 앞에 서 있곤 했다. 늘 배어 있는 젊음 주변의 최루탄 연기에 새된 기침을 하면서도 그녀들은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도 학교의 한쪽에선 연극 공연이니, 음악 연주회 같은 것 들이 다른 세계처럼 늘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그녀들은 거기에 출연하는 친구나 연인에게 꽃을 전해주고자 함이었으리라. 그때는 그 여자들이 무슨 용무로 꽃을 들고 서 있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 만큼 마음의 여유도 없었거니와, 조건 좋은 남자의 마음에 쏙 들어 어떻게 하면 시집가서 잘 먹고 잘 살까가 오직 생의 의미이자 목표인 여자들이란 점에서 철호에겐 모두 하나였다.

다른 세계에 살았던 그 사람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혹 모른다. 그때 아름다운 여인이 주는 장미꽃을 가슴에 안고 행복해 하던 그들의 친구나 연인들이 지금은 병상에 누워 있어 그녀들은 다시 이 거리에 꽃다발을 들고 나타날지도.

 

젊음, 그들의 눈에 보이는 기성세대는 온통 부패하고 순리에 맞지 않는 생활만으로 가득한 삶으로 보여진다. 그렇지만 세월이 흘러 그 젊은이들이 기성세대가 되고 그 때의 젊은이들은 기설세대를 부패와 타락의 집단으로 내 몰아야 할 대상이 되는 순환 고리는 계속되어진다.

 

흐드러지던 진달래가 사그라들 쯤이면 찔레꽃이, 그 찔레 꽃 흰떨기는 다시 붉은 장미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한여름 위대한 붉은색으로 세상을 물들였던 장미꽃 이파리가 분분히 날린 자리엔 코스모스가 온 천지에 하늘거렸다. 거기엔 늘 다근 세상이 펼쳐 있었지만, 코스모스마저 사라지고 마른 볏단만이 빈 들판을 지키고 있던 그 아침은 더욱 특별했다. 은세계였다.

 

이게 세월이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세월이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 소설에 재미있게 표현한 부분이 있다. 수민과 철호의 대화다.

한동안 록카페란 말이 유행하더니 이제 그것도 한물 간 걸까. 수민이 언젠가 이런 의문을 철호 에게 던졌었다. 내가 록카페에 들어가면 입구에서 받아줄까? 철호는 무심히 대꾸했다. 돈만 있으면 어디든 들어가는 거지, 못 들어가는 데가 어딨어? 그러자 수민이 어이없다는 듯 코방귀를 뀌었다. 그런 데는 돈 있어도 안 된다구요, 물 버린다고 나 같은 중년여자는 아예 문 밖에서 쫓아낸 다구!

 

수민은 여행을 하면서 피하는 곳이 있다. 바로 전 남편 철호와 함께 하였던 그러니까 노동운동 할 때 도피생활을 하거나 혹은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을 피하곤 하였지만 딸을 데리고 그곳을 찾는다. 그곳이 바로 “세월리”

세월리다. 다시 세월리에 온 것이다. 남한강 맑은 물이 넓은 모래톱을 일구며 유유히 흐르는 곳. 마음을 씻을 수 있을 정도로 강물이 맑았다는 세심리와 달 모양을 닯은 마을 월리가 합쳐서 이뤄진 곳. 세월리. 수민은 잔잔한 물결과 세월에 씻겨 곱게 다듬어진 아담한 돌멩이들보다도 그 이름을 더 사랑하는지 모른다. 때묻지 않은 순결함이 깃든 그 유순함과 소연함이.

얌전히 여태 잠들어 있는 아이를 시트에서 내려, 아이를 안고 세월리 강변에 선다. 눈가로 말간 액체가 흘러내린다. 마음보다도 눈이 먼저 그 슬픔을 알아챈다. 언제쯤, 이곳 에 섰을 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지 않을까......

아이가 부시시 눈을 뜨고 먼저 엄마의 얼굴을 확인한 다음 달라진 풍경에 눈길을 준다.

"엄마, 여기가 어디야?"

아이의 물음에 수민은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한다.

"희민아, 오늘이 무슨 날인 줄 아니? 우리 희민이가 세상에 나온지 꼭 두해째

되는 날이란다."

세월 리가사람을 슬프게 만든다고, 아이 때문에 목놓아 울 수도 없는 수민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심호흡을 한다.

 

프로이드 사상을 재해석하였던 프랑스의 정신 분석학자 자크 라미에밀 락캉이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한 예를 들면 어린 아이가 어떤 행위를 하면 부모가 좋아하기 때문에 더 잘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걸음마를 시작하면 부모가 좋아하고 뛰기 시작하면 또 좋아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며 또 좋아하기에 좋아하는 모습을 보기위해 더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기에 나도 노력한다는 것인데 톨스토이가 인생론에서 주장하는 “인간은 자기의 행복을 희구하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것과 상반된 견해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 수민, 인실, 철수 영수 등은 누구를 위해 왜 노동운동을 하였는가? 그리고 수민과 인실은 노동운동을 포기하고 왜 세상의 삶 속에서 번민하고 번뇌하는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 자신의 행복? 아니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인가?

 

수민이 여행 중에 만난 자작나무 숲을 보며 프로스트의 시를 읊는다.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

또 타고 싶은 마음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시들해지고

인생은 길 없는 숲 같아

거미줄에 얼굴이 근지럽게 달아오르고

한 눈은 가지에 스쳐

눈물이 흐를 때면

잠시 땅을 떠났다가

돌아와 새 출발을 하고 싶다.

...... 자작나무 타는 일은 괜찮은 일이다.

 

소설은 끝 부분에 수민은 이런 다짐을 한다.

이제 내 눈으로 세상을 보자고. 인간은 자율적이고 주체적이어야 한다고 그렇게 외쳤으면서도 정녕 자신은 세상에 두 발로 서 있었던가. 배려란 이름으로 끊임없이 그의 눈치를 봤고, 실천이란 이름으로 그와 행동을 같이 했었다.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운동권의 사상논쟁에서도 수민은 언제라도 한 번 자신의 목소리를 가졌던가. 그가 보는 대로 이 사회의 물적단계를 보았고, 모순 관계를 보았고 그의 평가대로 인간들을 재단했으며 그가 받아들인 사상을 수민의 것인 양 행세했었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었다고,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했었다. 이제 이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 두 발로 세상 속으로 걸어가겠다고.

 

내가 힘껏 달리고 있다는 변명 더 빨리 가려는 차를 막아선 안 되고, 조금 늦게 간다고 원등을 켜고 달려들거나 경적을 빽빽 울릴 건 없다고, 속도가 느린 차는 느린 차대로, 빨리 가는 차는 또 그대로 달리면 되는 거라고 수민은 마음자리를 바꿔먹는다. 모두 다 빨리 달릴 수 있는 건 아니므로. 이제 더 이상 강한 자의 역사에 어떻게든 끼어 볼려고 몸부림치지 않으며, 생명을 낳고 기르는 여성이란 성을 담담히 받아들이리라. 아이가 엄마, 엄마, 하고 부를 때마다, 제 옆에서 잠든 아이를 볼 때마다, 엄마란 자신의 존재를 새삼 확인하고 가슴 가득 차오르는 행복이란 감정을 느낀다. 내가 정말로 엄마가 되었구나.

이제 돌아가리라. 생명 있는 것들이 살아 숨 쉬는 시원의 그 자리로. 엄마의 뒤통수만을 바라보며 그 먼 길을 함께해준, 손가락을 빨며 잠이 든 저 아이랑 다시 시작하리라. 둘이서, 손을 꼭 잡고. 눈앞을 가로막는 짙은 안개를 만나더라도, 강한 폭풍우에 휩싸인다 하더라도,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하더라도 이제 더 이상 움츠러들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리라. 같이할 든든한 길동무가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