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에 1999년 5월
한국을 떠나는 비행기를 탔다.
공항까지 배웅을 나오시겠다며
옷자락을 붙잡는 어머니를 부리치고
그러면서 슬픔을 감추려고
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고서도
나오려는 눈물을 말리려
앞을 보는 시간보다 하늘을 더 많이 바라보며
2주 뒤에 따라오는 가족을 두고
홀로 먼저 한국을 떠났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고 계실 동네 부근을 지날 때
참아 왔던 설움과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다짐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주변의 가족들에게 너무너무 미안하지만
이제는 한국에 올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시는 한국을 그리워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국가는 정의 편이 아니고
약자의 편도 아니고
법은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그래서 갈기갈기 찢기는 상처를 준
대한민국은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렇게 2 Way가 아닌 1 Way 비행기를 타고 떠났다.
미국에 살면서 한국을 잊으려 했다.
여기의 삶이 고통과 아픔이 있어도
한국을 그리고 한국에서 있었던 일을 잊으려 했다.
죄 지은 것도 없으면서
아니 내가 가장 당당하다고 나를 다지면서도
어쩌다 한국에서 특히 회사를 다니면서 맺어왔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쿵쾅거리고 걷잡을 수 없는 흔들림 속으로 빨려들었다.
어려움에 처한 나를 아예 알지 못하듯
자신들의 생활을 즐기는 듯 함에
서운함과 번뇌, 후회라는 마음이
갑자기 불어오는 폭풍우처럼 나를 흔들어 댔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몸에 견디기 힘든 주사를 맞고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는 주의를 들으며
홀로이 누워있는 병실에서도
내가 겼었던 그 사건, 그 일을 생각하면
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방에 갇혀
온 몸을 조여 오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하였다.
그 때 나의 희망이
바늘 같은 작은 희망의 빛이라도 있다면
그리고 오늘은 제발 어제 보다는 더 나빠지지만 안는다면
견디고 다시 일어 설 수 있겠다고 다짐하는 기도를 하곤 했었다.
그렇지만
나에게 주어진 빛은 없었다.
나날이 좋아지기는커녕
더 깊은 계곡으로 빠져들며
온 몸과 마음이 모래알처럼 작아지며 공포에 떨곤 했었다.
그럴수록
나를 버린 조국
정의가 없고 불평등한 법이 있는 나라 한국,
돌아기지 않겠다고
날카로운 칼로 나무에 아주 깊이 글을 새기듯
내 맘에 새겨 넣었다.
그렇게 다짐했음에도 한국을 가야 할 일이 생겼다.
남은 재산을 정리해야
처가를 비롯한 내 주변의 사람들과의 소송을 해제하겠다는 것에
장인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얼마 되지 않은 아버지의 재산을 어머니에게 정리해 드리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국 방문은 일의 목적을 이루면 바로 돌아오곤 하였다.
장인의 위독 때는 10여일
아버지는 내가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 있을 때 운명하여
장례를 치루고 처리할 일들을 하고나서
어머니 혼자 집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에
조금 더 위로를 해 드리고자 4주,
나머진 2박 3일 여정으로 한국을 다녀왔던 것 같다.
(몇 번을 갔는지 갈 때마다 얼마나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한국에 갈 일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그리고 장모님이 돌아가실 때로 딱 두 번이라고 계획하고 있었다.
올 들어 계획을 바꾸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모든 것을 정리하여 편히 쉴 곳으로 모시기 위해
내년쯤에 한 번 방문할 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할 경우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가지 않겠다는 계획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나는 그렇게 한국에 가지 않으려 애를 써왔다.
경제적이나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닌데
누군가 “한국에 왜 자주 가지 않으세요?”라고 물으면
“시차적응에 어려움이 많아서요.”라는 대답으로 얼버무렸다.
June 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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