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는 매우 가난하시다. 어렸을 때고 그러셨고 우리를 키우면서도 그러셨다. 지금 역시 매우 가난하시다. 한때는 부자였던 적도 있지만 모두 남에게 사기 당하고 날려 버리셨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돈 벌겠다고 서울에 오셔서 시작한 일이 중화요리집이다. 나중에는 물만두라는 한 음식에 대한민국의 최고 권위자가 되셔서 이름을 날리기는 하셨지만 지금은 연세가 드셔서 그도 못하고 초야에 묻혀서 자신의 용돈을 벌고자 운전을 하신다.
일 하면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치시고 결혼을 하여 가장이 되었지만 가정을 돌보기 보다는 시골의 부모와 동생들 뒷바라지에 젊음을 보내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다. 막내 작은 아버지는 나보다 2달 반 늦게 태어났다. 그래서 어머니는 두 아기를 같이 키우셨다. 당시에 아버지에게는 아내가 필요 하였다기 보다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양할 주부가 필요 하였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4살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두 가정의 가장이 되었지만 어머니와 동생들 부양이 우선이었다. 어머니와 우리(내 동생들 둘)는 외갓집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그러다 초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아버지가 계신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 이사하여 살게 된 곳이 지금 올림픽선수촌 아파트가 있는 오금동이라는 동네였다.
6평의 방 두개짜리 공동 화장실을 써야 하는 조그만 집
그게 내가 알기로 아버지가 당신의 이름으로 가지고 살았던 유일한 집이었다. 그 당시도 아버지는 거의 집에 자주 오시지 못했다. 시골에 있는 할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일을 더 많이 해야 했고 상당한 돈을 벌고 계셨던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난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와 시댁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남편이 있지만 우리를 부양하기 위하여 일을 하셨다. 지금의 잠실 지역 허허벌판에 배추를 심고, 뽑고 그런 일을 하셨다.
아마도 그때부터 나는 남보다 잘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물론 성격은 남과 어울리지 못하는 어쩌면 병적인 내성적 성격으로 변하고 있었고 그런 나를 동생이 보호 했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가 무능하고 무책임 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는 아버지와 같이 되지 않겠다는 각오를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밖에 할 수 없었다. 내 동생의 힘이 필요해 동생과 함께 했는데 동생이 어머니에게 자랑스럽게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하자 어머니는 같이 빠져 죽자고 우물로 데려 가셨다.
어머니은 “내가 큰놈 너는 바르게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거늘 고작 아이스크림 장사나 해서 어떻게 이 종가집의 장손이 되어서 큰 가정을 이끌어 가겠느냐”는 탄식을 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 일어설 수 없을 정도 매맞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서야 어머니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5학년 때 아버지는 직접 중화요리집을 하겠고 이제는 가족과 함께 살 것을 선언하셨다. 내 기억으로 아버지와 한 집에서 같이 살게 된 시작 이었다. 아버지는 그 때 나에게 어른 대접을 하면서 중국인의 대륙성 기질을 말씀하셨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그리고 크고 넓게 생각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남을 위해서 자기 목숨도 버리는 중국인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아들인 나도 그러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에 대한 인식은 그때부터 서서히 변했다. 그래도 아버지를 닮지 않겠다는 나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중화요리집을 개업하시고 장사가 아주 잘 되었다. 원래 솜씨가 좋다고 하여 여러 사람들이 아버지의 가게로 몰려왔다. 멀리서도 끊이질 않고 몰려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부자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끊임없이 남을 주셨다. 어머니는 반대하셨지만 아버지는 주변의 못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내 주셨다. 다른 사업도 시작하셨지만 본인의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인수하여 운영을 하시면서 모든 적자를 감당하셨다.
큰 집을 짓게 되었다. 어머니나 우리는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각자가 방 하나씩은 물론 손님 방까지 있어 우리는 대궐이라 부르고 거의 매일 현장에 가 보곤 했었다. 그러나 거의 다 지었을 무렵 짓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팔아버렸다. 그 동안 많은 돈이 들어갔는데 그런 것이었다. 어머니는 고발해서 혼내주어야 하고 돈을 찾아야 한다고 하셨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셨다. “오죽하면 그랬겠냐”는 말씀이셨다.
가난 했을 때는 아는 체 안하던 많은 친척들이 몰려들었다. 내가 모르는 친적들도 많이 나타났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아무도 거부하지 않았다. 물론 어머니나 가족들은 옥석을 가려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지만 아버지는 그 의견을 무시했다. 그러는 중에 나는 아버지와 같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다. 그러다 아버지는 결국 어느 정치가에게 전 재산을 헌납해야 하는 중대실수?를 범하셨다. 그 중대 실 수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그에 대해 우리는 저항할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로 인해 집은 급격히 기울어 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를 지켜보기 위해 몸부림 쳤지만 버티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결국 집을 떠날 수 밖에 없으셨던 것 같다. 잠적하셨다. 가족은 아버지를 찾고자 하였지만 찾을 수 없었다. 흔히 많이 듣는 빚쟁이들의 시달림을 어머니 혼자 감당 해야 했다.
대학교 입학금 내러 가는 중에 차 안에서 옆 자리에 앉아 주무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다가 흰머리가 많아진 아버지가 늙으셨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아버지도 세월의 흐름 속에서 변해가시고 그에 대해 나는 부모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내가 두 번째로 아버지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아버지가 집을 떠나셨을 때였다. 나는 절대 아버지 같이 되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지면서 30여년을 살아 왔건만 나는 아버지의 세월 앞에 그리고 아버지의 어려움 앞에 아무런 힘이 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보이게 되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보다 낳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버리신 잔재의 방패가 되기 위해서 혼신을 다하셨다. 물론 나도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은 하였지만 어머님은 종손에 험이 되서는 안 된다는 논리의 완강한 거부와 경제적인 문제로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나는 아버지가 안 계신 종가집의 형태는 좋지 않다는 생각과 친인척들의 “장남이 뭐 하느냐는 비난(그들이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서 그런 사람도 있고)에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아버지를 찾고자 했으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간간히 들리는 이야기로 정부와 타협하고 외국으로 가셨다는 이야기도 들렸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아주 우연한 기회에 아버지가 계신 곳을 포착 하여 단숨에 달려가 아버지를 만났다. 힘없이 혼자 계시는 아버지를 발견하곤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너 혼자만 알고 있다면 당분간 다른 가족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교회를 다니고 계셨고 교회를 지으셨고 온갖 교회를 위하여 살고 계셨다. 버는 돈의 대부분은 교회에 헌금하시고 남은 돈은 방바닥의 장판 밑에 두셨다. 그리곤 나에게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장판을 들고 가지고 가라 하신다.
아버지를 약2주에 한 번씩 보러 다녔다. 회가 거듭할수록 아버지의 삶을 알게 되었다. 교회를 다니고 계셨고 교회를 지으셨고 온갖 교회를 위하여 살고 계셨다. 버는 돈의 대부분은 교회에 헌금하시고 남은 돈은 방바닥의 장판 밑에 두셨다. 그리곤 나에게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장판을 들고 가지고 가라 하신다. 아버지는 나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어렸을 때 시계추처럼 다닌 교회 말고 아는 것이 없는 나는 순간적으로 사회문제가 되었던 구원파와 관련된 종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졌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 하셨다. 그러면서 그곳에 정착하게 된 것과 교회를 다니게 된 계기를 말씀하셨다.
답답한 마음에 집을 떠나 이곳을 지나다 타다 남은 다 쓰러져 가는 집을 보고 발길이 옮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에 가 확인을 하니 교회가 있었던 자리인데 불이 나서 교회는 떠나고 저렇게 폐허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갑자기 그곳에 정착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셨다 한다. 그래서 움막을 짓고 거기서 살면서 그 근처의 회사에 트럭운전기사로 취업을 하고 하나님을 영접하여 교회를 다니게 되고 사는 움막에 작은 예배당을 지어 헌납하고 주일날 교인들을 위하여 봉고를 운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가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의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감사하다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나에게도 교회에 같이 갈 것을 말씀하셨다.
나는 교회는 싫다고 단호하게 말씀 드렸다. 덧붙여 내 앞에서 절대 교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말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아버지는 알았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까지 살면서 아버지와 같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은 하였지만 아버지를 거역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 또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반대를 안 하셨다. “종손이 생각하고 결정하는 일인데” 하면서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고 나의 일에 항상 찬성과 신뢰를 보내셨다.
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세 번(순전히 내 기억으로) 아프게 한 적이 있다. 한번은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입학원서를 쓰는 시기인데 학교에서는 입학원서를 써줄 수 없다고 하면서 아버지와 상의 하겠다고 하였다. 3학년 1학기 식목일 경에 수업거부(학교의 횡포에 대항하여) 데모를 하였는데 내성적이었던 내가 학생회의 간부들과 같이 주동하였다. 내가 주동 하였다기 보다는 내 방을 토의 장소로 제공한 것이 주동의 일원이 되었고 다행이 육성회간부 이셨던 아버지의 위상을 보아 별다른 징계 없이 경고만 받고 끝났었는데 그 일이 고등학교 입학원서 쓰는데 장애가 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나무라지는 않으셨다. 학교에 가서 자라는 학생이 고등학교는 꼭 가야 한다며 간곡한 부탁을 하여 한양공고 야간 전자과를 지원하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인생행로(컴퓨터를 하게 되는)에 중요한 결정이 되어 버렸다. 그때 아버지는 당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아들이 학교에서는 문제가 되어 고등학교도 가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상당한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서 남들처럼 대학에 가곤 하는 평범하지 않은 아들의 미래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셨다. 그래도 아버지는 나에 대해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게 아들에 대한 배려요 믿음의 표시라 생각 하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왜? 학교에 육성회 간부라 하여 많은 돈을 기부하는데 우겨서라도 인문계에 입학을 하도록 해야지 그냥 물러 섰느냐”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비난 하셨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에 대한 애정의 표현을 달리 하셨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입학하여 다니는데 다른 학생은 학교에서 오는 시각에 학교에 가야 하는 나는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학교에 가면 나보다 나이 많은 직장에 다니는 학생들 그리고 검정고시 출신들이 더 많았고 시간만 나면 담배, 술, 여자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환경이 싫었고 그런 세상을 모르던 나는 더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내성적인 성격은 더 내성적이 되고 혹 대인 기피증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되어 갔다. 3월말에 첫 시험을 보고 결과가 나왔다. 약 60명중 13등이라는 성적은 나와 아버지를 당혹하게 하였다. 공업고등학교의 야간에서 13등 이라는 석차는 내가 당시에 얼마나 학교에 관심이 없었는지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걱정은 대단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 같다. “인생에 있어 대학이 전부는 아니다. 좋은 기술을 가지면 그만큼 대우 받는다. 그리고 공고라 해서 대학에 못 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내가 들어보니 너희 학교 졸업하고도 사관학교도 가고 대학에도 많이 간다고 하는데 너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니?” 대충 이런 것 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그 때까지 아버지에게 가장 많은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꾸중이나 훈계이기 보다는 신뢰의 표시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그리고 차분하게 말씀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아버지는 나에게 실망을 하셨을 수도 있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말씀 덕분인지 아니면 나의 각성으로 인한 것인지 모르지만 모든 것에 열심으로 하였고 다양하게 하였다. 내성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았지만 학교생활에 적극적이 되었고 그런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흡족해 하셨고 그 이후에는 한 번도 아들의 사회생활에 충고나 간섭을 하지 않으셨다.
내가 세 번째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한 사건은 고등학교 3학년 때 였다. 아버지는 당시에 학생으로서는 부담이 되는 좋은 시계를 나에게 선물 하셨다. 지금으로서는 별거 아니지만 당시에는 상당한 돈을 주고 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선물을 받은 며칠 뒤 나는 길거리를 가다 돈을 걸고 묘수풀이 하는 일명 박포장기 두는 곳에 발길을 멈추었다. 묘수를 풀어서 이기면 자신이 건 돈의 세배를 주는 것 이었는데 내 눈으로 이길 수 있는 길이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럴 모르고 돈을 계속 잃고 있었다. 계속 구경을 하다가 어느 한 사람이 이기고 돈을 세배로 받아가는 모습을 보고 역시 내가 알고 있는 방법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잠시 더 구경을 하고 있노라니 한 손님?이 “이것은 이길 수 없다. 즉 풀이가 불가능 하다”라는 말을 하자 주인(박포장기 주도자)은 길이 있고 나를 가리키며 “학생 조금 전에 어떤 사람이 10만원 걸고 이겨서 30만원 받아가는 사람 봤지?”라고 하기에 나는 “예”라고 대답하였다.
그 손님이 “좋소 나도 10만원 걸겠오. 이 학생이 둬도 좋소?”
“물론입니다. 여기서 복잡하니 정리하고 골목에 가서 합시다.”
“그럽시다.”
그래서 우리는 골목 뒤로 갔다.
“학생이 두는 데 그냥 둘 수 없지 않아. 그러니 학생도 돈을 걸지?” 그 손님의 말에
“나는 돈이 없는데요”라고 하니
“그러면 그 시계라도 걸지. 10만원으로 치고 이기면 학생에게도 30만원 주쇼.”
손님의 말에 주인은 동의를 하였고 나는 시계를 풀어 주인에게 주었다.
다음의 결과는 뻔하였다. 내가 한 수를 옮기자 주인은 아까와는 다른 방법으로 막아서 나는 이길 수 없었고 결국 시계는 그들의 손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암담하였다. 아버지에게 뭐라 변명하지?
“잃어 벼렸다고 할까? 아니야 그럴 수 없어?’
두 갈등 속에서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섰을 때 아버지에게 거짓말 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회초리로 쓸 수 있는 막대기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 무릎을 끓고 말씀을 드렸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아야 한다고 말씀 드렸다.
아버지는 “종아리를 걷어라” 하시고 종아리를 걷고 아버지 앞에 맞을 준비를 하고 서 있는 나에게 “네가 잘못 했다고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이냐?”라고 물으셨다.
나는 “예”라고 대답하였고 “됐다. 앉아라. 좋은 경험으로 생각해라. 나는 네가 한 번도 실수하지 않는 것을 보아 ‘실수도 좋은 경험인데’라는 생각을 하였다.”라고 말씀 하셨다. 나는 아버지께 너무 죄송하였다.
우스운 이야기 이지만 그로 인해 나는 대학을 가기로 최종 결심하였다. 당시 나는 여러 회사에서 취업하라는 손길을 받고 대학과 취업의 이정표 앞에서 갈등하고 있었는데 신뢰를 보내는 아버지에 보답하는 일이 대학 진학이라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고3 의 7월 나는 그렇게 아버지의 마음을 세 번째로 아프게 하고서야 대학을 준비하기 시작하였고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렇게 아버지 닮지 않겠다는 나와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신뢰와 대답하는 관계로 지냈기 때문에 아버지의 의견에 거역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교회의 문제로 처음 단호하게 아버지에게 거절 하였다. 나의 명분은 다른 여러 가지 있지만 종손으로서 제사를 버릴 수 없다는 나의 생각 이었기에 더욱 단호하였고 아버지는 더 이상의 교회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나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다른 가족들 아무에게도 아버지와 만나고 있음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거의 1년을 보내다 가족이 모여 있을 때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울음바다가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와 만나고 있음을 이야기 하였다. 가족들은 많이 놀라와 했고 나는 아버지와 약속이므로 당분간 모르는 척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곤 아버지에게 가서 가족들에게 아버지와 만나고 있음을 이야기 하였다고 말씀 드렸다. 아버지는 아무런 반응이 없으셨다. 그냥 “네가 한 일인데…”라는 말씀 이외에는 아무런 말씀이 없었다.
그렇게 여름이 갈 무렵 어머니는 암 수술을 받게 되어 아버지께 어머니가 입원해 계시는 병원에 가실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이번을 계기로 아버지가 집으로 와 줄 것을 기대하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물론 어머니의 병 앞에서 무기력하였던 나는 세상의 누구보다도 아버지가 어머니 곁에 계실 필요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부탁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약간의 망설임과 고민은 있었지만 어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발길을 옮기셨다. 그렇게 어머니와 아버지는 재 상봉을 하셨다. 그러나 어머니가 수술을 마치고 퇴원 후에도 아버지는 집으로 들어오시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뒤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내셨다. 해가 저물어 앞이 잘 안 보이는 저녁 무렵에 트럭을 운전하시는데 앞에 가는 경운기를 미처 발견하지 못 하시고 들이받아 경운기를 운전하던 사람이 사망하는 사고였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에게 연락하여 줄 것을 신신당부 하였기 때문에 동네의 조그만 파출소에서 나에게 연락이 왔다. 내가 달려가니 사고를 당한 사람은 이미 사망하였고 아버지는 유치장에 계셨다. 아버지를 면회하니 의외로 담담하게 계셨다. 나에게 성경책을 들여보내 줄 것을 요청하셨고 오히려 “너에게 연락이 가도록 하여 미안하다”라며 나를 걱정하고 계셨다. 나는 아버지를 가족 앞에 나타나게 하고 집으로 들어가실 것을 부탁한 것이 아버지를 고민에 빠뜨리게 하여 그런 실수를 한 것 같아 죄책감에 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피해자를 빨리 만나 합의를 보아 아버지가 빨리 나오게 하는 것 이었는데 그런 사고 수습의 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주변의 의견을 들을 수 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은 피해자를 만날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흥분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조금의 시간을 두고 만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는 경찰서로 또 검찰로 송치되어 구치소로 이감되셨고 피해자와 합의는 필수적이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해자의 가족을 찾아 갔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그렇게 찾아가는 것과 만남의 거부가 계속되는 동안 재판은 진행되었고 재판부에서는 합의가 이루어 지지 않을 경우 실형을 선고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빨리 합의를 받아오라 하며 재판의 연기가 계속되었다.
그렇게 거의 4개월이 갔다. 그 4개월 동안 나는 아버지가 나 때문에 그랬다는 죄책감과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무력감과 내 자신의 자책에 대한 무능함이 나를 끝없이 괴롭혔다. 나는 평일에 거의 매일 아버지 면회를 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수술의 뒤라 거동의 불편해 가지 못했고 내 동생들은 집을 떠난 아버지가 무책임하다 하여 면회를 가지 않았다. 나머지 친지들은 왜 그랬는지 면회를 가지 않았다. 단지 나와 교회의 사람들만이 면회를 갈 뿐이었고 때로는 교회의 사람들과 같이 면회를 했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역사하여 주실 것 이니 걱정하지 말라” 하며 기도만 하곤 하였다. 나는 무슨 되지도 않는 소리냐는 생각을 하면서 가능한 그들과 만나지 않게 되기를 바랬고 그들을 우연히 만나는 기회가 있어도 그들은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되는 듯하여 피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들이 면회 와서 함께하는 것을 좋아 하셨다.[계속]
나는 5형제의 장남이다. 내 밑으로 두 살(둘째)과 네 살(셋째) 적은 남동생과 열 살(넷째)과 열한 살(다섯째)이 적은 남동생이 있다. 둘째와 셋째는 아버지를 강하게 거부한다. 셋째가 개성이 너무 강해서 거부감이 큰 편이다. 물론 넷째도 강하게 거부하는 편이다. 막내는 그런 의사를 표명하지 않는다. 실제로 막내는 내 친동생은 아니다. 그는 미혼 부모의 아들로 그가 아홉 살 때 우리 집으로 입양되어 왔다. 그를 낳고 엄마는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버리고 아버지가 데리고 키우다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큰집에서 자랐다. 중화요리집에 온 손님이 말하는 사연을 듣고 아버지의 제안에 어머니의 동의로 우리집에 입양하게 되었다. 그 애가 우리 집에 올 당시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열심히 퍼 주는 단계였다. 누가 조금만 불쌍하다고 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도와주려는 아버지, 그리고 그것을 제재하여 보지만 힘이 미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따라가거나 아버지가 저질러 놓으신 일을 어머니는 열심히 뒤치다꺼리를 하셨다. 특히 친구나 그들의 가족에게 베푸는 선심은 도움의 수준이 아니라 때로는 친구 가정의 보호자 이상으로 무리한 것도 감당하셨다. 이미 집은 기울어 짐이 보이기 시작하였음에도 아버지의 선심은 그칠 줄 몰랐다. 둘째와 셋째는 그런 아버지를 못 마땅해 했고 집 모두를 털리고 집을 나가셨으니 아버지에 대한 거부감은 줄어들 줄 모르고 오히려 커져 만 가고 있었다.
열심히 쫓아다닌 덕분인지 몰라도 겨울의 막바지 무렵에 피해자 가족은 합의를 해 주었다. 물론 그렇게 하기에는 이모부가 큰 힘이 되어 주셨다. 피해자 집에 함께가서 같이 사정을 하고 내가 무릎을 꿇고 빌 때 옆에서 그에 대한 설명과 모든 변명은 이모부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합의해 해 주었다.
합의서를 재판부에 제출하니 선고 공판이 열리고 아버지는 집행유예로 풀려나셨고 건강이 상하신 아버지를 어머니가 따라가 보살피셨다. 그러다 아버지는 집으로 들어 오셨다. 나가실 때와는 달리 성경책 보따리와 열대어 어항을 가지고 집에 안착하셨다. 어머니는 극진히 아버지를 보살피셨고 아버지는 건강을 찾게 되었다.
아버지가 회복 되신 후 제일 먼저 주장하신 것이 1년에 10번이 넘는 제사의 철폐를 주장하셨다. 나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식구는 아버지가 안계실 때와 같이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도 제사 지내는 것을 거부 하셨다. 그 동안 아버지를 모시고 다니다 보니 같이 교회를 다니게 되셨고 급기야 제사를 거부하기에 이른 것 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러는 어머니의 행동에 할머니는 제재를 가하지 않으셨다. 나 또한 그러는 어머니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사는 작은 아버지를 모시고 내가 계속 지내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가장 완강하시던 할머니도 교회를 다니시고 제사를 거부 하셨다. 그리고 3년 뒤 나도 제사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고 가족회의에 의해 제사는 1년에 세 번만 지내기로 하였고 형식도 간소하게 그리고 하고 싶은 사람만 하게 되어 유명무실해 졌고 결국은 설과 추석 그리고 할아버지 제삿날 가족이 모이는데 의의를 둔 행사로 변하게 되었다. 그래도 내 동생인 둘째째와 셋째는 그것을 거부하고 상이라도 차리자는 주장을 하여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아버지가 나에게 교회 이야기를 처음 하시고 내가 교회이야기를 거부한 1년 뒤 아버지가 나에게는 너무 교회이야기를 하지 않아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저에게 왜? 더 교회이야기를 하지 않으세요?”
“너는 하나님이 알아서 인도하실 것 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라고 대답 하셨다.
나는 몇 년 동안 더 이상의 종교문제로 아버지와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나는 제사를 지내고 아버지는 제사를 지내지 않으셨다. 나는 조상님께 저희를 잘 보살펴 달라고 절을 하였고 아버지는 나를 하나님을 영접하게 해 달라고 어머니와 할머님이 함께 끝없이 기도 하셨다. 나는 결국 탈진한 상태에서 1998년 12월 5일에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끝까지 버티는 나를 치시고 역사하셔서 자신을 영접하게 하셨다. 그 때서야 아버지는 나에게 처음 교회이야기를 하신 후 매일 나를 하나님 전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와 같이 앉아 있어도 더 이상의 신앙적 말씀을 하시지 않는다. 늘 그래 왔듯이 그러시는 것이 나에 대한 배려고 애정이 표현 이라는 듯 말이다.
내가 애정을 가지고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다. 그리고 그들과 지리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나는 거의 주저 앉고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나의 그러함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위치에 계셨고 그러는 아버지가 마음 아파할 것으로 걱정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러다 1년 반이 지나서야 아버지가 아시게 되었다.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처절하게 싸우면서 당하고 있는 아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고 계셨고 옛날의 친구들은 이미 멀리 떠났기 때문에 도와 줄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이야기도 꺼내지 않으시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를 원망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 기도를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이듬해 1월에 아버지를 따라 수양회를 갔다. 내가 수양회를 간 이유는 내 몸이 병들어 고치 방법이 거의 없다고 판단하여 미국으로 떠날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이제는 아버지와 함께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아버지와 같이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 떠났다. 나는 아버지에게 아프다는 것도 한국을 떠난 것도 말씀 드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 여러 가지를 배려해 주셨다.
성경공부를 달리하시는 아버지는 먼저 끝나시면 식사 시간에 내 밥을 대신 타다 옆 자리에 놓고 나를 기다리시고 잠자리에 들 때는 먼저 내 자리까지 깔아 놓고 앉아서 성경을 읽고 계시다 내가 자리에 가면 아버지는 나를 맞이하시고 같이 자리에 누웠다.
아버지와 한 이불에서 잠자리하는 게 얼마 만인가? 기억이 전혀 없다. 처음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같이 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면 벌떡 일어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주무시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였다. 코고는 소리, 그리고 당신은 덮지 않고 수시로 내가 덮어 주기위해서 내 쪽으로 이불을 자꾸 미는 모습에 나는 자꾸 넋이 나가곤 하였다. 그러는 아버지에게 너무 죄송하였다. 60이 넘으신 아버지는 건강 하신데 나는 그러지 못하다. 어쩌면 이제 아버지 곁을 떠나면 다시 같이 할 수 없다.
아버지와 오랜만에 같은 이불에서 같이 하는 이 자리가 마지막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눈물이 나왔다. 6일 수양회에서 나는 2일 늦게 가서 3일을 참석하고 하루 먼저 올 수 밖에 없는 일정 이었고 아버지는 6일 동안 계셨다. 수양회는 아침에 참석자 2000명 전원이 2시간 동안 묵상을 하고 오전은 목사님 말씀 듣고 오후에는 그룹별로 나누어 성경공부를 하고 저녁에 다시 전체가 모여 목사님 말씀을 듣는 순서로 진행이 되었다. 내가 돌아오는 날도 같은 순서로 진행이 되었다. 나는 저녁말씀을 듣고 서울로 올라오기로 되어 있었다. 저녁을 먹는데 내가 저녁 말씀을 듣고 올라간다는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얘야 네가 그런 싸움을 오랜 동안 하고 있는데 도움이 못 되서 미안 하구나. 나는 평생 너의 모습을 보면서 네가 알아서 잘 하는 네가 자랑스러웠다. 그러니 너는 잘 이겨 낼 거다. 아버지가 열심히 기도했고 앞으로도 열심히 기도 할 테니 너무 걱정말고 하나님께 의지해라. 하나님이 알아서 인도 하실게다.”
나는 뭐라 말 할 수 없었다. 눈물이 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도 속으론 “아버지 닮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목사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원래 오늘 오후에 저는 부친님들이 계신 성경공부 반에 들어가 부친님 들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중에 한 부친의 간증을 소개 하려 합니다. 그 부친의 사랑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해 주는 것이기에 소개합니다.
그분은 가난하게 태어 낳고 한때는 부자인 적도 있었지만 지금도 가난하답니다. 이것은 틀린 이야기였다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가난하지 않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분이 지금 64세 이신데 55세가 넘어서 하나님을 영접하셨다 합니다. 그리고 80세가 넘어 하나님을 영접한 83세 넘은 노모를 모시고 사신다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아내는 올해가 환갑인데 58세에 하나님을 영접했다 합니다. 그분은 아들이 다섯인데 큰 아들이 40이 넘어 하나님을 영접했다 합니다. 그런데 그 3대가 이번 수양회에 같이 참석하셨다 합니다. – 중략 –
그분은 60이 넘은 평생에 지금이 가장 살맛난다고 하십니다. 그분의 가정에 하나님을 영접하는 성도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살기 때문에 살맛이 나신다 합니다. 그분의 큰아드님이 이 자리에 같이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오랜 역사로 이 자리에 함께 하였다 합니다. 노모, 아내, 그분, 그리고 아들이 함께 잠자리를 하고 함께 밥을 타먹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얼마나 위대하십니까? -중략-
그분은 내 아들을 매우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분은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같이 성경 공부하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였습니다. “내 아들을 위해 기도 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의 기도 속에 내 아들을 넣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는 2000여 성도가 모여 있습니다.
여러분!
이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합시다. 여러분들의 기도 속에 그분의 아드님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생략-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토록 닮지 않으려는 아버지가 그런 분이셨다. 아버지에게 한국을 떠나야 함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나 아파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다. 아버지는 더 묻지 않으셨다. 내가 무슨 사정이 있을 것으로 그리고 알아서 할 것이라 믿고 있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친구가 많다. 그러나 나는 적다.
아버지는 많이 베풀며 살아오셨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버지는 무계획 적으로 사시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계획적으로 사는 것 같다.
아버지는 기둥과 같다. 나는 세찬 바람과 같다.
아버지는 가진 것을 주신다. 그러나 나는 빼앗긴다.
아버지는 사랑을 주신다. 나는 받는다.
이렇게 나는 아버지와 다른 것이 많다. 왜냐하면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닮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을 닮기 거부하는 나를 항상 믿으셨다.
내가 내 아들을 믿는 것은 아버지를 닮았다.
내 아버지는 가난하시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지금은 집안의 모든 권한을 포기 하셨고 아들들에게 환영을 받으시지 못하고 외로운 듯 살고 계신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난하게 생각하거나 외로워하지 않는다. 아들들이 있고 하나님과 늘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는 절대 혼자가 아니시다. 예전에 아버지가 베풀었던 친구 분들이 당신의 아들들을 곳곳에서 돌봐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의 아들들은 내 아버지가 베풀었던 온정으로 인하여 도움을 받고 아버지의 기도로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나는 그렇지 못한데…
나는 수양회 사건이후 아버지를 닮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끝]
Aug 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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