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직 살아 있구나.
문득 문득 찾아오는 배신감 내지는 상실감이 나를 괴롭힌다
끝까지 지켜보려 했던 마지막의 것을 내 주고 나니
이제는 끝났다 하는 안도감만이 있을 것으로 생각 했는데 그러지 못하다
결국은 내가 가진 것 거의 모두를 잃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나,
그리고 나를 알던 사람들에게로 부터의 버림받음,
만신창이가 된 건강,
산산이 조각 난 가정…
어쩌면 이일 말고도 나는 이렇게 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자위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었다”하는 마술적 상실에
손가락 하나도 까닥일 수 없는 내가 되곤 하였다
이미 예견되어진 수순이고 그것을 마무리하기도 하였지만
순간적으로 치미는 울화에 심장이 멎는 것 같다
마지막 도장을 찍는 순간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 당연히 가야 하는 화장실에 가서
밤새 참은 배설물을 쏟아 내는 것보다도 더 감각 없이
기계적으로 도장을 찍었다
슬픔이나 희열도 없이 그냥 당연한 행위를 하듯이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는 모든 것에서 탈출 하여 은둔 하듯이 서울을 벗어나 산속에 묻혀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를 짓누른 스트레스에서 해방이라도 하듯
잠에 취해 몸을 움직이기 싫었다
그런 중에 찾아오는 분노와 패배감이 나를 더욱 무기력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 누구를 그리워하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고
또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로 부터 잊혀 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술 마실 수 있는 상태였다면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시고 널 부러지고
담배를 피웠다면 담배연기 속에 가려 나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연기를 뿜어냈을 것이다
누워서 움직일 수 없는 남의 것 같이 움직일 수 없는 손목을 바라보면서
저 부분을 칼로 그으면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할 텐데 하는 생각과
죽음의 순간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일기도 했었다
탈출, 잠적, 죽음…
어쩌면 문득문득 찾아오는 의문과 유혹이 나를 감싸기도 했다
일어나야 한다는 스스로의 생각도 하지 못하고
또 기계적으로 일어나고 사람의 생활 속에 묻혀 있다가
다시 무기력감에 나를 던지는 것을 반복하면서 뚜렷한 의지 없이
서울의 생활 속으로 돌아 왔다
사람들과의 만남에 잃어버린 나를 찾기 보다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내가 있음을 알리거나
무기력함에 저항이라도 하듯 떠들며 세상 속에 나를 묻어 버렸다
그렇게 서울의 시간은 흘러갔고 너무도 당연하지만
큰 의미를 찾지 못함 속에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을 맞이하였다
비행기를 타면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가고 싶은
너무도 경멸적이고 세속적인 하찮은 욕심에 매달리는 나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또 다른 실망과 함께 슬픔에 잠기기도 하였지만
주는 밥 먹고 책 보고, 잠자면서 애틀랜타로 돌아 왔다.
하얀 눈이 보이는 애틀랜타 상공에서…
내가 왜 여기에 왔지?
아니면 내가 꼭 와야 할 곳인가? 하는 이방인 같은 생각에 잠겼다
나를 기다리는 이 누구인가?
아니면 내가 찾아야 할 곳은 어딘가 하는 방황에 늪에 잠겼다
슬픔이나 아픔이 없는 듯 무기력과 낫 선 곳이라는
너무도 먼 것 같은 느낌의 시소와 같은 흔들림,
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것은 아닌가 하는 막연함에 비행기를 내렸다
나 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시 만남에 반가움에 들떠 있는 순간에도
나는 혼자라는 생각과 그래서 편하다는 자위 속에 집으로 향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이제는 모든 것을 잃었다 하는 상실감이 다시 찾아 왔지만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몸의 통증에 내가 살아 있음을 아는
유일한 신호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무기력, 아픔 그리고 방황…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이렇게 찾아온 통증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왜 살아 있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예전에 한 번도 와 보지 못한 망망대해의
한 가운데 있는 듯한 느낌이 나를 더욱 방황하게 한다.
나는 살고 싶다?
아니면 찾아오는 통증을 끝내고 싶다?
그리고 지금은 다음 순간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없는
무기력과 방황 속에 갑자기 또 통증이 찾아온다.
아! 나는 아직 살아 있구나.
Jan 7,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