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3333, 내가 입학한 대학의 수험번호다.
3332, 나와 가장 친했던 그러니까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은 학교를 다녔고 형제처럼 가깝게 보냈던 친구의 수험번호였다. 합격자를 발표하는 날 친구와 나는 붙으면 둘 다 떨어져도 둘 다라는 함께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합격자 발표를 보러 학교에 갔었다. 그랬던 근거는 그 친구와 내 예비고사 성적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었고 고등학교 성적 또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합격을 하던 아니면 불합격을 하던 같은 길을 걸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서울서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가는 과정까지 우리는 그야말로 가장 친한 친구들의 전형적인 형태로 같은 길을 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며 교정으로 향했다. 눈이 많이 내려 미끄러운 학교 앞 길을 걸어가며 서로 조심할 것을 걱정하고 당부하였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시간, 학교의 태권도 도장 벽에 두루마리로 말려진 합격자 명단을 조금씩 풀어 나가면서 수험번호를 쫒아 갔다. 천 번대가 지가고 2천 번 대를 지나 3천 번 대에 들어서면서 꼴깍하는 침 소리마저 멈추고 조금씩 풀려가는 두루마리를 주시하였다. 3천 백, 3천 2백, 3천 3백...
3332가 있어야 할 자리는 지나가고 三三三三, 내 번호는 있다.
기쁨으로 맞이해야 하는지 아니면 친구의 불합격을 아쉬워해야 하는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친구가 손을 내밀며 "합격을 축하 한다"라고 할 때도 나는 엉거주춤 손을 내밀며 아무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그와 나는 6년의 같은 길에서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우리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녁에 들어가 자야할 목적지가 다른 서울의 한 곳에서 헤어졌다. 그리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와는 한 참 동안을 서로 연락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야 내가 합격한 것을 실감하였지만 기쁨이 있는 자축을 하지 못하였고 집에서 기다리는 부모님이나 가족들에게도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합격을 알리지 못했다.
얼마 뒤 입학금을 내러 가는 버스 안, 아버지와 나는 학교를 향한 버스를 탔고 나는 서고 자리에 앉은 아버지의 머리를 보았을 때 여기저기에 하얀 색의 아버지 머리를 볼 수 있었다. 늘 윤기 흐르며 까만색일 것 같은 아버지의 하얀 색 머리를 보며 내가 청소년을 벗어나 대학생이 되고 아버지도 나이가 들어 간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학생활은 하숙으로 시작하였다. 방이 여러 개인 하숙집에 들게 되었는데 충청도 어디로 학교를 간 아들의 방을 내가 쓰게 되었다. 그 하숙집에는 2년제 대학의 학생처장이신 교수님과 두 여자 고등학교 선생님이 같이 하숙을 하게 되었다. 하숙집에서 아침과 저녁을 주는데 아침 시간은 정해져 있어 모두 같은 시각에 아침을 먹어야 했고 저녁은 시간을 정해 그 시간 안에 들어오면 독상 형태로 저녁을 먹어야 했다.
학교생활의 시작은 수험생 그 자체였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거의 빽빽하게 강의로 꽉 차여져 있고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진도고사'라는 명목으로 시험을 치루게 되어 있었다. 첫 수학 시간, 그러니까 정확하게 이야기 하면 미적분 시간, 여자 전임 강사는 앞부분은 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하면서 다 공부 했던 내용 일테니까 그냥 넘어간다며 중간으로 훌쩍 뛰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는 내용에 즐겁고 행복하고 폼 잡아야 하는 대학 생활이 날아가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영어야 원래 잘 못해서 예상은 하였지만 공대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수학, 물리, 화학은 그런 식으로 황당하면서 또 나를 코너에 몰아넣으며 괴롭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생전 처음 접하는 불어 또한 나를 괴롭히는 과목으로 험난한 대학 생활의 서막이 시작 되었다. 나는 정말 놀 틈이 없었다. 고등학교는 나름 여유를 가지고 상위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대학생활의 만땅 술은 동문회에서 체험 하였다. 원래 험하기로 유명한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지라 그리고 대학 입학이 쉽지 않은 턱에 입학한 후배라 그런지 선배들은 기합과 술로 정말 과격하게 환영하였다. 수업 따라 가는 것도 그리고 진도고사에 허덕이는 것도 힘든데 선배들이 베푸는 사랑은 내 많은 시간과 열정을 빼앗아 가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매주 치뤄야 하는 진도 고사, 밤샘 공부를 해도 풀어내는 문제 보다 빈 칸으로 제출하는 문제가 몇 배로 많았고 중간고사나 기말 고사 때 역시 글씨를 쓰는 공간 보다 손도 못 대는 공간이 훨씬 많은 상황에서 나온 성적은 처참 그대로 였다. 공대의 3대 과목, 수학, 물리, 화학 중 두 과목에서 F를 받으며 1학기를 마쳤다. 물론 학교에서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 시켜야 한다는 명분하게 더 많은 학생들에게 소위 빵꾸라는 F를 많이 주었다 할지라도 나에게는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이 다른 과목들은 교수들의 아량을 선사 받은 덕분인지 F는 면할 수 있었던 것이 천운이라 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주요 3대 과목의 F를 받은 학생들을 위하여 Summer School이라는 것으로 추가로 학점을 취득 할 수 있는 방학 동안의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물론 추가로 돈을 내고 전원 기숙사에 들어가야 한다는 조건하에 B학점 이상은 받을 수 없었지만 학점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외면할 수 없는 기회였기에 당연히 세 과목을 신청하고 기숙사에 들어갔다. 기간이 2주였는지 3주였는지 기억은 없지만 매일 매일 강의와 시험은 무슨 지옥학교 같은 혹독함으로 학생들을 몰아쳤다.
다른 학생들은 모르지만 내 경우는 그 기간 동안 거의 잠을 못 잔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의 어느 시점에서는 너무 힘들어 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지치고 힘들어 그만 두고 싶은 유혹이 많았고 이럴 바엔 군대나 갈까 하는 황당한 생각도 하였다. 그랬던 이유는 몇 명의 학생들이 군대에 가서 더 공부하며 시간을 벌어 보자고 휴학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1학년 1학기부터 더욱 힘들어 했던 이유는 내가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와 수업의 배정 자체가 다르고 교과서도 크게 달랐기 때문 이었다. 예로 공업고등학교는 국영수 세 과목이 주당 각 3시간으로 각 10시간이 넘는 인문계 학생들과 달랐고 수업의 내용 역시 크게 달랐기 때문이었다. 암튼 그렇게 힘들게 마친 썸머 스쿨의 결과로 학점을 취득할 수 있었고 2학기를 맞이하였지만 학기를 마쳤을 때 다시 3대 과목 중 두 과목에서 쌍권총을 받아 다시 계절학기인 Winter School이라는 지옥훈련을 거치고서야 1학년을 마칠 수 있었다.
전자공학이라는 전공을 시작한 2학년은 그래도 조금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표현하는 수식이나 방법이 조금씩 달랐지만 많은 부분이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배우고 암기 하였던 것이라 1학에 비해서는 조금 수월 하였고 대학이라는 조금 더 자유로운 학창시절을 즐기는 여유도 가졌던 것 같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난 평점이 1학년에 비해 많이 높았던 것으로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학교를 다니다 군대를 갈까 하는 심각한 고민을 한 것은 2학년 1학기를 마쳤을 때였다.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운동을 해도 멋진 몸매를 가질 수 없다고 판다는 한 나는 군대를 가면 울퉁불퉁 까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근육 몸매를 가질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였고 조금 특이한 군대 생활을 위하여 공군에 가야 할 것까지 고려하였다. 당시 공군은 육군에 비해 복무 기간이 길었지만 아마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장교로 근무하고 있는 삼촌의 영향과 멋진 복장 때문 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군대 가는 것을 포기 하였다. 삼촌과 이야기를 하고 포기 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내 스스로 포기하였는지 모르지만 군대 가는 것을 포기하고 ROTC를 택하였다. ROTC를 택한 뚜렷한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군대를 가려 심각하게 고려한 대학 2학년 그러니까 1979년 가을 부마사태로 명명 되었던 부산 마산의 격한 학생
데모가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10.26이라는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를 당하고 전국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 휴교령 덕분에 다른 학생들과 내장산과 김천 직지사로 등산을 다녀오기도 하였지만 그리고 나서 ROTC를 지원하여 시험결과 합격을 하였다. 그리곤 3학년 때부터 ROTC 후보생 생활을 하게 되었다.
2학년 때 나에게 있었던 큰 경험이 여름과 겨울 방학기간 중 있었던 농촌 봉사활동이다. 1학년 때 친하게 지내며 학점 취득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친구가 ‘이데알레’라는 이념 써클에서 활동을 하였는데 정신없이 1학년을 마치고 조금 여유를 찾은 2학년 때 우연히 따라 갔다가 엉거주춤 가입하게 된 써클이 이데알레였다. 전체 조직이 어떻게 구성 되었고 그들이 하는 일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냥 친구따라 강남 간다는 식으로 가입을 하게 되었고 진짜 대학생활을 만끽해야 한다는 기분 혹은 멋있게 보이려 했는지 모르지만 무주구천동의 옛 신라와 백제를 가르는 라데 통문이 있는 시골 근처로 가는 여름 농촌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공업고등학교를 나오고 자격증을 갖춘 나는 농촌의 가전제품 수리를 목적으로 환영받으며 참여하게 되었다. 마을회관과 몇몇의 집에 분산 숙식을 하며 가전제품 수리는 물론 학생들을 지도하고 또 노동으로 마을입구의 길을 다듬는 일등을 한 것이 내 생애 남은 위한 첫 희생이며 봉사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기간도 2주였는지 아니면 3주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학교와 같은 대우재단이 지은 병원이 있는 마을에 봉사를 다녀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버스가 고장 나 영구차를 얻어 타고 학교로 온 일, 그리고 ‘헤까닥’이라는 놀이를 하며 함께 봉사활동 했던 학생들이 단체로 HEKADAK 이라고 인쇄된 셔츠를 맞춰 입었던 기억이 있다. 그 봉사 활동은 10.26으로 대통령이 시해되고 휴교령이 내려진 상태의 겨울 같은 장소의 같은 형태로 계속 되었고 그 겨울의 봉사 활동기간이 내 생애의 짧은 2년 장발의 마지막 행사였다.
겨울 봉사활동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2월 1일부터 ROTC 후보생 소집훈련이 시작되었기에 거의 삭발을 하게 되었다. 거의 한달 동안 하였던 힘든 훈련 기간동안 그만 두고 싶은 생각도 많이 하였을 것으로 생각 되었는데 아마도 너무 소심하고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나를 바꿔 보고 싶은 생각에 견디었던 것 같다. 이름표도 달지 못하고 머리에 피가 나도록 받았던 1개월의 훈련이 끝나고 이름표를 받으면서 그야말로 장교 후보생 생활이 시작된 3학년은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다.
10.26으로 인한 휴교령은 봄의 소식과 함께 해제 되었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나는 머리를 자르고 제복을 입은 장교후보생이 되어 교정을 울리며 선배들에게 경례로 예를 표하는 3학년이 시작되었다. 3학년이 시작되고 1주일도 지나지 않아 내가 소속해 있던 써클인 이데알레에서 회장을 선출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내가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1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 ROTC 1년차 즉 3학년의 우리 과에서 간부가 2명 배정 되었는데 그 한 자리를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이념써클의 회장과 겸해서는 안 되기에 사퇴 하라는 압력이 ROTC 2년차 즉 4학년 선배로 부터 있었다. 거부를 할 경우에 ROTC까지 그만 두어야 하며 선배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조직에서 거부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덕분에 7일 만에 이데알레 회장에서 물러났고 화려하고 고단한 ROTC의 간부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ROTC에 명예위원이라는 간부생활은 나를 좋은 학교성적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명예위원 이기에 선배들로 부터 소환도 많았고 기합도 훨씬 더 많았다. 거기에 동기들의 불만과 요청을 수용하느라 학업에 적지 않은 지장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 5월, 당시에는 5.18 사태라는 근대 한국사에 가장 피비린내 나고 아픔이 많은 사건으로 학교는 장기 휴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ROTC는 계획대로 여름 병영훈련에 들어갔고 병영훈련을 마치자마자 날아온 수업 대체의 리포트와 시험은 나에게 학사경고라는 처참한 성적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휴교령으로 부족한 수업을 리포트로 대체 한다는 학교의 결정에 ROTC의 여름병영 훈련을 마친 우리 과 학생들은 숙식이 자유로운 우리 집에서 각자 한 과목씩 맡아 리포트를 작성하여 베껴 제출한 우리들 중 나만 세 과목의 F라는 성적으로 학사경고를 받았다.
같은 내용을 복사하다 시피 베껴 제출한 우리과 ROTC 학생들 중 유난히 나만 학사경고를 받은 이유는 5.18로 휴교를 하기 직전 ROTC를 비난한 교수에게 대표로서 격하게 항의를 한 나에, 거기에 다른 학생들에 비해 유난히 악필인 내 리포트는 교수를 거슬리기에 충분하였기에 억울하지만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우리는 4학년까지 140학점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었던 때에 나는 학사 경고로 3학년 2학기에 15학점 이상을 신청할 수 없었고 그 15학점을 다 취득한다 할 지라도 4학년에 40학점을 들어야 하는 1학년 들이나 하는 많은 수업을 들어야 했는데 그것마저도 내 전공인 전자공학에서 듣는 것만으로는 학점을 채울 수가 없어 다른 학년 혹은 다른 과의 수업을 듣고 학점을 이수해야 하는 최악의 조건이 되었다. 그래서 ROTC를 그만 두고 유급신청을 할 까 했지만 학군단에서 그것도 받아 들여지지 않고 최선을 다하라는 명령만 듣고 2학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2학기를 마쳤을 때 또 터진 사건이 불어과목 학점 이수가 어려워져 졸업이 불가능할 위기에 처했다. 학군단의 협조 요청과 교수를 찾아가 사정한 결과 F를 받지 않아 4학년에 올라 갈 수 있었고 1, 2학기에 41학점을 이수함으로써 합계 141학점을 채워 졸업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이수한 과목과 성적은 엉망이 되었다.
거기에 무슨 멋이 들었는지 대부분의 다른 학생들은 졸업고사를 치루는 것으로 졸업을 택했지만 나와 같은과 ROTC후보생 둘은 졸업논문을 선택하며 험난한 졸업논문을 쓰기로 하였다. 덕분에 학교 실습재료를 너무 많이 써서 논문 지도교수로부터 지적과 경고도 받았고 논문의 실습의 결과인 디지털 컴퓨터가 데드라인 순간 까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마음을 조급하게 하기도 하였다.
거기에 ROTC 임관고사까지 겹쳐 허우적댄 결과로 성적순으로 받는 군번은 동기생들 중 최하위 그룹에 속해 3600여명 중 3378번을 받았다. ROTC는 임관하면서 전공학과와 임관고사 성적에 의해 병과가 결정이 되는데 내 성적으로는 보병으로 가는 게 당연 순리지만 나는 전자공학이라는 전공에 명예위원 이라는 것으로 혜택을 받아 통신병과의 소위로 임관 할 수 있게 되었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여 공대로 입학해서 종합대로 겨우 졸업하고 민간인으로 입학해서 대한민국 육군소위로 임관하는 험난한 대학생활을 마쳤다.
하지만 어려움 때문에 많은 경험을 하고 겨우 졸업했던 경험은 이후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적지 않은 도움의 발판이 되었다. 공고를 졸업하여 대학을 진학 한 것 자체가 쉽지 않았고 Summer, Winter 등의 계절학기, ROTC, 학사경고, 장학금, 졸업논문, 거기에 ROTC 명예위원 등은 치열한 경쟁의 회사 생활을 하면서 특히 위기의 순간에 큰 힘을 발휘하였다.
July 1,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