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식아(장사익)
(삼식아 아- 삼식아! 아 어디 갔다 이제 오는겨,
쟤 손좀 봐요 새까만게 까마귀가 보면
할아버지 하겠어 빨리 가 손 씻고 밥 먹고 공부좀 혀~~)
내가 학교를 입학한 것은 어머니의 친정,
그러니까 충청남도 연기군 달전리 1구라는 산골마을이다.
태어난 곳 역시 같은 곳 이지만
예전에 어머니들이 친정에서 해산을 하던 관습대로
외갓집에서 태어났지만 이내 다른 곳에서 살다
학교를 입학하기 한두 해 전부터
외갓집 사랑방에서 어머니와 나, 동생 둘 합이 넷이 살았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일을 하셨기에
요즘말로 기러기 가족이었다.
그 동네는 총 20여 가구에 100명을 넘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기에
밖에서 놀아도 저녁 때가 되어 엄마들이 소리쳐 부르면 들리곤 했다.
권식아~
밥 먹어 이놈아!
때가되면 부르지 않아도 얼른 와서 씻고
공부하다 밥 먹어야지 꼭 불러야 오냐?
속상해 죽~겄~어~~~
한탄조로 외치는 어머니의 소리다.
소낙비는 내리구요
업은 애기 보채구요
허리띠는 풀렸구요
광우리는 이었구요
소꼬팽이 놓치구요
치마폭은 밟히구요
논에 뚝은 터졌구요
시어머니 부르구요
똥오줌은 마렵구요
어떤 날은 엄마
어떤 날은 엄마
어머니는 외갓집의 양해로 일구는 작은 텃밭 이외에는
농사 지을만한 것이 없어
외할아버지가 만든 등을 만들어 광주리에 이고 팔러 다니는 것이 주 수입원이었다.
등을 잔뜩 넣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어 한 손으로 잡고
셋째를 업은 등에 한 손을 받치고 아침나절 집을 나서
어떤 날은 이고 나갔던 그대로
어떤 날은 등을 팔아 대신 받은 곡식을 한 손에
한 손은 셋째를 업은 등에
광주리는 받치지도 않고 논길을 따라 집으로 오곤 하였다.
비 오는 날에는 광주리를 타고 머리를 경유하여 흐르는 빗물이 얼굴을 타고 내리고
입은 옷이 흠뻑 젖어 몸에 붙어 걸음을 더디게 하지만
등에 업은 아이는 젖을 새라 퍼대기를 푹 씌워서
종종 걸음으로 길을 재촉하여 돌아오곤 했었다.
(엄마 엄마 이리 와 요것 보셔요.
병아리떼 쭁쭁쭁 놀고간 뒤에
미나리 파란싹이 돋아 났어요
미나리 파란싹이 돋아 났어요)
나 나 나
30도 안 된 어머니의 그런 생활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동네의 아이들과 여름에는 미역도 감으며 고기도 잡고
겨울에는 썰매를 타며 길지 않지만 많은 추억을 만들고
어른이 되어서도 속상한 일이 있거나 답답할 때
찾아 가서 쉬기도 하고 때로는 펑펑 울던 곳이다.
(삼식아~ 아! 삼식아! 아! 워디 갔다 이제 오는겨,
쟤 손좀봐요
새까만게 까마귀가 보면 할아버지 하겠어!
빨리 들어가 손 씻고 밥먹고 공부 좀 혀~
아 - 나 못 살겠어 삼식아!)
벌써 40년도 더 지나
어머니는 70이 넘었고 나도 50이 넘었지만
메아리처럼 들리는 어머니의 소리
“권식아! 밥먹이 이놈아~~”가 그립다.
Dec 1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