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 충정도
작사:조영남 작곡:외국곡
일사후퇴때 피난 내려와 살다 정든 곳
두메나 산골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나를 키워준 고향 충청도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달전리 1구
내가 진짜 태어난 외갓집
그러니까 어머님의 친정이다.
태어나서 얼마 만에 다른 곳으로 갔는지 모르지만
다시 돌아가 그곳에서 학교에 입학하였다.
내 아내와 내 아들과 셋이서 함께
가고싶은 곳 논과 밭사이 작은 초가집
내 고향은 충청도라오
내가 자라서 하는 일이 잘 안 되거나 답답할 때
너무 슬픈 일이 있어 혼자 엉엉 울고 싶을 때 찾던 곳이기도 하다.
소주 한 병과 담배 한 갑,
그리고 오징어 한 마리에 플라스틱 소주잔을 사 들고
부엉골이라는 골짜기에 있는 외할머니 산소에 가서
외할머니와 주거니 받거니 기울이며 울고 웃으며
신세 한탄을 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잔디에 누워 파란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밭에 나가고 아버지는 장에 가시고
나와 내 동생 논길을 따라 메뚜기잡이 하루가 갔죠
내 아내와 내 아들과 셋이서 함께
가고싶은 곳 논과 밭사이 작은 초가집
내 고향은 충청도라오
담배 농사,
외갓집의 주 농사였다.
물론 다른 작물들도 재배를 하였지만
대부분 삶을 연명하기 위한 곡식이었고
돈을 벌기 위해 담배 농사 하셨다.
나중에 서울로 이사를 하여
방학 때면 그곳을 찾았는데
그럴 때면 할머니는 늙은 호박을 따서
큰 돌 두 개를 양쪽에 고여 호박을 올려놓고
불을 때서 적당히 익으면 쪼개서 주곤 하셨는데
노릇노릇 한 게 먹음직하였지만
당시에는 별 맛을 느끼지 못하면서 먹었던 것 같다.
동구밖에 기차 정거장 언덕위에 하얀 예배당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는 동네서 제일 큰집이었죠
내 아내와 내 아들과 셋이서 함께
가고싶은 곳 논과 밭사이 작은 초가집
내 고향은 충청도라오
기차 정거장까지 10리라고 하였다.
기차 소리는 아련히도 들리지 않는 거리지만
5일 장에 열리는 날 새벽녘부터 치장을 하고
내다 팔 것을 정리하여 길을 재촉하곤 하였었다.
어쩌다 따라 나서면 잰 걸음으로 얼마나 멀게 느꼈었는지······
그렇지만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고
많은 사람들과 신기한 것은 물론
맛있는 국수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다는 재미에
따라 나섰던 기억이 있다.
찢어진 부위를 샌드페이퍼로 갈고
거기에 다른 고무 역시 안쪽 면을 갈아 본드를 칠해 조금 말리고
찢어진 곳에 덧대고 숫불에 적당히 달궈진 쇠판을 얹어
손잡이를 돌려 압력을 가하면
열과 압력으로 덧 댄 고무가 붙어
새것 같지는 않지만 다시 신을 수 있는 신으로 재생되는 과정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열심히 보고는 하였다.
달성 초등학교,
동네에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유일한 학교로
내가 첫 학교생활을 한 곳이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각 2개 반, 총 12개 반인 학교로
운동장을 들어서면 왼쪽에 그네가 있고
오른쪽은 교장선생님 사택이 있었다.
정면의 왼쪽은 벽 나무판자로 되어 있는 오래 된 교실이 있었고
정면 오른쪽은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현대식 교실이 있었다.
교실 뒤쪽으로는 냇가가 흐르고 있었고
교실 앞은 개나리가 새 건물 중앙에 손으로 치는 학교 종이 있었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학교는 학생이 없어서 폐교가 되었고
학생들은 전의역의 읍내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 그곳을 찾으면서
폐교가 되어 굳게 잠긴 학교 문을 보며
“내가 이 학교 몇 회로 입학한거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