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25시 C. V. 게오르규

송삿갓 2019. 8. 2. 18:30

25C. V. 게오르규

 

<25>하면 떠오르는 게 예전의 학창시절(, 혹은 고교 시절)에 봤던 영화포스터다.

영화를 두어 번 본 것 같기는 한데 내용은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주연인 안소니 퀸의

크고 주름진 얼굴의 표정이다.

우는 것이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표정

요즘 말로 웃픈과는 거리가 멀어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하였는데 책의 말미에

영혼의 슬픔이라는 게 가장 근접 하다고 할까?

 

책의 제목인 ‘25는 무엇을 뜻할까?

책의 초반부에 이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하였다.

구원을 위한 온갖 시도가 소용없게 되는 순간이지. 구세주의 외침도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순간이다. 이건 최후의 순간도 아니야.

최후의 순간에서 이미 한 시간이나 더 지난 시간이자.

서구 사회가 처해있는 정확한 시간, 지금 이 시간, 바로 이 시간이야.‘

 

알 듯 하면서도 그리 쉽지 않은 설명이다.

이 책 읽기를 마칠 무렵 내가 생각한 25시는 이렇다.

무기력, 무의식 속에서 하나의 탈출구만 존재하는 미래가 불투명한 어느 시간이 아닐까?’

이도 쉽지는 않다. 하지만 1938년에 시작되는 이 책의 주인공인 요한 모리츠의 행적과

절규를 책을 인용해 보면 조금 도움이 될 것 같다.

요한 모리츠의 탄원서로 시작되는 글의 일부분이다.

저는 인간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잘못이 없는 저를 가두고 고문할 권리는 없습니다.

제 삶과 그림자는 제 것입니다. 당신이 누구건, 그리고 당신이 얼마나 많은 탱크, 기관총,

비행기, 수용소 돈을 가지고 있건 제 삶과 그림자에 손댈 권리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저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일할 수 있기를 바랐고,

가족과 함께 눈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집에 살면서 끼니가 끊이지 않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래서 저를 체포하신 겁니까?

루마니아 정부는 헌병을 보내서 물건이나 가축처럼 저를 공출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맨손으로는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헌병이나 국왕에 맞서 싸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머니가 주신 이름인 욘이 아니라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가축을 가둬 두는 우리처럼 철조망이 둘러쳐진 수용소에 유대 인과

함께 저를 가둔 뒤 강제 노역을 시켰습니다. 저희는 가축처럼 떼를 지어 자야 했고,

떼를 지어 먹고, 떼를 지어 차를 마셔야 했습니다. 저는 떼를 지어 도살장에 끌려갈 날을

기다렸습니다. 저와 함께 있던 죄수들은 도축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탈출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체포하신 겁니까?

도살장에 끌려가기 전에 탈출한 것이 저를 체포한 이유입니까?

헝가리 정부는 제 이름이 야곱이 아니고 욘이라고 주장하면서 루마니아 인이라는 이유로

저를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고문하여 참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습니다.

마침내 저를 독일에 팔아넘기기까지 했습니다.“

 

모리츠는 자기가 사는 루마나이의 판타나라는 작은 도시에서 가난한 농부였지만

그의 부인을 탐욕 하는 헌병대장의 농간에 공출되어 수용소에서 유대인으로 바뀐다.

소설의 거의 끝에 13년 만에 석방되어 가족과 만난 그에게 또

동유럽 출신의 외국인들은 따로 수용하라는 명령이라며 가족과 함께 수용소에 가두었을 때

모리츠는 수용소의 미국장교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1938년에 저는 루마니아에 있는 유대 인 수용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1940년에는 헝가리에 있는 루마니아 인 수용소에 있었어요. 그 다음,

1951년에 독일에 있는 헝가리 인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945년에는 미국이 관할하는 수용소에 있었어요. 그리고 이틀 전 다카우 수용소에서

석방되었습니다. 13년이라는 세월을 수용소에서 보낸 뒤 저는 단 열여덟 시간 동안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여기로 온 겁니다.“

 

그는 13년 동안 105번 수용소를 옮겨 다니다 석방되어 18시간 만에 동유럽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106번째로 가족과 함께 수용되어 서방측 군대에 지원만 하면 석방시켜 준다는

말에 연령제한에 미달한 모든 가족을 이끌고 연령제한을 면제해 달라며 지원한다.

소련만 아니면 어디든 가야겠다는 유일한 출구를 향해 탈출하려는 것이다.

그들에게 어떤 미래가 있는지 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그들이 가지거나 누릴 수 있는 게 우리가 아는 24시간이라는 1일 속에 있을까?

 

모리츠의 고향 루마니아의 마을의 사제였으며 그의 정신적 지주와 같은 코루가 사제가

역시 수용소에서 죽음을 앞두고 아들의 손을 잡고 하는 말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총체적인 삶을 살 수 없다면 인간의 살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리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예술과 종교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과 같은 도구가 필요해.

그건 예술 창작을 비롯한 모든 창작 활동에 필요한 도구야.

이성은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데 부차적인 역할 밖에 못해.

수학, 통계, 논리로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감상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삶을

계획하고 이해할 수 없어. 그런데 서구 기계 사회는 고집스럽게 수학적 계산으로

베토벤이나 라파엘로의 작품을 이해하려 하고 있어. 통계를 통해서 인산의 삶을 이해하고

더 낫게 만들겠다는 거지. 그건 터무니없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해.

~중략~

인간의 삶이 가진 의미는 아무런 근거도 없고 논리로 설명할 수도 없어.

그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라서 다른 사람이 관여할 수도 없어.“

 

가족 전체가 군에 지원했다는 사실을 홍보하겠다며 미국 장교는 사진을 찍기 위해

이렇게 명령한다.

웃어요!”

하지만 그는 알아 듯지 못하여 통역관에게 묻는다.

저 미국 사람이 뭐라는 거죠?”

웃으라고 명령하는 거예요.”

13년 동안 105번 수용소에서 수용소로 전전하다 겨우 자유와 가족을 찾았는데

동유럽사람이라는 이유로 또 수용소에 가두자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하여

네 살 어린 아이부터 15살의 아들, 그리고 부인과 야윈 자신이 연령제한에도 불구

군대로 지원하고자 하는 데 그것을 홍보하고자 하는 미국 장교가 명령한다.

웃어요! 웃어! 그대로 웃고 있어요!”

 

약소국에서 태어난 모리츠라는 사람에게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이 없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영화 ‘25의 포스터 안소니 퀸의 큰 얼굴을 회상하며

후기를 마친다.

 

August 2, 2019 카메룬의 야운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