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일인 지난 일요일에는
알라바마에 있는 한 친구와 여기 사는 두 분과 함께 골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녁을 같이 하였는데
그 자리에 여기에 사는 또 다른 한국인 부부가 합류하였습니다.
알라바마에 사는 친구는 여기 아틀란타에 살다
일이 잘 안 풀려서 현대자동차가 있는 몽고메리에
비즈니스를 찾아 떠난지 3년 되었고
그 뒤 통화만 가끔 하고 만나지 못하다
한국에 가는 아내를 공항까지 Ride하고 같이 골프를 하였습니다.
가끔 전화 통화를 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오랜 만에 만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살이 약간 빠져 건강을 잘 지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같이 골프를 한 사람 중 한 분은 간간히 만났고
또 다른 한 분은 가까이 지내고 같이 성경공부를 하다
몇 가지 사건으로 인하여 중단 한 뒤
자주 보지 못하였는데 해쳐진 건강 회복이 덜 된 듯 보였습니다.
저녁 식사에 합류한 부부 역시 같이 성경공부하고
아버지학교도 같이 하였던 사람인데
하는 사업이 잘 안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사람을 기피하면서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다가
같은 아틀란타에 살면서도 만난지 1년이 넘었는데
예전에 비해 건강이 좋아 진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예전에 모두 같은 교회를 다녔고
제가 처음 미국으로 와서 정착하는 과정에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인데
미국에 온지 10년이 지난 지금
뿔뿔이 저마다 갈 길을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종교로 같은 교회에 있다가
교회가 싫어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나와 한 사람을 빼고는 서로 다른 교회를 다니고
나와 한 사람마저도 예전처럼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다는 것도
또 다른 공통점 이내요.
같이 골프하고 저녁을 먹으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고 집에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아내와 같이 독립기념일 불꽃놀이 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한 소리 들으며 TV로 불꽃놀이 보는 것으로
독립기념일 하루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지난 주는 아들 진얼이가 큰 일을 마쳤습니다.
바로 석사 학위 논문 발표회를 하였고
어제 학교에 제출함으로써 석사과정을 끝냈습니다.
지난 1월부터 박사과정에 들어갔지만
석사 논문이 마무리 되지 않아 고생하였는데
다행이 마무리 한 거죠.
아버지로서 내가 하지 못해 본 것을 한 아들
그리고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아들이
논문을 끝내고 자축하며 쉬고
친구들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는 모습을 보고
대견하면서도 가슴이 뭉클 하였답니다.
나는 아들에게 어떻게 축하해야 할 지 몰라
그냥 “수고했다.”라는 표현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오랜 만에 쉬는 모습을 보며
감사함에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첫 돌을 지낸 아들 진얼이는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내 2세라는 것이 믿겨 지지 않을 정도로 귀엽고 활발하게
그리고 똑똑하게 자른 모습을 보며
“저 아이는 나 보다 잘 되게 키울 것이라”라는 다짐을 수 없이 하였습니다.
무엇이든 잘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첫 직장에 출근하여
2주 동안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첫 1주는 회사의 일반적인 운영이나 정신교육을 받았고
2주차는 각 부서를 돌아가며 실습교육을 받으며
각 부서의 사람들과 안면일 익히고 친분을 쌓아 가도록 하였습니다.
교육이 끝나고 부서 배치를 받을 즈음
나는 연구소를 원했지만 기술부서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데이터 통신 장비를 제작하여 설치하고 유지보수 하는 회사 였는데
기술부는 설치하고 유지보수를 하며
때로는 영업부의 기술지원 요청에 따라
영업하려는 회사에 가서 기술설명이나
때로는 프리젠테이션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기술부 직원들의 학력이 2년제 전무대학을 나왔기 때문인지
내가 배치되자 텃세와 경계로 순탄치 않았습니다.
기술부서 내에 여러 가지 Group으로 파벌이 구성되어
서로 견제와 경쟁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어 더욱 따돌림과 견제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고등학교 선배 한 분이 있어
덜 외롭기는 하였지만 그도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공고 졸업과 군대의 통신장교 경력이
설치하고 유지보수 하는 것에는 큰 도움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활하게 적응하였습니다.
대학에서 처음 공부하려고 시도 하였던 분야가
유무선 통신 분야였기 때문에
데이터 통신은 내가 즐기며 일 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고
다행이 연구소장이 지독하게 공부를 시켰기 때문에
다양하고 넓게 그리고 남들보다 먼저 신기술에 접근할 수 있었고
거기에 대학에서 컴퓨터 하드웨어 논문 쓴 경력으로
컴퓨터 회사의 엔지니어들과도 많은 지식교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6개월여 지나자 회사에서는
기술부에서 영업부서로 발령을 냈습니다.
적성이 아니라는 의견을 피력하였지만
작은 회사로서 컴퓨터 회사나
대형 컴퓨터 네트워크가 필요한 대형회사들과 거래를 위해서는
기술과 지식이 다양한 기술영업사원이 필요하다는 방침에 의해
전문 세일즈맨을 키우는 교육기관에 보내져
영업에 필요한 매너와 사람들 접근 방법
그리고 인간관계 형성 등에 대해 집중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6개월여가 더 지난 다음
나는 대형회사들의 전산실 사람들을 상대로 세미나를 하고
컴퓨터회사들과 대형 전산프로젝트 작업을 하는
그야말로 전산네트워크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기술지원은 물론 영업지원에 술자리까지 이어져
그야말로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일과 술에 쩔어 살아야 했습니다.
거기에 회사에 PC 한 대를 구매, 자재 시스템을 도입 하였는데
여직원들에게 컴퓨터를 교육시키라는 지시에 의해
업무가 끝나면 저녁 늦게까지 필요한 여직원들에게
컴퓨터 교육까지 시켜야 하는 상황에
집에는 잠만 자거나 새벽까지 술 마시고
옷만 갈아입으러 가야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더 지난,
그러니까 회사에 입하 한지 1년 반이 지난 어느 토요일
사장실에서 호출하여 갔더니 사장께서
대리 직함이 있는 명함을 건네주며
월요일에 공지 하겠지만 승진하였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생각지 못하였던 일이라 많이 기뻐하며
집에 가서 승진의 기쁨을 아내, 아들과 나누며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쉬는데
나와 함께 자주 하지 못한 아들 진얼이가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거나 내 손길을 피하는 것을 보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막 피어나는 초년 직장인인데
여러 회사들의 러브콜에도 흔들리지 않던 나였는데
내가 과연 잘 살고 있는 것인가?
내가 꿈꾸던 가정생활은 이것이 아닌데......
내가 아버지에게 응석부리지 못하고 자랐고
내가 아버지와 자주 대화하지 못하고 자랐고
내가 아버지와 내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러지 않겠다고 하였고
더 많은 사랑을 주겠다고 다짐도 하였는데
즐거운 마음에 마주 대한 아들이
지나가던 아저씨 대하듯 무덤덤하고
손길을 거부하고 엄마 품으로 안기는 모습은
나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작은 회사였기 때문에 많은 일을 감당해야 했고
여러 회사와 공동으로 작업하는 일이 많아
시간을 내가 조절할 수 없어 나타난 현상이었다.
어렵사리 취업을 하여 첫 출근 하던 날
사훈인 “초심”에 대해
“1년 뒤에도 첫 출근일의 반만 유지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장의 설명에
나는 100% 유지할 수 있다는 각오에 따라
열심히 살아온 1년 반의 후유증으로는
너무 큰 충격이었습니다.
나를 좋은 직장인으로 키워 준 회사와
내가 꿈꾸어 왔던 가정 사이에 큰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게 아닌데 하는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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