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뜰 앞 잔디에 있는 잡초를 제가하는 일입니다.
원래 있어야 하는 잔디의 곳곳에 억센 잡초들이 듬성듬성 나면서
잔디가 잘 자라지 않고 점점 잔디영역이 줄어듭니다.
원래 잡초라는 것이 뿌리가 깊으면서 넓게 퍼져
잔디가 가져가야 하는 영양분을 빼앗아 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 기에 눌려 자라기를 포기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보기가 좋지 않아서 뿌리를 잘라 떼어냈더니
머리 땜방 있는 것처럼 군데군데 공간이 생깁니다.
매주 금요일은 공장 앞뜰과 뒤뜰을 한 주씩 번갈아 가며 잔디를 깍는데
예전에는 사람을 시켜 깍다가 작년 봄부터 나빠진 경기에
불필요한 경비도 줄이고 운동 삼아 시작한 것이 제 일이 되었습니다.
“봐라 이놈들아! 사장이 이렇게 경비 줄인다고 잔디를 깎는데
너희들도 경비절감에 동참하라“고 내심 부르짖기도 하였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이요 보여줄 것 없는 과시만 되고
“집에서도 안하는 잔디 깎는다고 고생이 많수”하는
아내의 핀잔과 걱정 어린 소리를 들으며 잔디 깍는 일은 사장일로 되었습니다.
직접 잔디를 깍다 보니 그런 잡초가 보였고
제초제를 뿌려보라는 아내의 충고에 너무 잔인한 것 같아
짬짬이 시간 나면 잡초를 제거하는 소일도 합니다.
제거시기를 놓치면 훌쩍 자라 노란 들꽃으로 자신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 꽃의 밑둥이를 자를라 치면 꽃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잡초를 제거함에도 한 가지는 포기하고 놔두는 것이 있으니
이름하야 토끼풀이라 하는 White Clover입니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4H라는 마크와 함께
그리고 청소년 시절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네 잎 크로버의 좋은 기억도
토끼풀을 제거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제거하지 않았더니 번식력이 좋아서 자기 영역을 빠르게 넓히면서
웃자란 꽃이 바람에 일렁이며 향내로 자신의 존재를 알립니다.
잡초를 제거 하느라 몸을 숙이면 바람결에 살짝 숨은 꽃 향이
내가 오늘도 살아 있다는 존재를 깨우쳐 줍니다.
꽃대가 약간 굵고 길게 자란 두 개를 뽑아
꽃시계를 만들어 Accounting에서 일하는 멕시칸 여성에게 묶어 줬더니
이게 뭐냐며 놀라는 듯 나를 쳐다봅니다.
그래서 내가 주는 선물이라며 오래 간직하라고 하자
그러겠노라며 저에게 미소를 보냅니다.
대학에 다니면서 학생 데모에는 한 번 참여 해보았습니다.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휴교령이 내렸다가
신학기 시작과 함께 휴교령이 해제 된
3학년 초 학교에서 출정식 자리에 우연히 있었는데
앞에서 선동하는 학생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데모에 참여하지 않는 게 학생의 본분을 저 버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정문을 돌파 하려다 시위 진압대에 밀려 다시 학교로 들어 온 후
흩어져 시내 한 곳으로 집결하라는 소리에
버스를 탔는지 걸어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시내 데모에 참여했다가 쓩쓩 거리며 쏟아대는 최루탄 가스에
콜록거리며 뒷골목으로 도망치다 잡혀 파출소 지하로 끌려 갔다가
ROTC 신분이 들통 나 뒤통수 한 대 맞으며
풀려난 것이 제가 학생 데모에 참여한 유일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데모 구호가
나중에 대통령이 된 전두환과 당시 국무총리를 하던 신현확을
울라울라 노래와 함께 물러가라고 하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 불안한 시국에서도 학교 축제는 진행되었고
파트너를 동반하여 축제에 참여 해야 한다는 선배들의 엄명에 따라 참여한 행사가
지금의 아내와 첫 공식 데이트였습니다.
축제 초반에는 내가 회장으로 취임했다 1주일 만에 사퇴한 써클의
노상에 참여하였는데 경찰과 정부기관의 감시가 여간치 않았습니다.
암튼 그렇게 축제는 진행 되었고 마지막 날에
지금의 아내가 같이 축제에 참여하였고
둘이 첫 사진을 찍은 날이기도 합니다.
그냥 멀뚱이 서서 포즈를 취하자
사진사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웃으라는 주문에
ROTC 단복을 입은 내가 그녀의 어깨에 어설프게 팔을 걸치고
어색한 웃음을 짓고는 있지만 좋아했던 것 같은 모습을 봅니다.
그렇게 축제를 마친 다음날
1980년 5월 18일, 정확하게 30년 전 오늘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학교는 또 휴교를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5.18 광주사태”, 나증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큰 혼란을 맞이하게 되었고
ROTC인 우리는 통신축선상에 대기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학교는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어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는 아내와 함께
도서실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며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름에 훈련을 들어가며 내가 편지 쓸 상대가 되었고
답장을 보내는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코너에 몰리며 학교를 정상적으로 졸업 하게 될지 모르던
3학년 2학기와 4학년 때는 학교 밖 모임과
주변에 공식 커플로 인정되었습니다.
같이 논문을 쓰던 동료와 나는
ROTC 생활 2년 동안 모든 행사에
파트너가 한 번도 바뀌지 않은 몇 쌍 중의 커플이었고
결국은 그 두 쌍은 결혼을 하여 지금까지 같이 사는
유일한 두 커플이 되었습니다.
82-03378, 제 군번입니다.
82는 82년 임관을 뜻하고 3378은 3600여명 임관 동기 중
3378번째 성적으로 임관 했다는 것이니
거의 꼴찌로 임관을 했지요.
3, 4학년을 ROTC 간부를 하고
4학년 때 1학년들과 비슷한 41학점을 이수하고
졸업식과 장교 임관식, 임관파티에 약간 큰 모자를 쓰고
지금의 아내와 참여를 하면서 대학생활을 마치는 결과가
3378번째 성적이었답니다.
그리고 대전 통신학교로 입대 하던 날
기차역까지 따라오지 말로 집에서 인사를 하며 헤어지자는 내 제안에
남들 다 환송하는데 혼자가면 서운 할 것이라며
기차역까지 따라와 손을 흔들던 여자
서대전역에 가까이 간 기차 안에서 흘러나오던
유심초의 “사랑이여”를 따라 부르며, 그리워 했던 여자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내입니다.
2010년 5월 18일, 오늘도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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