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메 이야기

합종연행(合縱連衡)

송삿갓 2010. 5. 25. 01:50

어제 밤부터 내린 비가 아침까지 이어지더니

조금은 쌀쌀함까지 느끼는 금요일 오전입니다.

아침에 인터넷을 통해 한국 신문을 보는데

‘T.G.I.F’를 “Thanks God. It`s Friday(하느님 감사합니다, 금요일입니다)”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구닥다리라고 하며

트위터(Twitter), 구글(Google), 아이폰(iPhone), 페이스북(Facebook)의

TGIF라는 뉴스를 보고 세상의 흐름과 기술의 변화를 느꼈습니다.

 

요사이 아침에 약간은 지저분한 행복을 즐깁니다.

바로 “쾌변”인데요 원래 변비는 없지만

가끔은 개운하지 않은 배변으로 하루종이 무거운 뒤태 때문에

기분이 찜찜한 날이 있는데 지난 몇 주는

아침의 쾌변 이후에 개운하고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며

변비 있는 사람들이 이런 행복을 느끼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도 변비 때문에 고통을 받은 기억도 있네요.

1년 반전 Stroke으로 쓰러져 병원에 있을 때

첫 날을 먹을 것도 주지 않다가

둘째 날부터 먹을 것을 주는데 배변이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화장실을 갈 수 없는 상황이라

누워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 했지만

전혀 생각이 없는데 의사와 간호사가

소변과 대변이 있었냐고 물으니 그것도 스트레스고 부담이 되더군요.

 

의사의 설명이 Stroke으로 오른쪽 기능이 멈췄는데

내장의 경우도 왼쪽은 정상이고 오른쪽이 Stroke으로 기능을 할 수 없어

배변에도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을 먹기도 하고 주사약을 투여하기도 하였지만

약간의 소변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으면서

배가 더부룩하고 뒤태가 갑갑한 것이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하였답니다.

그러다 4일 째인가 5일 째 되는 날 약간의 배변이 있었지만

여전히 원활하지 않아 고생을 하였고

관장까지 고려하다가 내가 노력하겠다는 의지에 취소하였습니다.

그 때 쾌변이 좋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처럼 행복까지는 않았던 것은

지금 나이가 더 들어서 인가?

 

타이머신을 타고 28년 전으로 돌아가지요.

대학을 졸업하면서 육군 소위로 임관을 하면서

첫 입대한 곳이 대전에 있는 육군통신학교입니다.

서대전역 기차에서 내려 보니

군악대 연주와 군 버스가 대기하고 있더군요.

그렇게 320여명의 동기들이 통신학교에 입교하였습니다.

 

4개월여의 통신학교 동안

학교를 벗어나 성인생활의 여러 가지를 경험하였습니다.

첫 번째가 입교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동기들 사이에

합종연행(合縱連衡)하는 모습을 보며 체험하였습니다.

 

바로 동기회장을 투표로 선출해야 하는데

기장을 하기위해 몇몇 출마예상 동기들이 우군과 적군을 불리하고

당선 예상 가능 선을 점검하는 모습이

일반사회에서 정치가를 선출하는 투표와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확실한 우군은 자기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지역을 확대하여 표 점검을 하는데

거기서도 판세는 서울, 경상, 전라 등 세 그룹으로 나뉘어 지더군요.

서로 자기 지역을 출신학교에서 동기회장을 선출하기 위해

각 학교별 인원이 파악되고 연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우리학교는 12명의 동기생이 있었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각자 알아서 투표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투표 전날 한 지역에서 나를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만나니

우리학교 출신의 12명 표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나는 우리학교를 대표하는 사람도 아니라며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조금 있다 다른 지역에서 또 만나자고 하며

“지금 너희 학교가 캐스팅 보드”라며 도움 줄 것을 요청하며

동기회장단 한 자리를 줄 테니 도와 달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역시 같은 이유로 거절하자

동기회장을 지방에 빼앗길 수 없으니

꼭 도와야 된다는 애절한 부탁이었습니다.

그 때 느낀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성인들의 정치적 담합이라는 것은 느꼈습니다.

 

“나는 확실히 너를 돕겠다.

내일 아침에 학교 동기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겠지만 도움은 아니다.

그리고 동기회 임원 자리는 필요 없다.“라는 대답을 하였고

투표 당일 아침 학교 동기들에게

“그런 사실이 있었지만 각자 알아서 해라”라는 설명을 하였습니다.

결국은 근소한 차로 서울에 있는 학교 출신이 선출되었고

그 기장은 의사와 관계 없이 임원진의 총무로 나를 지명하였습니다.

 

아마도 도와 준 것에 대한 고마움 보다는

기장의 말을 잘 듣고 쉽게 따를 상대로 지목되었던 것 같았습니다.

총무라는 자리가 돈을 관리해야 하고

전체 살림을 해야 하는 자리인 만큼 기장과 긴밀해야 하고

기장의 뜻에 잘 따라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렇게 정치적 담합에 의해 저는 임원으로 총무가 되었고

겉으로 표현을 하지 못했지만 기장이나 그 학교출신들은

한탄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의 압력이나 말에 순종하지 않고

원칙을 고수하며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는 기장의 비용집행에

지출 거부는 그들을 어렵게 하였지만

저는 그 임무를 수행하면서 복잡한 어른들의 사회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동기생들의 주장과 요구를

학교 측과 테이블에서 조정 중재 역할 또한 총무로서 큰 업무 중 하나였는데

첫 요청을 듣고는 너무 터무니없어 기가 차면서도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단체 생활이기에 줄 맞춰가서 식기를 들고 밥을 타서 먹어야 하는데

장교이기 때문에 줄 맞춰 갈 수도 없고

사병들이 주는 밥을 타서 먹는 행위는 하지 않겠다는 터무니 없는 요청에

구대장, 중대장과 협의 하였지만 실패하고 연대장과 협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명하복의 군대에서 갓 임관한 소위가

군 생활 20년 가까이 한 연대장과의 협상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도 않겠지만

320여 명의 소위들 대표로 연대장과의 자리는

나 자신이 크게 위축되었지만 전략을 짜고 가다듬어 대화를 하여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에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요구가 끝나면 그 다음,

그것이 끝나면 또 다른 것을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대학을 졸업한 지성인들이 그리고 대한민국의 장교집단이 이래도 되는가?“

하는 회의도 있었지만 치밀하게 그리고 때로는 당돌하게 정리하는 것을 깨우쳤고

때로는 동기들을 타이르거나 강하게 압박하는 것도 배워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총무라는 일을 감당하면서

“나에게 이런 능력과 자질이 어디에서 나왔지?”라는 대견스러운 생각을 하기도 하구요

“어른들의 세상이 이런 것인가?“라고 하는 생각도 많이 하였답니다.

 

통신학교에 있으면서 나에게 두 번째 일은 절에서 수계를 받은 것입니다.

이전에 어머니를 따라, 그리고 나 자신을 수련하는 마음에서

절을 기웃거리기는 하였지만 정식으로 등록을 하거나

정기적으로 절에 다니지 않던 나는 어떤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매주 정기적으로 학교 내에 있는 절에 다니게 되었고

석가 탄신일에 해표(海表)라는 법명을 받았고

그제서야 무언가 서류를 작성할 때 종교 란에 “불교”라고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속에서도

한 가지 즐겨하던 것이 지금의 아내에게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는 것 이었습니다.

교육의 대부분이 실내에서 이론 교육 이었기에 틈만 나면 쓰고

저녁에 남는 시간에도 틈만 나면 편지를 쓰며

또 답장을 기다리는 즐거움은 주중에 갇혀 지내야 하는 답답함이나

동기들의 무수히 많은 요구들에 받는 스트레스 해소에

최대의 즐거움이었습니다.

 

물론 토요일마다 서울에 올라가 열심히 만나다

일요일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야 하기도 하였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큰 부담 없이 연애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6월 중순이 조금 지나 통신학교를 수료하였고

수료식 다음날 약혼식을 하였습니다.

 

제가 학생신분을 벗어나 또 다른 학교생활을 하였지만

성인으로서의 세상 출발을 하며 제일 먼저 배운 것이

정치적 담합과 합종연횡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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