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메 이야기

내가 태어난 어머니의 어머니 집

송삿갓 2014. 5. 12. 23:37

아버님 뵈러가기

 오늘이 426일 토요일한국에 도착한지 3일이 되었다. 어머님과 함께 아버님의 유골을 모신 공원묘원에 가기로 한 날이다. 이른 아침부터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어머님이 늘 다니시던 대로 버스를 타고 수원역까지 가고, 수원역에서 전철을 타고 이동, 그리고 다시 공원묘원에서 운영하는 버스를 타고 거의 2시간 30여분이 지나서야 공원묘원에 도착하였다. 어머님과 둘이서 여행을 하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가면서도 버스, 전철, 버스 등 여러 번의 교통수단을 바꾸면서 가는 번거로움에 미안한 마음 가득하다. 내 미안함의 표현에 어머님은 괜찮다. 아들과 함께 가는 길이 든든하고 기쁘기만 하단다.”라는 대답이다. 그렇게 어머님과 함께 한다는 즐거움에 막상 아버님 유골을 만나러 가는 느낌이나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유골을 모신 유리관 앞에 도착하였다. 유골함에는 아마도 천안함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스티커가 잔뜩 붙어있는 곳에서 찍은 듯 한 사진, 조그만 성경, 돋보기, 작은 조화 등이 조그만 공간을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렀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지만 흐르는 눈물을 어머님께 들키지 않기 위해 천장으로 고개를 향하는데 여보, 오늘은 당신 아들 데리고 왔어요. 좋지요?”하며 살아 있는 사람과 대화하듯 이야기하는 어머님의 말소리가 내 마음을 더욱 흔들어 댄다. 내가 뭔가 많이 잘못 한 것 같기도 하고 마음속에 맺혀있는 아픔을 덜어내며 어리광부리고 싶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암튼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한다. 그렇게 마치고 떠나려 하는데 진도에서 일어난 세월호 사고의 한 희생자 학생의 장례차가 들어와 안치하고 있었다. 흐느끼는 가족이나 친구와 친지들의 모습에 애석함이 더해진다.

 

 내가 태어난 어머니의 어머니 집에 가는 길

 아버님의 성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길을 떼면서 예정에 없는 여행을 이야기한다. 어머님과 나,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지만 아주 쉽게 어머니의 친정이자 내가 태어난 충청남도 연기군 달전리 1, 아니 지금은 세종 특별자치시 어쩌구 저쩌구, 윗다락골로 향한다. 아마도 천안까지 전철이 연결되어 있고 전의역에서 다락골 사이를 오가는 버스가 자주 있어 저녁에 충분히 돌아 올 수 있다는 교통의 발달이 예정에 없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 공원묘원의 버스를 타고 전철역(세마)에 도착하여 천안으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 어머님은 소풍을 가는 소녀처럼 조금은 수다스러울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한다. 기차역들을 지나면서 어린 시절 방학 때 외할머니 댁에 가던 생각이 났다. 내 기억에 어른 없이 외할머니 댁에 첫 여행이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동생과 함께 갔던 기억이다. 오십대 중반인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한 여행으로 생각되지만 어머님은 용산역에서부터 조치원역까지 모든 역의 이름을 순서대로 암기해야 보내 준다고 했었다. 그래서 용산, 영등포... 안양.. 수원.. 송탄.. 평택.. 오산.. 천안, 소정이 전의, 전동, 조치원 등의 순서를 수백 번은 연습시키고 동생 손 절대 놓지 말고 창밖에 지나가는 역 이름 절대 놓치지 말고..”라는 다짐을 수십 번 하고서야 용산역에서 동생과 내 손을 놓아 주셨다.

 

 그리고 시골로 가는 길, 나는 어머님의 다짐과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 화장실 가겠다고 고집 부리는 동생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고 시선을 차장밖에 고정시켜 역이 하나 지날 때마다 용산역에서 조치원역까지 암기 하며 몇 번째 역인가를 확인하곤 했었다. 어떤 어른은 두 아이가 애처롭다는 듯이 바라보고 뭔가를 먹다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생의 시선에 먹으라며 건네 줬지만 누가 뭘 줘도 절대 먹지 말고 어디로 가자고 해도 절대 가면 안 된다는 어머님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단호히 거절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천안 쯤 도착하면 두 정거장 남았다는 안도와 함께 혹여나 내리는 것을 지나칠까 걱정이되어 문이 없어 유난히도 덜컹거리는 소리가 큰 출입구에 가서 동생이 손을 꼭 잡고 지나치는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했었다. 드디어 전의 역 달리던 기차가 멈추면 다른 역과는 정말 다른 듯 한 내 시골의 냄새가 확 풍겨오면서 내가 해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내 자신이 자랑스럽기까지 하였다. 새벽밥을 먹고 출발해서 점심때를 훨씬 지나서야 도착한 시골의 역, 발을 내 딛기가 무섭게 광주리를 든 할머니가 쪼르르 달려와 옥수수 사세요, 찰옥수수하며 무럭무럭 김이 나는 옥수수를 불쑥 내밀면 허기진 배에 덥석 받아들고 싶은 유혹이 있지만 동생 손과 가방을 잡은 양손을 불끈 쥐며 참아야 해하며 나를 다스려야 했었다. 어머님께 그런 이야기를 하니 내가 그랬었냐?”하며 내 등을 토닥거리신다.

 

 천안의 호두과자

 어머님의 이야기와 옛 생각을 하는 동안 그래 오래 지나지 않은 시간에 전철은 천안에 도착하였다. 어머님과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어머님 뭐 드실래요?”

 “난 아무거나 좋다. 자네 좋은 거 먹어라

 “그래도 어머님이 드시고 싶은 거 나도 먹을래요, 그런데 저는 점심 전에 호두과자 먼저 먹고 싶어요.”

그래라

 천안의 명물 호두과자, 어린 시절에는 생각하지도 못하다가 어른이 되어 회사를 다닐 때 혹여나 운전을 하며 지방출장을 가면 거의 매번 일부러 천안의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호두과자를 사곤 했었다. 아이들 특히 아들이 좋아해서 천안역 근처의 호두과자점에 들려 제법 큰 상자의 호두과자를 선물로 준비하였다. 그곳의 호두과자는 다른 곳의 과자에 비해 호두와 팥이 많이 들어 맛이 더 좋았기 때문에 아이들을 위해 선물로 준비하곤 하였다. 적당량의 호두과자를 사서 먹고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전의역으로 향한다. 그리고 전의역에 도착하여 시골집의 조카에게 줄 과자와 과일, 그리고 외할아버지, 할머니, 외삼촌의 묘에 가서 따를 소주와 안주를 구입하고 다시 윗다락골로 향하는 버스를 탄다.

 

 버스를 타고 철길을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물으신다.

 “저 개울에서 고기를 잡던 생각나니?”예 그럼요, 예전에는 저기에 큰 나무가 있었는데 그 나무 밑에서 잡았었죠

 정말로 어머님과 나 둘만의 아스라한 추억이다. 왜 그랬는지, 얼마 동안인지 기간은 생각나지 않지만 외갓집을 떠나 전의역 근처의 작은 집에서 살았던 기억이 있다. 그 때 먹을 것이 많지 않아 어머님과 함께 물고기를 잡았던 추억이다. ! 그러고 보니 그 때 내 동생들은 어디에 있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멀고도 가까운 윗다락골 가는 길

 버스는 제법 큰 동네로 기억되는 영당리, 마산 모퉁이, 양곡리에 다다른다. 양곡리는 내가 입학해서 1, 2학년을 다녔던 달성국민학교가 있고 저의역과 내가 태어난 윗다락골 사이에 유일하게 상시 열었던 조그만 전방이 있는 동네다. 그 전방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가 버스에 타고 가는 사람들과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한다. 내가 다녔던 무한정 크게만 느껴졌던 달성국민학교의 운동장에는 숱이 적은 대머리 아저씨의 머리처럼 듬성듬성 잡초가 무성이 자랐고 건물의 중앙에는 무슨 삶의 체험장이라는 간판이 크게 걸려있다. 버스는 지금은 없어진 상여를 보관해 두었던 상여집터와 아랫다락골을 지나 윗다락골 입구에 어머님과 나, 그리고 다른 한 중년여성을 토해내고 냇가를 건거 부거실이라는 다른 산골동네로 향한다.

 

 같이 내린 중년여성이 내 사촌의 이름을 대며 “00 고모 아니세요?”라며 어머님께 인사를 한다. 그렇게 안면 인사를 하고 마을로 들어서는데 내 눈길을 잡으며 덜컥 마음을 맺히게 하는 나무가 나를 반긴다. 우리는 둥구나무라고 했던 마을 입구의 정자나무가 숱이 적어진 할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처럼 스스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는지 가지 밑에 철로 된 받침대의 도움을 받고 오랜만이야하는 듯이 나를 반긴다. 하지만 예전에 그렇게 크게 느껴졌던 그래서 동네의 노인정이자 아이들의 놀이터로 사용되었던 웅장함은 사라지고 병들어 쉰 기침을 하듯 두 개의 지팡이를 짚고 비스듬이 서 있는 모습에 너도 세월을 비켜가지는 못했구나 하는 자조 섞인 읖 조림이 절로 나온다. 어머님 또한 예전에 그리 컸던 나무가 이렇게 늙었구나하는 안쓰러움의 한숨을 토해내신다.

 

 

 호두나무 시골집

 내가 태어난 외갓집 앞마당에는 큰 호두나무가 있었다. 어느 해인가 성인이 된 뒤 찾았을 때 외갓집은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하였고 있던 집은 헐어 조그만 사슴농장이 되어 큰 아쉬움을 가졌었다. 뒤뜰에 있던 앵두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 모두 사라졌지만 앞마당에 있던 호두나무는 그대로 있어 그나마 아쉬운 마음을 달래곤 하였다. 이번 방문에서도 아쉬움과 함께 호두나무로 눈길을 주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크고 웅장하던 호두나무는 늙어 그런지 아니면 병들어 그런지 이미 죽어 잔가지는 없어지고 몇 개의 큰 가지만 남아 있고 중간에 마을 방송용으로 쓰이는 듯한 나팔 스피커 하나만 덩그러니 매달려 있었다.

 

 어린 시절 호두가 달리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짙은 녹색의 호두를 물가에 가지고 가서 작은 바위에 문지르면 베이지 색의 속살이 들어나고 계속 문질러 속살이 벗겨지면 뽀얀 피부의 아이와 비슷한 베이지 색에 가까운 호두 알갱이가 나타나고 주먹 만한 돌로 두드려 깨면 애호박 속살과 같은 호두알갱이가 나왔다. 조금 이른 것은 익지 않아 거의 물에 가까워 먹을 수 없어 버리기도 하였지만 조금은 딱딱해진 알갱이를 씹으면 약간은 비릿하지만 나름 고소함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고 나면 손은 누렇게 물들어 흙이나 오톨도톨한 돌에 문질러 벗기면서 이른 호두맛의 여운을 즐겼고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인 가을이 시작될 무렵부터 아침 일찍 마당에 나가면 잘 익은 호두가 떨어져 발로 비틀려 밟기만 해도 저절로 껍질이 까지면서 단단한 황토색 호두알이 툭 하고 삐쳐 나오고 그것을 깨서 먹는 즐거움은 물론 잘생긴 놈 두 알을 골라 다른 호두를 까서 껍질에 비벼대면 호두 기름을 머금어 반드르르한 빛을 내고 비벼대면 드득드득하는 마찰음 소리에 손안에 호두가 있음을 알려주는 시골의 정취를 느끼게 해 주었던 호두나무였는데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듯 늙고 병들어 자신의 생을 다한 호두나무를 보면서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외할머니 산소

 부엉골과 말령골 사이에 외할아버지, 외삼촌, 외할머니 산소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외할아버지 산소는 원래 다른 곳의 공동묘지에 있었는데 외삼촌이 돌아가시기 얼마 전 외할머니 산소 위쪽으로 이장하였다. 이장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외삼촌이 돌아가셔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산소의 중간쯤에 자리하였는데 아마도 외할아버지의 산소 이장은 외삼촌의 숙원사업이었는지도 모른다. 세 분의 산소는 내 기억으로 담배농사를 지었던 밭 혹은 그 주변으로 기억된다. 우리가 서울로 이사 후 여름방학 때 외할머니댁을 방문하면 담배농사가 한창이었고 쉬는 시간이면 종이에 궐련을 말아 피우던 외할머니는 밭과 밭 사이 경사진 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요강만한 늙은 호박을 따서 양쪽에 큰 돌로 받치고 그 사이에 불을 때 호박을 구워주셨는데 솔직히 맛있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지만 다른 군것질이 마땅치 않은 시절이라 호호 불며 수저로 파먹던 아련한 추억이 있다. 외할머니 산소는 그 호박을 구워먹던 그러니까 돌과 잡초가 많았지만 쉼터로 사용하던 곳에 자리하였다.

 성인이 되어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혹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 내가 처음 학교를 입학하였던 양곡리의 전방에 들려 2홉들이 소주 한 병, 마른 오징어 한 마리, 종이컵 하나, 담배 한 갑에 성냥을 사서 올라와 술 따르고 오징어 찢어 안주로 드리고 담배 한 개피에 불붙여 꽂아 드리고 도와 주십사하며 절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엉엉 울기며 신세한탄을 하기도 하던 곳이 외할머니 산소다. 그러다 하늘을 보고 벌렁 누우면 따갑고 눈부신 햇살을 온 몸에 받으면 뜨거운 피가 몸을 휘감으며 아픔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기도 하고 스르르 밀려오는 잠에 취해 한 숨 자고 나면 쌓였던 피로가 풀리기도 하던 곳이 외할머니 산소다.

  그런 외할머니 산소를 오르는 길이 예전에는 꼬불꼬불 오솔길이라 길게 자란 풀들이 바지를 스치기도 하고 풀섶에 숨어 있던 메뚜기나 곤충들이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듯 푸르럭 하고 날기도 하고 숨어서 눈알 굴리던 개구리가 폴짝거리며 줄행랑을 치기도 하였는데 이제는 시멘트로 잘 포장되어 풀이 바지가랑이를 잡지도 않고 풀벌레가 풀썩거리지도 않는다. 꼬불꼬불 졸졸 흐르던 계곡물은 길옆을 따라 곧게 잘 정돈되었지만 정겨움은 덜하다.

 

 이름이 달라지고 순도가 낮아진 소주에 마른오징어 대신 오징어 땅콩과자를 들고 산소를 찾았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의 산소 순으로 술을 따르고 다시 외할머니 산소에 한잔을 더 따르는데 설움이 복받쳐 오른다. 무슨 설움인지도 왜 그런지도 모르게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훅하고 올라오는 뜨거운 것이 같이 간 어머님께 들킬 새라 고개가 절로 하늘로 향한다. 그렇게 바라본 하늘 참 맑다. 그대로 잔디에 몸을 던진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 뿌연 하늘을 보며 짓눌리고 답답한 가슴이었는데 갑자기 뻥 뚫린다. 그러다보니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 같다.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 산소에 잡초가 많다는 궁시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늙은 몸을 기어 다니듯 양팔을 묘에 대고 풀을 뽑는다. 어머니의 어머니 산소에 누워 어머니의 한탄 같은 궁시렁을 들으며 꿈을 꾸듯 스르르 잠에 빠진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포근함이다.

 

 

 쑥과 산나물

 산소를 내려오는 길에 어머니는 몇 걸음마다 멈추며 어유 저 쑥 좀 봐, 뜯어다 쑥버무리 해먹으면 맛있겠다. 어유 저 나물 좀 봐, 뜯어다 삶아서 파 송송 썰어 넣고 다진 마늘에 소금 넣고 버무리다 들기름 한 방울 넣으면 맛있겠다.”, “애비야! 좀 뜯어 가면 안 될까?”, “저 산에 버섯이 많았는데, 젊었을 때 무서움도 모르고 미친년 널 뛰듯이 버섯이며 고사리 캐러 다녔는데.” 입이 말라 입 주변에 허옇게 태가 끼도록 쉬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훑으신다. 혹여나 쭈그려 앉아 쑥이나 나물 캐는 것은 아닌지 뒤를 돌아 수시로 어머니의 걸음을 확인하면서 머릿속은 과거로의 여행을 떠난다. 쌀은 한 톨도 들어가지 않은 꽁보리밥에 고사리, 싸리버섯, 때로는 호박 나물에 고추장을 넣어 쓱쓱 비비고 멀건 된장국에 먹던 시골 밥, 나는 지금도 그런 비빔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밥을 보기만 해도 소화가 되지 않고 절로 고개가 돌려진다. 간혹 비빔밥을 먹기는 하지만 고사리 등의 조금이라도 질긴 나물은 넣지 않고 고추장도 거의 넣지 않거나 아주 조금 넣고 된장국이나 찌개를 흥건하게 넣어 거의 죽에 가까운 비빔밥을 먹을 뿐이다. 아마도 굶주리던 시절 어쩔 수 없이 먹었던 밥에 대해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선오이 무침

 산소에서 내려오니 늘 그렇듯이 외숙모님이 자고 내일 가라고 하신다. 짧지만 그 속에는 많은 뜻이 있다. 풍족하게 차려 줄 수 없는 식탁에 대한 미안함, 불편한 잠자리이지만 뭔가를 더 해 주고 싶은 마음, 예정되어 있는 이별에 대한 아쉬움에 대한 한탄이다. 만일 하루 잔다고 하더라도 다음 날 하루만 더 자고 내일 가라고 할 것이다. 또 늘 그렇듯이 내가 안 된다고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시간이나 때에 에 관계없이 밥 짓기를 시작한다. 밥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아니면 내가 배가 부르던 고프던 관계하지 않는다. 그렇게 뚝딱 차리는 밥은 늘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조금은 뜨거운 밥이다. 동원할 수 있는 것 모든 찬거리로 뚝딱 몇 가지의 반찬이 동시에 만들어 진다. 내가 시골밥상이 별로 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한 가지 깊은 추억의 반찬이 있다. 농사철에 갑자기 들이 닥치면 찬거리가 많을 수가 없다. 찬거리를 파는 가게가 없는 동네에서 가장 쉽게 찬거리를 가져올 수 있는 곳이 장독대와 밭이다. 그 중에서도 웃자라 초록색을 지나 황토색에 가까운 점박이의 조선오이가 농사철에 급히 조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찬거리다. 조금은 딱딱해진 껍질을 두텁게 벗겨내면 한얀 속살이 들어나는데 칼질과 칼질 사이에 조금씩 남는 녹색의 껍질이 속살을 더욱 하얗게 보이게 한다. 참외 껍질 깍아 내듯 얇고 길게 썬 속살의 오이를 고추장을 넣고 쓱쓱 버무리면 뚝딱 만들어지는 조선오이 무침이 끝난다. 입에 넣으면 첫 맛은 짭쪼름하고 매운 고추장 맛에 이어 아주 좋은 맛은 아니지만 얇게 썬 오이가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시골에 왔음을 느끼곤 하였다. 그 맛을 느껴보려고 조금 늙은 오이를 사서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외숙모님이 자고 내일 가하면 가장 먼저 그 조선오이무침을 기대하고는 하였었다.

 

 다시 볼 수 있을까?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난 뒤 자고 내일 가라는 외숙모님의 바램에 순응한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불편한 잠자리, 넉넉지 않은 먹을거리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 넉넉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방문한 것이 거의 없었고 거기서 자면 뭔가 큰 폐를 끼치는 것 같은 마음, 그리고 하루를 잔다고 해도 늘 아쉬움은 있을 거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거다. 어머님과 함께한 이번에도 점심도, 저녁도 아닌 시각에 저녁을 먹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걸 때면 외숙모님은 자고 가라고 애절하게 이야기 하면서도 고개를 떨구어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아마도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그럴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버스정류장까지 걷는 길을 바로 걷지 않고 길 양쪽 끝을 갈지자로 왔다 갔다 하며 걷는다. 그 만큼 아쉬움이 크다는 이야기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부터인가 헤어짐의 시간에 그 길을 걸을 때면 이 분을 또 볼 수 있을까?’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마음이 일어난다. 외숙모님은 내 아버지와 같은 고향이다. ’이 분이 고향을 떠나 이 먼 곳까지 시집을 와서 친정을 몇 번이나 방문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만큼 자신의 고향이 이곳이 되었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고 묻힐 곳이 되어버린 이곳, 이 분이 내가 다음에 올 때도 이곳에 계속 살고 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다. 그래야 다음에 또 왔을 때 자고 내일 가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겠지. 내가 태어 난 어머니의 어머니 집, 마음이 아프고 힘들고 지칠 때 찾아오던 곳, 내 아들이 태어나 기쁨이 넘칠 때 건강한 아들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찾았던 외할머니 산소가 있는 곳, 하얀 속살의 늙은 오이 무침을 먹던 이곳, 다음에 왔을 때 외숙모님이 안 계시면 얼마나 허전할까?

 

 그렇게 어머님의 어머니 집, 친정이자 나의 외할머니 댁의 여행을 마무리하였다. 내 마음속의 영원한 고향을 어머니와 다시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