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메 이야기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의 저자 유복렬을 만나고

송삿갓 2014. 4. 20. 12:30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서정주님의 “국화 옆에서”의 시작 부분이다.

 지난 4월 7일 비가 오는 월요일, 몸이 불편하여 출근을 하지 못하고 아픔을 달래고자 잡은 책이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였다. 책을 잡고 한 번도 일어나지 않고 끝가지 읽은 후 단숨에 책 읽은 후기까지 써서 블로그에 올리고도 아쉬움이 가시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이 여운을 다스릴 수 있을까?’ 하다가 생각한 것이 우리 기독실업인회 월례모임에 한 번 모셔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방법을 궁리하던 중 의궤의 첫 귀환 일자가 2011년 4월 13일이었으니까 오는 4월 13일이 만3년이니 그것을 핑계로 축하 꽃다발을 보내면서 부탁을 해볼까 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아뿔사 13일이 일요일이다. 그럼 어쩐다 하는 고민에 빠졌다. 

 다음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송사장님, 댁에 송삿갓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는 사람입니까?”
다짜고짜 하는 말도 그리 공손하지 않았고 또 처음 전화 건 사람에게 신분을 밝히는 것이 그래서 조금 뜸들이다

“그런데요, 누구시죠?”
“나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애틀랜타 여성문학회 회장입니다.”
“그래서요?”
“내가 송사갓을 찾으려 이틀을 헤맸어요.”하면서 내가 알만한 사람들을 들먹이며 나를 찾으려 수소문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 이시죠?”
“다음 주 토요일 점심에 귀한 분하고 식사를 하려 하는데 같이 했으면 해서요.”
‘이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하며 조금 침묵으로 시위를 하는데 전화를 건 용건은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의 저자와 점심하는데 초대 한다는 이야기다.
‘안 그래도 어떻게 하면 우리모임에 모실까 하는 분을 알아서 만나게 해주겠다니 아니 이게 웬 장땡인가?’
환호를 하고 싶은 속내를 들어 내지 않고 듣고 있자니
“불로그를 봤는데 어쩜 그렇게 글을 잘 쓰느냐?, 정말 만나고 싶다.”하며 부연 설명이 이어졌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내가 책의 저자 유복렬을 위해 ‘매일 매일 무지 좋은 하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며 앞으로의 여정을 위해 기도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생각하며 기쁨의 주먹을 불끈 쥐게 하였다. 며칠 뒤 여러 가지 사정상 점심식사는 하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애틀랜타 여성문학회 모임에 초대를 받고 저자 유복렬을 만난 것이 오늘이다. 

 실은 책의 저자 유복렬을 대면한 것은 오늘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2013년 12월 한 송년모임에서 한 테이블에서 같이 식사를 하며 만났다는 것을 오늘 만남에서야 알았다. 그 당시 나는 모임이 처음 나갔던 터라 누가 누군지 몰랐고 활발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며 참 밝은 사람이고 회원 중의 한 사람인가 하는 인상만 기억하고 있다가 오늘 악수를 하면서 두 번째 만남인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의 저자 유복렬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적 꿈이 작가였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라고 불리는 것이 좋았다고 설명을 하는데 정말 꿈을 이룬 소녀같이 밝고 맑은 모습으로 이야기를 한다.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편견을 고치기로 하였다. 첫째는 작가 유복렬에 대한 생각이다. 어느 영화에서 "나 이대 나온 여자예오"하며 당당하면서도 깍쟁이 같은 대사에서 나온 대학을 졸업하였고 프랑스 유학에 불문학박사, 그리고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하였고, 시험으로 전문외교관이 되었고 프랑스와 대한민국 간에 정상회담통역은 물론 많은 고위급 회담의 통역을 하였고 20년 동안 신념과 정렬을 쏟아 부어 의궤를 귀환 하게한 열혈여성, 커리어 우먼, 에궁 생각만 해도 딱딱하고 고집 드세고 조금만 건드려도 싸움닭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에서 '논리에는 논리로 수다에는 수다로'라는 제목 부분에 소음을 항의하러 온 프랑스 아줌마에게 프랑스어를 처음배운 고등학교 1학년 이래 가장 빠른 속도로 말을 뱉어 낸 대사에서 "우리는 당신들처럼 집 안에서 신발을 싲고 살지 않아요. 내가 지금 맨발 인거 안 보여요? 신발 소리가 시끄럽다구요? 신지도 않은 신발 소리가 어떻게 납니까? 게다가 도대체 애들이 몇 시에 학교 가는지 아세요? 8시 반에 갑니다. 그게 이른 시간입니까? 지금 당신 늦잠 자라고 애들 학교 보내지 말라는 건가요? 애들 학교 그만둘까요? 오늘 저녁 우리 애들이 계단에서 시그럽게 한 것 넝말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절대 사고할 게 없어요. 그러니 그리 알고 그만 가주세요!"
 
 불어의 r발음을 가장 힘들어 하는 한국 사람이 속사포같이 쏟아내는 모습을 상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움을 느낀다. 그런데 오늘 만나 강연를 듣고 같이 차를 나누며 이야기 해 보니 그게 아니다. 이야기 중간 중간에 프랑스를 “문화재를 약탈해간 놈들”, 협상과정에서 프랑스 쪽 사람들의 반응에 “너는 맘껏 떠들어라, 나는 모른다.”라며 벽창호라는 표현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에서 우리네가 쓰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그냥 친근한 ‘동네 아줌마’다. 거기에 차를 나누며, 연탄가스 중독, 교실의 조개탄 난로, 그리고 그 위에 도시락, 혼식장려 등 나와 동시대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 함께 소주 한잔 하고 노래방에서 목이 터져라 통속적 뽕짝을 같이 부를 수 있는 친구도 될 수 있다는 친근함으로 다가왔다.

 두 번째 깨진 것이 외교관에 대한 내 편견이다. 외교관 하면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닌 우리들 위에 군림하려하고 지도하려하고 지네들만 국가를 위한다는 듯이 뻐긴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보따리장수 같은 삶은 물론 투철한 직업 정신, 끊임없이 배우려는 노력에서 이미 내 편견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오늘 외교관 유복렬을 만나면서 크게 잘못되었다는 부끄러운 반성과 함께 이전의 외교관에 대한 인식을 Delete하고 열심을 다하여 우리들과 함께 노력하며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친구 같은 한민족이라는 새로운 틀로 입력하였다.
 
 작가 유복렬은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라고 하였다. 의궤 반환의 협상을 하는 과정이나 외교관의 임무 모두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부터 출발하여 관계로 맺는 것 이라며,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실천하는 자신은 지금 외교관이라는 직업이 적성에 딱 맞는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이야기 하는 표정에서 크게 느낀 것이 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직업에 행복을 만끽하며 즐기고 있구나!‘ 하며, 이런 참 좋은 사람과 인연을 이룬 것에 내 마음의 기쁨이 가득하였다.

 만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입에서 맴도는 시가 있었다. 바로 서정주님의 ‘국화 옆에서’다. 외교관 유복렬이 의궤를 만난 것이나, 나에게 책을 빌려 준 친구를 만난 것이나, 건강 때문에 출근하지 못하고 책을 읽게 된 것이나, 그로 인해 오늘 내가 작가 유복렬을 만난 것이나 그냥 일어난 것은 아니다. 아마도 잠을 자면서도 머리에서 맴돌 것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Bonne chance!!!

 오늘도 이렇게 좋은 인연하나 만들었다.
 Apr 19, 2014

'그리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맘이 내 몸을 사랑하는 날  (0) 2014.05.19
내가 태어난 어머니의 어머니 집  (0) 2014.05.12
4월의 첫 월요일 아침에  (0) 2014.04.07
보금자리에 돌아왔다  (0) 2014.03.27
자목련 이야기  (0) 2014.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