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난 느낌이 참 거지같다. 벌떡 일어나 집으로 향하는 길, 8층의 수영장에서 11층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의 UP 버튼을 누르고 기다고 있는 짧은 시간 내내 찝찝함이 사로잡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 사람 내리고 남은 두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우호적이지 않은 것 같다. 11층을 누르고 위로 올라갈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푹 꺼지듯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안에 있던 두 사람을 원망어린 눈빛으로 바라 봤다. 4층에서 멈추자 두 사람이 내리고 내가 눌렀던 11층 불마저도 꺼지면서 엘리베이터는 Reset, 다시 11층을 누르면서 속으로 “짜식들 내가 11층 누를 때 아래로 내려간다고 알려주지”라는 생각을 했지만 “거지같은 마음에 내가 확인도 하지 않고 탄 것이 잘못이지 그들이 뭔 잘못을 했나”라는 반성을 한다.
오랜만에 소설책을 들었다. 거의 지난 반년동안 스터디 북인 지침서 혹은 수필 같은 책만을 잃었지 소설을 멀리하였다. 뚜렷한 원인은 없었지만 내 자신에 대한 Guilty의식 혹은 갈기갈기 찢긴 것 같은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 자신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과 조금이라도 배움을 게을리 하면 시대에 뒤떨어지고 도태 될 것만 같은 마음에 사로잡혀 그랬는지 모르지만 행복을 찾는 방법,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 비즈니스를 더 잘하기 위한 방법 등의 책에 매달리다 보니 소설은 뒷전으로 밀렸다. 아니 소설을 읽으려 책꽂이에서 빼서 책상위에 올려놓기까지 했지만 날 기다리는 눈길을 외면하고 표지도 열지 못하며 2~3개월이 흘렀다.
지난번 한국을 방문 때 서점에 Best Seller 1위가 소설 「me Before You」(조조 모에스 지음)였다. 소설이고 한 권으로는 조금 두껍다고 느꼈던 터라 그냥 지나쳤다가 다른 책을 모두 고르고 문학의 다양함에 대한 배려와 분홍색의 「Before」라는 글씨가 자꾸 마음을 끌어 마지막 순간에 선택한 책이다.
한국을 다녀와서도 가끔 눈길을 주기는 하지만 최근에 소설을 가까이 하지 않는 내 성향으로 언제나 읽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루다 급기야 토요일인 어제 책을 잡았다. 갖힌 공간에서 읽는 것이 싫어 수영장에서 강한 햇살을 받으며 읽기 시작하였다. 첫날 얼굴에만 선크림을 바르고 반바지 수영복에 웃통을 벗고 몇 시간을 읽은 덕분에 가슴이며 배, 팔뚝, 다리에는 옻칠을 한 듯 잘 익어가는 통돼지 바비큐처럼 붉은 색으로 바뀌고 어깨며 가슴이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리고 쓰라리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오늘은 가슴과 팔다리에 선크림 잔뜩 바르고 거울을 보니 정말 기름 좔좔 흐르며 익어가는 통돼지 바비큐랑 똑같다는 생각을 하면서까지 계속 읽어갔다. 그렇게 읽기를 마치고 거지같은 마음이 이어지니 태양에 지진 몸은 불덩이처럼 더욱 뜨거워지고 가슴이며 등짝의 쓰라림이 깊이를 더해간다.
책에서 남자 주인공은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 현실에서는 죽음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라도 하듯이 대체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는 의학으로 안 되면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기적으로 살려내기도 하는 데 이 소설에서는 35세의 남자 주인공 [윌리암 트레이너]를 죽였다. 물론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나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서도 주인공은 죽지만 이 소설 [me Before you]에서는 자신이 공개적으로 선택한 자살이라는 죽음으로 마무리를 한다.
영국 런던에서 M&A로 천재적인 경영자로 이름을 날리고 스포츠 광이자 놀기를 좋아하는 빌은 교통사고로 가슴아래 하반신이 마비되어 생각하는 것과 말 하는 것 이외에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고 그러기에 선택권에 제한을 받는 것에 거부라도 하듯 본인이 죽음을 택한다. 물론 교통사고의 후유증과 합병증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그래서 더 이상의 민폐를 없애는 방법으로 조국인 영국을 떠나 스위스에 있는 자살 전문병원에서 자살도움을 받아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다.
윌은 자살이라는 선택을 죽기 6개월 전에 결심하였다. 하지만 회복할 것을 기대하는 가족들은 반대에 부딪치자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하여 두 번의 자살을 시도한다. 결국 가족들은 빌의 선택을 따르기로 하지만 6개월의 시간을 요청하고 윌은 동의 한다. 6개월 이라는 시간을 번 가족들은 그 기간 안에 윌의 마음을 돌릴 계획을 생각하지만 뚜렷한 방법이 없다. 바람기 많아 외부로 도는 아버지, 할 일이 많은 지방판사인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원하는 곳에서 펼치기를 위해 호주에 가 있는 동생이 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궁리 끝에 함께 대화도 하고 생활의 활력소를 불어 넣을 간병인을 붙이기로 한다. 그리고 찾은 사람이 가난하고 보잘 것 없지만 발랄하고 수다가 많은 26살의 [루이사 클라크]를 간병인이라는 명분으로 고용한다. 가족들은 루이사가 자신들의 희망대로 윌의 마음을 돌려놓을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루이사는 첫 2개월 동안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지만 결국은 윌의 마음을 돌리려 하는 윌 가족들 원래목적을 알아차리고 그만 두려한다. 하지만 본인은 실직하여 집업소개소에 의지하여 일정치 않고 험한 직업들을 전전하고 있었고 아버지의 실직이 예상되어 있어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등의 가족 부양책임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한다. 동생의 충고와 도움으로 의욕을 가지고 윌의 마음을 돌리려는 계획을 가져본다. 세상은 순탄치 않은 것, 뭔가 계획을 하면 그 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온갖 어려움의 장애물에 7년 동안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 마저도 질투로 맞선다.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것까지 감수하며 윌의 마음을 돌리려는 노력에 윌과 사랑의 감정까지 가지면서 마음을 바꾸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윌의 선택대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비극적인 결말의 소설이다. 윌은 죽기 전에 자신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한 루이사에게 적지 않은 유산을 물려주면서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의해 살아가라는 편지를 남긴다.
26년을 사는 동안 비정상적이고 불안한 가정, 너무 가난해서 자신의 뜻을 펼치거나 선택에 제한을 받고 동네 근처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처절한 인생을 살던 루이사, 윌의 마음을 바꾸려는 노력하는 과정에 전에는 접하지 못하던 새로운 세상으로 눈을 넓혀가면서 자신의 인생설계도 그려나갈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을 한다.
둘의 사랑이야기가 전개 될수록 윌이 마음을 바꾸고 어려움을 극복하며 잘 사는 것으로 통속적인 소설을 기대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윌의 죽음으로 끝나자 참 거지같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내가 이런 결말의 소설을 읽으려 이틀 동안 지글지글 끊는 태양에 몸을 구워가며 읽었나?”라는 것에 이르자 ‘뒷맛 참 엿 같다“라는 심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책을 일는 내내 문장력에 매료되어 좋았다. 다른 작가들에게 미안하지만 ‘근 몇 년 동안 읽은 소설 중에 문장이나 표현력이 가장 좋았다’라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빌의 엄마가 루이사를 처음 고용했을 때 빌은 수염과 머리를 길러 흉물스럽기까지 하였다. 누구도 감히 머리나 수염을 깍으라 요청할 수 없기도 하였지만 거의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었던 윌은 머리나 수염 깍는 것만이라도 자기의 의지를 표명하려는 듯 기르게 되었던 것이다. 루이사는 윌과 조금 가까워지면서 수염과 머리를 자를 것을 제안하였고 윌이 받아들여 루이사가 면도를 하는 과정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이상하리만큼 내밀한 느낌이었다. 윌을 면도해 주는 일은. 점차 나는 그간 휠체어는 장애물이 될 거라고, 장애 때문에 어떤 종류의 육감적인 관계도 배어들어올 수 없을 거라고, 미리부터 전제하고 있었다는 것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그게 그런 게 아니었다. 이렇게 바싹 붙어서, 손길이 닿을 때마다 팽팽하게 긴장하는 살갗을 느끼면서, 그가 내뱉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얼굴과 얼굴이 겨우 며 센티미터밖에 덜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살짝이나마 평정심을 잃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반대편 귀가지 수염을 다 깎았을 무렵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표지를 넘어서버린 것처럼 약간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전동 휠체어에 의지해서 겨우 지정된 공간만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그래서 늘 불만과 불평이 가득하고 거의 모든 사람에게 삐딱하게 반응 하는 하반신마비환자를 의무감에 면도해 주면서 ‘팽팽하게 긴장하는 살갗을 느끼고’,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어서버린 것처럼’이라는 표현은 웬만한 내공이 아니면 글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윌의 친구가 자신의 공연에 초대를 하였다. 윌은 불구자인 자신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극도로 싫어한다. 똑똑하고 세상 부럽지 않게 살던 사람이 사고나 병으로 인해 초라해지고 볼품없어진 자신을 노출시키길 거려하는 것은 거의 당연시 되는 현실이다. 자기가 하던 모든 일에 대해 성공을 이루며 만족스럽게 살던 윌은 불구가 된 후 바깥세상과 접촉하기를 꺼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루이사는 그러한 윌을 밖으로 끌어 생활과 생각의 패턴을 바꾸기 위해 거의 협박을 하여 자신은 지난 26년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연주회에 윌과 함께 가게 된다. 연주회가 시작되는 장면이다.
“지휘자가 앞으로 나와 단상을 두 번 톡톡 두드리자 거대한 침묵이 내리 갈렸다. 그 정적이 느껴졌다. 한껏 기대에 차 있는 객석이 느껴졌다. 그때 지휘자가 지휘봉을 내리자 갑자기 만물이 순전한 소리가 되었다. 음악이 실체가 있는 사물처럼 느껴졌다. 음악은 내 귀에만 머물지 않았고, 온몸을 타고 나를 에워싸고 흐르며 온 감각이 공명하게 했다. 피부가 따끔거리고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처음 접하는 오케스트라 연주에 대해서 그리고 음악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 또한 보통으로서는 쉽지 않다. 특히 ‘음악은 내 귀에만 머물지 않았고, 온몸을 타고 나를 에워싸고 흐르며 온 감각이 공명을 하게 했다.’는 부분은 ‘전율이 흐른다’는 일반적인 표현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책 읽는 희열을 느끼게 했다.
빌은 교통사고를 당할 즈음 8개월 사귄 “알리샤”라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하지만 윌이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리샤는 윌의 친구와 결혼을 하게 된다. 옛 애인인 알리샤와 자신의 친구 결혼식에 초대를 받았지만 가지 않으려던 마음을 바꾸어 결혼식에 참석하게 된다. 물론 루이사도 간병인 자격으로 동행하게 되는데 가난하고 힘겹게 자란 루이사의 독백 같은 이런 표현이 있다.
“결혼식 당일 아침은 화창하고 향기롭게 시작되었다. 나는 내심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알리샤 같은 여자들은 항상 원하는 대로 되는 법이다. 날씨의 신들에게 누군가가 미리 잘 좀 봐달라고 전화를 했겠지.”
가당치도 않은 듯하지만 자신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상황 때문에 가난하게 산 사람들이 부모를 잘 만나 호화롭게 사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갖는 부러움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조금은 곁들여진 독백의 기발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 단어는 ‘선택’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람은 살면서 매 순간마다 선택을 해야 한다. 그 선택이 때로는 내 의지에 의해서 때로는 내 의지와 관계없이 선택을 하기도 한다.
교통사고가 나기 전 윌은 대부분의 삶을 자기 선택에 의해서 살았다. 하지만 사지불구가 되어 스스로는 숟가락 하나도 들 수 없게 된 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누군가의 선택에 어쩔 수 없이 그 선택을 따르는 삶의 살 수 밖에 없었다. 루이사를 만난 것도 자신의 선택이 아닌 가족, 그 중에서도 엄마의 선택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었다. 그래서 그는 자살이라는 자신의 선택으로 죽음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루이사는 윌의 간병인이 된 것이 자신의 선택일까? 물론 자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일하던 빵집이 문을 닫아 실직을 하였고 아버지 또한 언제 실직을 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했다. 직업소개소를 찾아 몇 가지 직업을 찾았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일들과 가족을 부양하기에 턱 없이 부족한 수입이 선택의 폭을 좁혔다. 그러다 맞이한 것이 윌의 간병인 이라는 선택이다.
윌의 생애 마지막 6개월, 대부분은 루이사의 선택에 따르는 삶을 이어간다. 그리고 마지막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마감한다. 그 기간 동안 루이사는 이전과는 다르게 많은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윌의 동의하에 선택을 실생활로 이어간다. 하지만 윌의 선택에는 따를 수밖에 없는 3자가 되고 윌의 마지막 편지 요청에 의해 함께 가기로 하였던 파리의 거리에 혼자 여행을 하면서 편지를 읽는 것으로 에필로그를 마무리 하였다.
이 책을 읽으며 글이라는 것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은 느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느낌을 표현하는 것은 말과 글, 몸짓이다. 물론 음악이나 그림 등의 예술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글이나 말과는 조금 다른 차원이니 예외이고 같은 현상이나 상황을 보고도 사람마다 다르게 말을 하고 글로 표현한다.
사람들은 “그 사람 참 말 잘한다”, 혹은 “글 잘 쓴다”라는 칭찬을 한다. 과연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는 것은 어떤 것일까? 실제 상황이 없었음에도 위에서 소개한 “날씨의 신들에게 누군가가 미리 잘 좀 봐 달라고 전화를 했겠지.”하는 표현은 기발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모든 사람이 결혼식 날에 비가 오지 않고 맑고 밝기를 원한다. 종교에 따라 부처, 혹은 예수께 기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은 그저 마음속으로 비는 방법이 있는데 그러한 것을 질투의 감정을 섞어 신에게 전화를 한다는 표현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말이나 글을 잘 쓴다는 것이 듣고 읽는 사람이 쉽고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거기에 듣고 읽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면 금상첨화라 할 수 있는데 이 책의 저자인 조조 모에스는 편안함 플러스 깊은 인상의 표현이 많아 독서의 재미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물론 번역자도 크게 한 몫을 했겠지만 부족함이 많은 내가 감히 베스트셀러가 될 만안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내 마음을 거지같게 만든 것 까지도 말이다.
오랫동안 소설을 멀리 하였던 나, 내 선택에 의해서 수영장에서 몸을 벌겋게 익혀가면서 잃었다. 마무리는 참 거지같았지만 앞으로의 삶에 내 선택을 존중하며 살아 갈 것을 다짐해 본다. 그런 다짐 후에야 거지같은 마음은 사라지고 독서의 희열을 음미하며 내 자신에게 외친다. Bonne Chance!!
June 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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