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 신경숙

송삿갓 2014. 7. 1. 00:10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 신경숙

 

 요즈음 나는 점점 이상한 습관에 길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 생활 패턴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이거나, 아니면 집착의 한 형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애정결핍(내 자신은 전혀 애정결핍으로 생각하지 않지만)으로 인한 애정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사랑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책을 손에 잡고 첫 장을 열면 빨리 끝을 보아야 한다는 조바심까지 느낀다. 누구를 만나는 것은 물론 누가 나를 찾는 것조차도 싫고 때로는 들려오는 음악마저도 방해 하는 듯 다시는 듣지 않을 것처럼 꺼 버리고 고요함 속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및을 잠수 하듯 내용에 동화되어 슬픔과 기쁨 그리고 환희에 몸과 마음을 같은 색 같은 깊이로 나를 지운다. 애틋한 연애를 할 때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면 아쉬움에 곧장 갈 수 있는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거나 동네 주변을 빙빙 돌며 시간을 보내려 하지만 책을 잡으면 푹 빠져 헤어날 줄 모르기도 하고 때로는 한 참 젊은 시절에나 경험해 보았던 몸을 탐하며 격정적인 섹스를 하는 것처럼 몰두하기까지 한다.

 책의 내용에 젖어 기쁘고 행복한 내용에는 몸과 마음이 하늘을 나는 듯 희열을 만끽하고 슬프고 아픈 내용에는 도저히 나갈 길을 찾을 수 없는 정글 속을 해매는 것 같고 하늘에 몇 개의 점만이 있는 캄캄한 밤에 갈 길을 잃어 방황하거나 내용의 모든 슬픔과 아픔이 내 것인 양 가상의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치기도 한다. 주변의 한 분은 이를 중독이라는 표현으로 힐난을 하였지만 그리 기분 나쁘지 않게 받아들일 정도로 짧게는 하루 이틀 길게는 1, 2주 까지도 여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흡사 악보와 가사, 청중과 동화되어 혼을 토해내는 성악가와 비슷하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내........

 그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은 팔 년 만이었다.

 나는 단번에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여보세요? 하는 그의 말의 끝나자마자 나는 어디야? 하고 물었다.

 

 이번에 잡은 소설의 플롤로그 시작 글이다. 그런데 이 몇 줄 만에 가슴이 떨리기 시작하였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오랫동안 기다리던 전화를 받은 것 같으면서 한 사람이 오버랩 되었다.

 

 팔 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그냥 흘러가는 법 또한 없다. 팔 년 만에 전화를 걸어온 그에게 어디야? 하고 담담하게 묻는 순간, 이제 내 마음속엔 그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쌓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아 있는 격렬한 감정을 숨기느라 잘 지내고 있는 시늉을 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정말 담담하게 그에게 어디야? 하고 있었으니까. 의문과 슬픔을 품은 채 나를 무작정 걷게 하던 그 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쓰라린 마음들은, 혼자 있을 때면 창을 든 사냥꾼처럼 내 마음을 들쑤셔대던 아픔들은 어디로 스며들고 버려졌기에 나는 이렇게 견딜 만해졌을까. 이것이 인생인가? 인생은 각기 독자적이고 한 번 뿐이다. 모두들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려 하고, 사랑하고, 슬픔에 빠지고, 죽음 앞에 가까운 사람을 잃기도 한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내 생의 슬픔과 아픔, 기쁨과 즐거움 그리워 했던 모든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 두면서 오랜 동안 기다리다 전화를 받은 것 같았다. 오래되어 화면 중앙에 아메바 같은 무늬가 불현 듯 나타났다 사라지고 슬픔과 함께 죽죽 내리는 비와 같은 영화처럼 스쳐지나가는 아픔과 고통을 서러운 눈물과 함께 쏟아내고 싶은 마음이 나를 사로잡았다.

 

 내.......

 내가 그에게 내뱉은 말은 결국 나를 고독하게 했다. 내 간 말이었으나 스스로에게도 낯설었다.

 

 아니다. 지금의 내 심정으로는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절대 말하지 못할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나는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빨··············라며 매달릴 것 같다.

 

 명서, , 미루, , 윤교수, 에밀리······

 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5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고양이다. 전화를 건 사람은 명서다. 명서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미루가 있고 전화를 받은 사람은 윤이다. 그리고 윤과 함께 시골에서부터 함께 자란 단, 명서와 윤이 다니던 대학교수이자 시인 윤교수, 미루의 귀머거리 하얀 고양이 에밀리가 주인공이다.

명서는 복학생으로 윤과 같은 학교 같은 과 학생이고 미루는 자신이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명서를 따라 윤교수 과목의 청강생다.

 

 

 암에 걸린 윤의 엄마는 자신 때문에 딸의 학업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 서울(소설에서는 서울이라는 표현은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이 도시, 혹은 저 도시라고 표현하였지만 전개되는 내용에 의하면 서울이 틀림없다)의 사촌언니 집으로 유학을 보낸다. 그리고 결국 엄마는 병으로 죽는다. 윤이 엄마를 회상하는 부분이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으니 그 연습을 일찍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엄마가 옳았다고는 못 하겠다. 나는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으면 함께 옳았다고는 못 하겠다. 나는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으면 함께 있을 수 있는 한 함께 있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니까. 아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생각이 다를 뿐.

 아픈 엄마 곁을 떠나며 엄마, 언젠가는······이라고 말했다. 이후 수없이 그 말을 되새겼던 순간들, 엄마의 머리카락이 한 올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도 내가 엄마에게 할 수 있었던 말은 엄마, 언젠가는······뿐이었다. 언제나 내가 가장 열망했던 것, 언젠가는 엄마가 다시 건강해져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바랐던 나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엄마를 잃는 것과 동시에 나는 언젠가는, 이라는 말도 버렸다. 언젠가는······은 내가 더 이상 아무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는 부질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무엇도 변화시켜놓을 수 없는 허깨비 같은 말이.

 

 윤이 시청근처를 갔다가 시위 하는 학생 시민과 진압하는 경찰 사이에 휩싸여 넘어져 무릎이 깨지고 가방은 물론 운동화까지도 잃어버린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 난 후 무릎에서 피가 바지에 늘어 붙어 떼어 낼 수도 없는 고통을 감수하며 가방과 운동화를 찾는 과정에 명서를 만난다. 함께 노력 끝에 윤의 가방을 찾은 명서가 이렇게 말은 한다. 우리 오늘을 절대 잊지 말자. 그 약속에 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언젠가는·······이라는 뜻 모를 의문을 갖는다. 그리고 책에 등장하는 다섯 사람이 언젠가는·····이라는 불확실이 엉킨 실타래 같은 관계의 오묘함에 몸과 마음의 갈등이 이어진다.

 

 윤교수는 옳지 않은 정치와 부조리와 불평등에 혼신을 다하는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 현실에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옳지 않다며 불의에 항의하는 자신의 방법으로 교수직에 대한 사표를 던진다. 학교를 떠나 시골에 살고 있는 윤교수의 초청으로 명서와 연이 찾아 간다. 그 때 윤교수가 둘에게 세상의 안타까움에 위로의 말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인간은 불완전해. 어떤 명언이나 교훈으로도 딱 떨어지지 않는 복잡한 존재지. 그 때 나는 뭘 했던가? 하는 자책이 일생 동안 따라 다닐걸세. 그림자처럼 말이네. 사랑한 것일수록 더 그럴 거야. 잃어버린 것들에 대히 절망할 줄 모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다만······ 그 절망에 자네들 영혼이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라네.

 

 미루는 명서와 윤에게 셋이서 함께 살 것을 제안하고 둘에게 승낙을 받지만 그들이 살려했던 집을 미루의 아버지가 팔아 버린다. 실망한 미루는 다시 방황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몇 개월 동안 둘과 단절하고 잠적한다. 연은 연락이 닿지 않는 미루가 궁금하여 여러 번 미루의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는 미루의 어머니는 말없시 끊기만을 반복한다. 평상시 생활로 돌아갔다가도 미루의 생각에 궁금하여 반복하여 연락을 시도하는 과정에 드디어 미루의 엄마와 통화를 한다.

 

 -미루를 바꿔주세요

 미루의 어머니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미루가 어디에 있나요?

 수화기 저편이 적막해졌다.

 -제발 끊지 마세요.

 -그앤 죽었다.

 -······

 내 친구가, 내 연인이 죽은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아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읽고 싶었지만 몸의 모든 말초신경으로부터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눈으로 무언가 올라오고 있었기에 글자가 보이지 않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눈물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참아보려고 했었다. 비행기 안의(워싱턴 DC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읽고 있었다) 옆자리에 사람도 앉아 있어 신경이 쓰여 참아야 한다는 의지를 가져 보았다. 하지만 그 생각을 이내 접었다. 이 대목에서는 그냥 눈물을 흘리자.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소설 속이지만 사람이 죽은 것에 대한 애도를 표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윤과 자란 단이 군대를 가기 전에 윤을 찾아와 초면인 명서, 미루와 함께 미루의 아버지가 팔아버린 집에서 며칠을 보낸다. 미루는 자신이 먹은 음식을 한 끼도 거르지 않고 수첩에 적는 습관이 있는데 화가를 꿈꾸는 단이 나중에 제대하면 수첩의 여백에 삽화를 그려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 역시도 언젠가는······ 하지만 단은 군대에서 자살 내지는 사고로 인한 의문의 죽음으로 그 언젠가는······이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어 버렸다. 단에 이어 미루가 죽었다는 내용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연한 것인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말 내가 뭔가에 중독이 되는 것은 아닌가?

 

 프롤로그의 시작 부분, 8년 만의 전화는 언젠가는······을 반복하던 명서가 윤에게 윤교수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전하며 내........라는 명서의 제안에 내.......라며 윤이 대답하는 상황이다.

윤교수 또한 죽는다. 내가 알아서 할께로 명서를 외면하는 윤의 옆에는 죽음에 가까이 있는 미루의 고양이 에밀리가 자리를 지킨다. 귀머거리 고양이 에밀리 또한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물론 여기의 언젠가······는 다른 언젠가······과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신경숙, 작가의 말에 이런 부분이 있다.

 무엇 때문이었든 작품을 마쳐놓고 한동안 얼굴 한쪽이나 어깨 한쪽이 무엇에 쏠린 것처럼 아파 작품을 저만큼 밀어놓았다.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어느 새벽 시간······ 가만히 원고를 끌어당겨 책상 앞에 펼쳐놓고 한쪽으로 쏠려 있는 이 작품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복구 한 것이 이정도면 복구하기 이전의 작품은 어땠을까? 아니 내가 궁금해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접한 것은 끊임없이 연이어 따라 나오던 큰 죽음들에서 복구를 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복구한 작품을 읽으며 이어지는 죽음을 듣고 놀라워하는 장면에 읽기를 멈춰야 했던 것이 나였기에 말이다.

 

 작가는 그런 내 심정에 비웃기라도 하듯 이렇게 작가의 변을 마무리 하였다.

 이 소설에서 어쩌든 슬픔을 딛고 사랑 가까이 가보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 읽히기를, 비관보다는 낙관 쪽에 한쪽 손가락이 가 닿게 되기를, 그리하여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언젠가라는 말에 실려 있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꿈이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 새벽빛으로 번지기를······

 

 책 읽기를 마치고도 책을 끝자락을 놓지 못하고 소설의 상황이 내 몸 구석구석을 휘저으며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내릴 것 같은 몸과 마음에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읊어본다.

........

 

 

 June 27, 2014

19차 북미주 한인 CBMC 워싱턴 대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