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천 개의 찬란한 태양 - 할레드 호세이니

송삿갓 2023. 3. 4. 04:02

천 개의 찬란한 태양 - 할레드 호세이니

 

[교섭]이라는 영화를 봤다.

몇 년 전 한국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분당의 한 교회가 아프가니스탄에 선교단으로 민간인 23명을 보냈다가 피랍되어 구출하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영화다. 이 영화를 보게 된 이유는

최근에 읽은 두 권의 책, 할레드 호세이니저 [연을 쫓는 아이]와 이번에 읽은 [천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고는 두 번째 책 후기를 정리하지 않고 미루고 있었던 터라 이끌렸다.

 

무슬림, 미국에 대한 9.11테러로 인해 더욱 적개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된 종교가 되었고 턱에 수염을 기른 아랍인들을 보면 어떻게든 개종시켜야하는 대상으로만 본 적도 있었다. 그들도 나와 똑같은 호모사피엔스고 그들도 그들 나름 순수한 종교성이 있음에도 달리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영화 [교섭]에서 모티브가 되었던 사건이 있을 즈음 무슬림도 나와 똑같은 인격체로 받아들여야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연을 쫓는 아이를 읽을 때 카블이 그려지며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은 내 부모세대,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굶주리던 내 어린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음에 무슬림에 대한 적개심은 말끔히 사라졌다. 그들의 인사말 인샬라”, 혹은 앗살라무 말라이쿰!”은 우리의 당신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의 우리 인사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믿음이 생겼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는 탈레반을 옹호하고 있음은 절대 아니다.

 

지붕 위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달들을 셀 수도 없었고

벽 뒤에 숨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을 셀 수도 없었네

-사이브에 타브리지 카블에서

 

이 소설의 제목은 위에 있는 사이브에 타르리지 카블이라는 시에서 인용했음을 책의 본문에 나온다. 실은 왜 이 가슴 아픈 소설의 제목을 아름다운 시에서 인용했는지 잘 모르겠다.

종일 일을 하고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웠다는 어머님의 이야기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결이 크게 다른 소설에서의 굶주림, 신랑 얼굴 한 번도 못 보고 결혼해 첫날밤에서야 처음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할머니, 혹은 할머니의 할머니 이야기와는 또 결이 다른 무지몽매한 결혼이야기, 집에 아내가 있음에도 공공연하게 첩을 두었다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이야기에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서자(庶子)라 하며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조선시대의 이야기와는 결이 다른 일이 21세기에 일어나고 있다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소설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규칙은 간단하다. 규칙이 없는 게 규칙이다.’

그 국가(아프가니스탄)의 이끌었던 지도자들이 그 만큼 나쁜 사람들 임에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수만큼 기도를 했다고 한다.

 

여자가 장관이 되고 대통령 등 국가의 수반이 되는 21세기에 여자는 학교에 가서는 안 되고 남자 없이 외출이 불가능하며 그나마 나갈 때도 남들이 못 알아보지 못하도록 온 몸을 뒤집어 써야(부르카) 외출할 수 있는 나라가 있음에 그들을, 특히 그 나라의 남성들이나 지도자를 경멸하고 처단하고 무조건 개종시켜야 하는 우리와 모양만 같은 호모사피엔스로 받아들여야 하나?

 

소설을 읽고 후기를 바로 정리하지 못했던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복잡해서였다.

아팠다. 아파도 많이 아팠다. 그리고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잘 몰랐다.’

막상 내가 소설 속의 한 인물이 된다면 용기를 가지고 정의를 주장할 수 있었을까?

소설의 여주인공의 한 명(마리암)의 아버지(잘릴)처럼 적당히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사람이지

않았을까?

 

조금은 무능했을 수도 있었지만 똑똑하고 인자했던 아버지,

때로는 너무 배가고파 입술을 깨물어 자신의 피로 허기를 달랬다던 어머님이 보고 싶다.

너무 많이 보고 싶다.

 

앗살라무 말라이쿰!

(당신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March 3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