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그 남자네 집-박완서

송삿갓 2024. 8. 25. 21:34

그 남자네 집-박완서

 

어머님의 친정인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달전1(윗다락골)에서 국민학교에 입학 2학년을 마치기기도 전에 서울로 이사를 했다. 10대 초반까지 엄청 나게 많이 다니던 이사 중의 하나였지만 이사과정이 나름 많이 생각나던 처음의 때였다. 암튼 이사를 해서 당시에 서울특별시 성동구(나중에 송파구로 바뀌었나?) 오금동으로 이사를 했고 어머님의 큰이모집에 얹혀살다가 화장실도 없는 6평짜리 집을 마련해 이사를 한 게 내 기억으로 아버지 명의로 가진 첫 집이었다. 그곳에서 송파에 있는 서울중대국민학교 3학년으로 전학을 했다. 그 집에서 2년 반 정도를 살았던 것 같은데 그 동네에서 버스가 다니는 큰 길로 나가는 오른쪽 언덕에 상이군인마을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상이군인이라는 뜻은 몰랐고 6.25전쟁에서 다친 군인들 가족을 위해 만들어준 집성촌이란 건 나중에 커서야 알았을 정도다. 하지만 그 동네는 어른들도 접근하기를 꺼려하는 무서웠던 생각이 남아있다. 양재동을 지나 성남으로 가는 길에 헌인능 근처 나환자촌이 있는데 문둥이촌이라며 사람을 잡아먹기 때문에 가면 안 된다는 어른들의 말에 무서워했던 것과 비슷하게 상이군인 마을도 그랬다. 그런데 그 동네 아이들이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어 그들도 무섭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친해지고 난 후 그냥 나와 똑같은 아이들이라는 게 자연히 스며들어 무서움에 무뎌진 나중에 RCY(Red Cross Youth)를 하면서 봉사활동을 가서 보니 그들도 비슷함에 안도했던 동네다.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에서 그 남자는 상이군인이다. 6.25에서 부상을 입고 의가사제대를 한 대학생 신분이 이 소설의 시작이다. 하지만 소설 무대의 시작 때는 상이군인이라는 집성촌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인 6.25전쟁 말기 부분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전쟁으로 어쩔 수 없이 휴학을 한 화자와 그 상이군인에 대한 복잡 미묘한 이야기다. 책의 저자인 박완서와 소설의 화자가 대학입학이나 전쟁으로의 휴학과정이 비슷해 자전적 소설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박완서의 많은 소설들이 자신을 화자로 정하는 경우가 많아 이 소설 [그 남자네 집] 또한 그럴 것이라고 추측을 할 뿐이다.

 

어릴 적 시골에서 살 때 왼쪽 겨드랑이 안 쪽에 큰 종기가 나서 왼쪽 팔을 아래로 떨어뜨리지 못했던 일이 있었다. 그 때 윗다락골보다 아래에 있는 부개실이란 곳에 야미 한의사가 있었는데 거기에 가서 곪은 곳을 째서 짜내고 째서 구멍난 곳에 심지를 박고(왜 심지를 박아야 했는지 모르지만) 그 위에 바른 약이 이명래 고약이다. 하얀 기름종이 위에 물기가 덜하지만 말캉말캉한 소똥 비슷한 색깔의 약을 개서 얹어 상처부위에 붙이는 건데 한약냄새와 쓴 내가 섞였던 것 같았는데 그걸 붙이고 있는 동안 무슨 훈장을 단 것처럼 뿌듯한 마음이 들었던 건 몸 어딘가에 종기가 나면 집에서 어머님이 바늘로 찌르고 근이 나와야 한다며 엄청 아프게 짜내는 게 다였는데 의원이라는 곳을 다녀 온 것과 이명래 고약은 의원을 다녀온 흔적이었기에 나도 뭔가 된 것 같은그야말로 철부지가 얼토당토않은 걸로 자존감을 가지려는 것 중의 하나였을 게다.

 

이 소설에서 오랜 만에 [이명래 고약]이라는 내용이 나왔을 때 책 읽기를 잠시 멈추고 생각을 더듬은 게 그 겨드랑이에 났던 종기였다.

특히 인구 밀집지역인 그 동네엔 고 또래 아이마다 머리통이나 이마빡에 종기를 닥지 않은 이가 거의 없었다. 저절로 종기가 나기도 하고 모기에 물린 자리가 종기가 되기도 했다. 종기엔 그저 이명래 고약이 제일이었다. 종기는 섣불리 건드리지 말고 침을 묻혀가며 넓게 편 고약 한가운데다가 근 빼는 약을 녹두알만큼 붙여서 종기 위에 붙여두고 종기가 농익기를 기다렸다가 짜주면 근이 쏙 빠지고 곧 아물었다.’

 

뉘 집에서나 쇠는 명절이나 어른 생긴 말고도 그 중간에 낀 아이들의 백날, , 그리고 생일과 계절마다 챙겨야 하는 날과 먹어야 하는 음식도 정해져 있었다. 그런 날을 잊어버릴 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세시기(歲時記 : 일 년 중 철을 따라 행하여지는 여러 가지 민속 행사나 풍물을 적어 풀이하여 놓은 책.)는 시어머니 머릿속에 기록돼 있었다. 그런 날 차리는 음식은 산해진미랄 것은 없어도 풍성하고 맛깔스럽고, 그 이름 붙은 날의 격식에 어긋나지 않는 거였다. 하늘이 관장하는 농사에도 풍년과 흉년이 있는 데 우리집이 때에 따라 차려먹는 음식은 어내 해라고 더 잘 차리지도 더 못 차리지도 않았다. 작년의 세시기와 그년의 세시기는 정확하게 일치했다. 계속되는 반복운 지루하면서도 십년이 일 년처럼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내 어머니의 일상과 거의 비슷하다. 화자(화자가 책의 저자라면 1931년생인데 어머님보다 8년 앞서있다.) 6평짜리 집이 있던 오금동을 떠나 송파로 이사한 게 5학년 여름방학을 마치는 시기, 식당을 하면서 어느 정도 살만 해졌을 무렵부터 어머님의 세시기가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복되는 제사와 명절, 차려지는 음식은 해마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명절에는 친척의 누군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한다는 게 양은 물론 가짓수도 많아졌고 그들이 찾아와서는 맛있다.”는 찬사에 어머님은 , 그래요. 내가 입맛이 없어 간도 제대로 못해 맛있는지 맛이 없는지 알지도 못하는 데...”라는 말이 새빨간 거짓인 줄 알면서도 무슨 말씀이세요. 명절을 기다리며 그렸던 딱 그 맛인데요. 어떻게 항상 이렇게 똑같은지 정말 대단해요.”라는 극 찬사에 어머님은 못 들은 체 몸을 돌리는 시크함으로 자존감을 채웠으리라. 갓 태어나 밥을 먹을 수 있을 때부터 그 음식에 중독이 되었던 내 아들이 마흔이 되었고, 어머님은 지금도 혹여나 손자손녀가 온다면 그 시절 작 먹던 음식을 넘치게 준비하는 게 어머님의 고집이자 행복이다. 물론 지금은 제사를 거의 줄였고(내 할아버지/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제사만 지내신다.) 명절 음식도 양과 가짓수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어머님 특별의 고추장게장 등)은 그대로인데 힘겨워 하시면서도 고집을 부리신다.

 

소설에서 화자는 그 남자와의 외줄타기를 하는 것과 비슷한 아슬아슬한 욕망의 장면이 많이 나온다. 아니 어쩌면 화자는 평생을 그 욕망을 가슴에 담고 사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선(남녀의 선이라는 범주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모르지만)을 넘기지 않았다고 안도 내지는 후회의 상황도 있다. 그 남자 또한 그러 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장면이 많은 데 화자가 결혼한 실망감 때문인지 몇 백만분의 일도 안 되는 희귀한 일(병이 아니라 일로 쓴 이유는 정말 병명이 나오지 않아서다.)로 실명까지 하는 것으로 보아 그런 생각이 든다. 책을 덮고도 욕망이라는 것에 사로잡혔다. 나는 남자니까 남자들이 갖는 불순한 욕망이 여자에게는 없는, 혹은 훨씬 덜 한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여자 또한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다 남·녀는 동등한 사람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자위를 했다.

 

이 소설을 읽다가 버리지 못하는 내 습관을 고쳐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가도 그러지 못했던 것에 이제는 그래야 한다.’는 충분한 이유를 갖게 된 부분이 있어 소개하는 걸로 후기를 마친다.

요새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쓰던 물건을 정리하는 버릇이 생겼다. 간편한 붙박이장 때문에 큰 가구는 없어진 지 오래지만 옷가지나 일용잡화도 당장 쓸 것 아니면 뒀다 써야지 하고 아껴두는 법이 없다. 왕창 덜어내서 서랍 속이 허룩해지면 마치 마음을 비운 것처럼 개운해진다. 다들 한때는 아끼던 것들이다. 비싸게 주고 샀기 때문에 망설여지는 것도 있다. 그런 건 미리 필요한 사람에게 준다. 내가 죽은 후에 내가 아끼던 것들이 한꺼번에 무더기로 버려지는 게 싫은 것이다. 아끼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게, 이건 욕심 중에도 대단한 욕심이다. 아직도 차마 못 버리고 간직하고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나만 아는 비밀을 간직한 물건들이다.

 

2024825일 애틀랜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