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하루-박완서 소설
최근에 두 권의 책을 연달아 읽었다. 모두 박완서의 소설집인데 한 권은 [엄마의 말뚝]이고 다른 한 권이 [기나긴 하루]다. 하지만 두 책을 읽은 곳은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다. [엄마의 말뚝]은 지난 7월 말 한국에서 읽었고 [기나긴 하루]는 미국 애틀란타에서 읽었다.
[엄마의 말뚝]을 읽은 건 공교롭게도 유행에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 코로나가 걸려 인천 송도에서 자체 격리를 하며, 그리고 그 코로나를 몸에 담고 미국에 와서 나아가며 읽은 책이 [기나긴 하루]다. 두 권에 책에는 같은 단편이 실리기도 했는데 두 번째는 박완서 작가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뒤인 2012년에 발행한 소설집이니 좋은 단편을 모았으리라 생각하기에 같은 글이 있는 것에 거부감이나 이질감 없이 또 읽었다. 물론 작품이 너무 좋아서 청소기에 흡입되는 널브러져 굴러다니던 오래된 영수증처럼 빠져들어 읽었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빨갱이 바이러스,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 카메라와 워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닮은 방들 등 하나같이 몰입해서 웃음과 눈물을 흘리며, 때로는 나도 가질 수 있는 욕망에 사로잡혀 읽었다.
박완서의 글을 읽다보면 ‘아! 이럴 때는 이런 표현이 있구나.’라든가 ‘아! 이런 단어도 있네?’라며 메모를 하고픈 마음과 ‘다음 줄에 또 어떤 표현이 있을까?’라는 조급한 마음이 갈등을 일으키며 멈칫하거나 멍해지는 순간이 많다. 그러다 ‘내 책인데 다 읽고 또 찾아보면 되지.’라고는 메모를 뒤로 미루고 다음으로 향하면 이전의 메모 생각은 까맣게 잊고 또 멈칫하기를 반복하다 ‘뭐 전체가 감동적인데 한 문장 메모가 뭐 중요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만들어 다음 글로 넘어가다 끝에 이르러서야 ‘아! 좋은 내용 많았는데..’라고 다시 앞으로 가면 내가 찾으려 했던 문장과 눈에 찾아진 내용이 달라 ‘에궁, 책 읽는 것도 바지런해야 한다니까.’라는 얕은 질책으로 얼버무리고는 한다.
그러는 중에도 휴대폰에 남은 메모가 하나 있다.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운데 죽을 것 같은 느낌은 왜 그렇게 싫은지 모르겠어요.’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서 나온 문장인데 죽음에 대한 오랜 두려움과 극복, 그리고 불현 듯 다시 찾아오는 두려움과 그것을 이겨내려는 몸부림 같은 것에 ‘과연 죽음이란 무엇이고 영혼은 정말 어딘가에 남는 건가?’라는 생각까지 해왔던 것에 대한 답 같은 문장이라 뒤로 읽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고 남겼던 메모다.
죽는 게 뭐 무섭겠는가? 정말 죽는 순간을 알기나 할까? 어떤 날 눈을 감고 있다가 깜빡 잠이라도 들었다 깨는 순간에 ‘아! 내가 잠시 잠을 잤구나.’하는 생각에서 그 생각을 할 수 없는 순간이 죽는 거란 생각이 드는 거다. 하지만 지난 7월에 코로나에 걸려 가장 아파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끙끙 앓던 그 날,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며 어떻게든 이겨내야 되겠다는 처절함은 죽을 것 같은 느낌에 대한 살아야겠다는 애착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암튼 죽는 것에 대한 물음에는 여전히 답을 찾기 어렵겠지만 죽음에 대한 문장의 하나로는 최고라는 생각이 책을 읽는 동안 들었다.
‘이 책의 후기를 어떻게 마무리 할까?’하는 고민을 덜어 준 것은 [닮은 방들]에 대한 글을 쓴 김애란 작가의 글이 좋아 그것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책장을 열면, 당신의 인물들이 기우뚱한 욕망을 안고 내 쪽으로 절름거리며 다가온다. 나는 이들을 잘 알아본다. 허영이 허영을 알아보듯, 타락이 타락을 알아채듯 제법 간단히, 어떤 악(惡)은 하도 반가워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알은체할 뻔하기도 한다. 이들의 절뚝거림은 이들의 불편이자 경쾌(輕快)다. 그 엇박 안에서 어떤 흠(欠)은 정겹고 어떤 선(善)은 언짢아, 당신의 인물들은 이윽고 한 번 더 사람다워진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할 적의 바로 그 ‘한 길’, 그 ‘사람 속’ 앞에서 언제고 겸손하고자 했을 한 작의 의 모습을 떠올린다.
2024년 8월 17일, 기나긴 여름의 끝을 기다리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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