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기나긴 하루-박완서 소설

송삿갓 2024. 8. 17. 23:18

기나긴 하루-박완서 소설

 

최근에 두 권의 책을 연달아 읽었다. 모두 박완서의 소설집인데 한 권은 [엄마의 말뚝]이고 다른 한 권이 [기나긴 하루]. 하지만 두 책을 읽은 곳은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다. [엄마의 말뚝]은 지난 7월 말 한국에서 읽었고 [기나긴 하루]는 미국 애틀란타에서 읽었다.

 

[엄마의 말뚝]을 읽은 건 공교롭게도 유행에 거스르지 않으려는 듯 코로나가 걸려 인천 송도에서 자체 격리를 하며, 그리고 그 코로나를 몸에 담고 미국에 와서 나아가며 읽은 책이 [기나긴 하루]. 두 권에 책에는 같은 단편이 실리기도 했는데 두 번째는 박완서 작가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뒤인 2012년에 발행한 소설집이니 좋은 단편을 모았으리라 생각하기에 같은 글이 있는 것에 거부감이나 이질감 없이 또 읽었다. 물론 작품이 너무 좋아서 청소기에 흡입되는 널브러져 굴러다니던 오래된 영수증처럼 빠져들어 읽었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빨갱이 바이러스,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 카메라와 워커,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닮은 방들 등 하나같이 몰입해서 웃음과 눈물을 흘리며, 때로는 나도 가질 수 있는 욕망에 사로잡혀 읽었다.

 

박완서의 글을 읽다보면 ! 이럴 때는 이런 표현이 있구나.’라든가 ! 이런 단어도 있네?’라며 메모를 하고픈 마음과 다음 줄에 또 어떤 표현이 있을까?’라는 조급한 마음이 갈등을 일으키며 멈칫하거나 멍해지는 순간이 많다. 그러다 내 책인데 다 읽고 또 찾아보면 되지.’라고는 메모를 뒤로 미루고 다음으로 향하면 이전의 메모 생각은 까맣게 잊고 또 멈칫하기를 반복하다 뭐 전체가 감동적인데 한 문장 메모가 뭐 중요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만들어 다음 글로 넘어가다 끝에 이르러서야 ! 좋은 내용 많았는데..’라고 다시 앞으로 가면 내가 찾으려 했던 문장과 눈에 찾아진 내용이 달라 에궁, 책 읽는 것도 바지런해야 한다니까.’라는 얕은 질책으로 얼버무리고는 한다.

 

그러는 중에도 휴대폰에 남은 메모가 하나 있다.

죽는 건 하나도 안 무서운데 죽을 것 같은 느낌은 왜 그렇게 싫은지 모르겠어요.’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에서 나온 문장인데 죽음에 대한 오랜 두려움과 극복, 그리고 불현 듯 다시 찾아오는 두려움과 그것을 이겨내려는 몸부림 같은 것에 과연 죽음이란 무엇이고 영혼은 정말 어딘가에 남는 건가?’라는 생각까지 해왔던 것에 대한 답 같은 문장이라 뒤로 읽고 싶은 유혹을 참아내고 남겼던 메모다.

 

죽는 게 뭐 무섭겠는가? 정말 죽는 순간을 알기나 할까? 어떤 날 눈을 감고 있다가 깜빡 잠이라도 들었다 깨는 순간에 ! 내가 잠시 잠을 잤구나.’하는 생각에서 그 생각을 할 수 없는 순간이 죽는 거란 생각이 드는 거다. 하지만 지난 7월에 코로나에 걸려 가장 아파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끙끙 앓던 그 날,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며 어떻게든 이겨내야 되겠다는 처절함은 죽을 것 같은 느낌에 대한 살아야겠다는 애착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암튼 죽는 것에 대한 물음에는 여전히 답을 찾기 어렵겠지만 죽음에 대한 문장의 하나로는 최고라는 생각이 책을 읽는 동안 들었다.

 

이 책의 후기를 어떻게 마무리 할까?’하는 고민을 덜어 준 것은 [닮은 방들]에 대한 글을 쓴 김애란 작가의 글이 좋아 그것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책장을 열면, 당신의 인물들이 기우뚱한 욕망을 안고 내 쪽으로 절름거리며 다가온다. 나는 이들을 잘 알아본다. 허영이 허영을 알아보듯, 타락이 타락을 알아채듯 제법 간단히, 어떤 악()은 하도 반가워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알은체할 뻔하기도 한다. 이들의 절뚝거림은 이들의 불편이자 경쾌(輕快). 그 엇박 안에서 어떤 흠()은 정겹고 어떤 선()은 언짢아, 당신의 인물들은 이윽고 한 번 더 사람다워진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할 적의 바로 그 한 길’, 사람 속앞에서 언제고 겸손하고자 했을 한 작의 의 모습을 떠올린다.

 

2024817, 기나긴 여름의 끝을 기다리는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