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박완서(소설로 그린 자화상·유년기의 기억)

송삿갓 2024. 9. 6. 05:34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박완서(소설로 그린 자화상·유년기의 기억)

 

예전 한동안은 책을 사면 안표지에 언제 어디서를 쓰고는 했는데 이 책은 '2002 Aug at LA'라고 적혀있다. 한국을 떠나 미국에 도착 3년이 조금 더 지날 즈음이었으니 내가 정신적, 경제적 가장 힘들어할 시점이다. 속을 토해내고픈 갈망에 출장을 핑계로 LA로 탈출해 1주일여를 보낸 일탈의 때고, 사람들을 피해 숨다시피 지내며 'LA 사랑의 교회'가서 목 놓아 울었을 게다. 책을 사서 분명 읽었을 텐데 내용 중 절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힘든 시기에 읽어 그랬든가 아님 나이가 들어 잊혀 졌을 수도 있다.

 

책 표지의 저자 박완서 바로 뒤에 소설로 그린 자화상·유년의 기억이라고 되어 있고 처음 작가의 말에 이런 글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써보았다.’로 쓴 것으로 보아 저자 박완서의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책을 읽는 중간에 혹은 다 읽고 나서 내가 모르던 일제강점기나 6.25이야기가 많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인의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역사는 승자의 전유물이다.’라고 했듯이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은 일제강점기나 6.25는 승자, 혹은 있는 자들이 썼던 역사를 기록했고 그 내용으로 배웠으니 저자처럼 약자, 혹은 할 수 없이 살아야 했던 일반 백성 중 한 명이 직접 겼었던 일을 기억으로 쓴 내용이라니 차이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창시 개명을 하고 관공서에 근무했다는 것으로 일제 청산이라는 명목으로 손가락질을 받거나 정리의 대상이 되기도 했을 것이라는 것과 6.25 당시 한강을 건너 남으로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있었다는 것이 죄처럼 되어 숨죽여 살아야 하거나 실제로 반동분자로 몰려 죽은 사람이 수득이 할 지언데 과연 그게 정당했던 건지 의문은 갖는다. 그 반대로 전쟁 전에 동네의 반장이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인민반장이 되고 또 수복이 되었을 때 국민의 반장으로 있으면서 흔히 말하는 시민증이라는 걸 배부할 때 선별적으로 주었다는 데 인민반장을 했으면 부역이 아닌가? 결국 반장이라는 타이틀로 무마되는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은 어떤 논리였는지 한숨이 절로 나오기도 했다.

 

그러한 정치적인 것 말고 저자가 송도(개성) 근처의 박적골에서 태어나 자라는 이야기나 서울로 와서 문밖에 살면서도 문안의 학교에 입학하는 과정, 방학이면 시골을 다녀오는 이야기는 읽는 내내 비슷한 경험을 했던 나와 비교하며 재미지게 읽었다.

 

우리는 그냥 자연의 일부였다. 자연이 한시도 정지해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고 변화하니까 우리도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농사꾼이 곡식이나 푸성귀를 씨 뿌리고, 싹트고 줄기 뻗고 꽃피고 열매 맺는 동안 제아무리 부지런히 수고해 봤자 결코 그것들이 스스로 그렇게 괘 가는 부산함을 앞지르지 못한다.

 

엄마의 친정 다락골에서 태어난 나는 서울의 성북동, 인천의 소사, 아버지의 고향 전라남도 영광을 전전하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 다시 어머님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내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가진 것 많지 않아 양식은 적었지만 배는 심하게 곯지 않았고 특별한 놀이기구나 장난감이 없었지만 자연을 뛰놀며 나름 즐겁게 살았다. 여름이면 도토리를 주워 어머님 도토리묵 장사에 일조를 했고 어머님 따라 산 속을 더듬으며 버섯을 따서 헤진 거나 나쁜 건 우리가 먹고 좋은 것들은 골라 장날에 파는 데데에도 일조를 했다. 그래봐야 초등학교 1,2학년의 고사리 손으로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저녁노을이 유난히 새빨갰다. 하늘이 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의 풍경도 어둡지도 밝지도 않고 그냥 딴 동네 같았다. 정답던 사람도 모닥불을 통해서 보면 낯설 듯이.

~중략~

바람이 유난히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저녁나절 동무들과 헤어져 홀로 집으로 돌아올 때, 홍시빛깔의 잔광이 남아 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텃밭머리에서 너울대는 수수이삭을 바라볼 때의 비애를 무엇에 비길까?

 

시골에서 외갓집의 사랑채에 살면서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우리의 주 수입원은 엄마가 셋째를 업고 할아버지가 만든 등이나 말린 산나물 등의 장사를 했다. 나는 학교에 갈 때 빈 도시락을 들고가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올 때는 빈 도시락에 강냉이 죽(무상급식)을 가득 받아 뜨거우니 책보위에 올려 손으로 바쳐 들고 집으로 왔다. 마을 어귀의 둥그나무(정자나무) 아래는 어김없이 동생이 나를 목 빠지도록 기다리는 모습이 아랫다락골 모퉁이를 돌때부터 보이면 나를 기다렸다기보다는 강냉이 죽을 기다린다는 걸 아는지라 손위에 올린 강냉이 죽이 든 도시락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도 종종걸음으로 달렸다. 그게 우리의 점심이다. 도시락이 뚫어지도록 핥아서 먹고는 동네아이들과 노는 시간이다. 들이며 산으로 놀다 집집마다 굴뚝에 연기가 오르면 아이들은 하나 둘씩 집으로 간다. 냇가의 하늘이 붉게 물든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나와 동생은 엄마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에 눈이 부셨던 건지 아님 비애의 눈물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릿아릿하며 눈물이 맺혀지곤 했었다. 꼭 부모 없는 아이들처럼 말이다.

 

나이 들어 사회생활을 할 때 지방이나 해외 출장에서 저녁에 붉은 노을을 보면 가슴을 후비는 느낌이 들고는 했는데 아마도 어릴 적 시골에서 새겨졌던 비애 때문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종종했었다.

 

방학식날엔 선생님이 방학동안에 시골에 가는 아이는 손들어보라고 했다. 방학기간에도 두 차례의 소집일이 있는데 시골에 가는 아이는 미리 신고하면 결석 처리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중략~

내일이면 고개를 넘고 들을 지나고 개울을 건널 것이다. 풀과 들꽃과 두엄 냄새가 어울린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실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초여름 첫새벽에 달기비가 깔린 푸른 길의 이슬을 맨발로 밟을 때처럼 순수한 희열을 느꼈다. 그건 향수라기보다는 짐승 같은 굶주림이었고,..

 

3학년 때 서울로 이사를 해서 방학 때면 시골에 내려갔다. 가기 한두 달 전부터 어머님은 용산에서 시골의 전의역 두 정거장 지난 조치원역까지 줄줄이 외우도록 훈련을 시켰다. 용산-노량진으로 시작해서 안양, 수원 병점을 지나 오산, 평택, 성환을 지나면 곧 천안이다. 이 때부터 긴장을 하고 내릴 준비를 해야 한다. 소정리 다음이 전의역 거기서 꼭 내려야한다. 만일 지나치면 전동인데 거기서 내리지 말고 조치원역에서 내려 역무원에게 잘 설명하고 이모할머니 집에 가서 이야기를 하라는 게 엄마의 중복 된 당부였다. 물론 서울 집주소와 외갓댁 주소는 더듬지 말고 줄줄 읊어야 했는데 조금이라도 더듬으면 몇 번이고 될 때까지 반복했다.

 

전의역에서 내리면 여름에는 삶은 옥수수 냄새가 가장 먼저 반긴다. 주로 꼬부랑할머니들이 삶은 옥수수가 들어있는 대바구니를 옆에 끼고 득달같이 달려와 한 개만 팔아달라고 애원을 하지만 곳 할머니집에 도착하면 먹을 수 있는 거라 거들떠도 안 보고 줄행랑치듯 철길을 건너 샛길로 들어선다. 예전에 어른들이 역에서 할머니집까지 십리라고 했는데 나중에 자동차로 다녀보니 족히 8킬로, 그러니까 이 십리 길을 뛰듯이 걸었다. 집에 도착해 봐야 모두 들에 나가있어 비어있음에 서울서 가지고 온 책가방과 보따리를 패대기치고 들로 달려가 할머니를 만나면 에구구, 내 새끼, 코흘리개가 먼 길 오느라 얼마나 애썼어..”라며 흙 묻은 손을 몸빼바지에 쓱쓱 문지르고는 내 손을 잡고 뚫어지게 나를 보셨다. 할머니의 눈망울을 보는 순간 내가 시골에 왔음을 알고 신이 났다. 엄마의 잔소리 없는 내 세상이었다. 그 희열이 방학이면 시골로 이끌었다.

 

텃밭에는 먹을 게 한창인 때였다. 당장 따서 쪄낸 옥수수의 감미를 무엇에 비길까. 더위가 퍼지기 전 이른 아침 이슬이 고인 풍성한 이파리 및에 수줍게 누워 있는 애호박의 날씩하고도 요염한 자태를 발견했을 때의 희열은 어떻고...

 

어려서부터 방학이 가까워질 때마다 가슴이 뛰놀던 버릇은 여전했다. 그건 나의 심신의 중요한 리듬이었다. 박적골이야말로 내 생기의 젖줄 이었다.

 

시골에 도착하면 옛 동무들과 노는 것도 좋았지만 할머니 따라 들에 나가는 게 제일이었다. 조막만한 손으로 도울 농사거리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랑에 자란 잡초를 뽑는 일은 제법 했다. 주로 담배 밭의 일이었는데 잡초를 뽑다보면 등이며 팔에 담배 진이 늘어 붙어 끈적거림이 싫었지만 참 때가 되면 늙은 호박을 두 개의 큰 돌로 고이고 그 밑에 불을 때 익힌 호박은 입에 맞지는 않았지만 다른 군것질거리가 없기에 좋아라며 열심히 먹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는 한 작가의 책을 연속해서 읽는 것이고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것도 거의 없었던 일이지만 이 번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박완서 작가의 책을 연달아 읽게 되었다. 물론 일부는 이미 읽었음에도 다시 읽었다. 왜 그랬을까? 글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책을 읽는 재미는 어쩌면 책 속에 있지 않고 책 밖에 있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창밖의 하늘이나 녹음을 보면 줄창 봐 온 그것들하곤 전혀 다르게 보였다. 나는 사물의 그러한 낯섦에 황홀한 희열을 느꼈다.

 

특히 이번 책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다가 멍하니 밖을 바라면서 외할머니에 대한 추억, 어머님에 대한 미안함, 마음을 떨리게 하는 옛 기억들이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덧입혀지는 그리움도 책을 한 작가의 책을 연이어 잃게 된 것 같다.

 

이야기는 어이없게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이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에 맏며느리를 포기한 채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 옳게만 사는 것처럼 포장되었지만 때로는 모른척하고 얼버무리거나 의도적으로 왜곡시키기도 한다. 그 예로 딸을 문안의 학교에 보내기 위해 사는 주소를 친척의 집으로 정하고 결국 원하는 학교에 보내는 것이나 일제강점기이기에 보다 편하게 살기를 위해 다른 가족들 대부분이 창씨개명을 원하지만 어린 장손인 아들이 굽히지 않자 속내는 불편해도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을 주장하는 여성이 화자의 엄마다.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에 이어 6.25로 이어진다. 아들(화자의 오빠)는 의용군을 끌려가 도망인지 탈출인지 모르게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집으로 돌아온다. 피난을 한다고 출발했지만 어쩔 수 없이 주저앉아 임시로 안착한 곳이 서울에서 처음 살던 산꼭대기 동네다. 일제 치하에서 누렸던 게 청산의 대상이 되고 인민군 치하에서는 이전에 누렸던 부와 행복이 처단의 대상이 되고, 서울수복 후에는 인민군에 부역을 했다는 게 적색분자가 되어 죽음을 부르는 삶이 그려졌다.

승리의 시간은 있어도 관용의 시간은 있어선 안 되는 게 이데올로기 싸움의 특성인 것 같다.

 

여지껏 내가 창조한 수많은 인물 중 어느 하나도 내가 드러나지 않은 이가 없건만 새삼스럽게 이게 바로 나올시다. 라고 턱 쳐들고 전면으로 나서려니까 무엇보다도 자기 미화의 욕구를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교정을 보느라 다시 읽으면서 발견한 거지만 가족이나 주변인물 묘사가 세밀하고 가차없는 데 비해 나를 그림에 있어서는 모소하게 얼버무리거나 생략한 부분이 많았다. 그게 바로 자신에게 정직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말 중에서

 

책을 읽는 중에 그리고 후기를 쓰는 중에 신이 났다. 내 이야기 같아서 이것저것 다 인용해 내 이야기를 덧붙이면 훌륭한 후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고 쓰는 데 정말 즐거웠다. 그러다 내가 배우고 들었던 역사와 실제 경험한 화자의 이야기가 다르게 보였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일제강점기와 6.25 때문에 나는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다. 도대체 왜 내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만주에 까지 가서도 곤궁하게 살아야 했고 내 아버지의 사촌들은 어떤 부역을 했기에 나에게까지 문제가 되었던가? 이 책을 읽으며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내 아버지의 사촌들은 당시 삶의 현실과 어쩔 수 없는 타협이었을 수도 있다는 혼란으로 까지 이어지며 후기 자체가 엉망이 되었다. 마무리할 수가 없기에 하루하루 미루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에 나중에 다시 정리하는 기회가 있을 거라는 막연함을 담아 그냥 마무리한다. 어쩌면 다음 책을 읽으면 정리가 될 수도 있음을 기대하며 말이다.

 

September 6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