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데로 임하소서 -이청준 지음-
한 동안 흔히 말하는 신앙에 깊이 빠져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게 삶의 진리를 추구하는 순수함으로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시절 어느 교회의 남전도회에서 내게 선물한 책이다. 책꽂이에서 이 책을 보며, 당연히 읽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책장을 열어보니 그러지 않음을 알았다.
읽을까, 말까 망설였다. 직전에 읽은 양귀자의 [모순]을 읽고 소설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나를 꺼내고 싶은 간절함으로 읽기로 작정하고 시작했다. ‘책 한권 읽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 책 [모순]에서 ‘상처는 상처로 치료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책은 책으로 치료하자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책의 화자는 흔치 않는 ‘안요한’이라는 이름의 남자다. 아버지가 신앙의 사명감으로 여러 자식 중 그에게만 돌림자를 피해 지어준 이름이라 한다. 사람은 어리든 나이가 들었든 어긋나게 살고픈 욕망 있는 것 같다. 화자가 그랬고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여러 가지 갈등과 어려움 끝에 아버지가 원하는 길로 접어든다는 내용이다. 책을 읽으면서 성경의 욥이라는 사람이 많이 떠올랐을 정도로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에필로그에 이런 글이 있다.
전 이따금 제가 보는 것만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 놔서요······. -에필로그 중에서-
조금은 다르지만 사자성어에 견물생심(見物生心:명사 어떠한 실물을 보게 되면 그것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김)과 비슷한 건가? 이럴 때 극약처방 중의 하나가 보지 못하게 하는 것과 비슷한 내용이 성경에 많이 나온다. 암튼 보는 것이 막혔을 때 찾아오는 막막함, 그리고 방황에 이어 나름 로의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게 일반적인 내용이다. 이 책에서는 깨달음의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인간은 원래 세 가지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저 단순히 사물을 보는 육신의 눈이요, 그 두 번째는 생각하고 이해하는 마음의 눈입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밝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 속에 김이 숨어 있는 영혼의 눈입니다. 그 영혼의 눈은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본문 ‘낮은 데로 임하소서’ 중에서-
세속적인 표현으로 ‘접신’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후의 삶이 순탄할까? 심술궂은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그럼 인생이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행복/불행 총량의 법칙’과 맞지 않는 거다. 깨달았으면 이제 거기에 맞춰 사는 수련이 과정이 필요하고 동화하는 것까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어 안도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어지는 본문 내용이 이렇다.
아직도 제게 나누어 줄 것을 남겨 주심을 감사합니다. 제가 가진 것은 참으로 보잘것없는 인간 세계의 지식을 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게 주신 장소도 어느 곳보다 낮고 보잘것없는 곳이옵니다. 하오나 저는 그 작은 것으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시려는 당신의 뜻을 알겠나이다.
~중략~
이 낮은 곳에서나마 다른 어느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당신의 영광이 크게 나타나실 수 있도록 하옵소서······. -본문 ‘그 길의 행인들 1’ 중에서-
나는 신앙에서 한 발 물러 선 삶을 살고 있다. 어쩌면 갈급함이 적어 물러난 것일 수도 있지만 굳이 글로 변명하자면 ‘내 몸과 마음을 순수함으로 이끌어 줄 곳이라 믿고 깊이 들어가는 데 그곳 또한 세상과 다름이 없다는 걸 알고 나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금도 신을, 아니 영(靈)을 철저하게 믿는다. 당분간은 내 스스로 정화를 하자는 의미에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단에 들어서기 전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 정결한 시간을 스스로 가져보자는 마음에서였다.
저자 이청준은 이 책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는, 사람에겐 사물을 보는 눈 육신의 눈과 이해하고 생각하는 사유의 눈, 그리고 느끼고 직관하는 영혼의 눈까지, 세 가지 차원의 눈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 영혼의 눈을 뜨게 되었으므로, 육신의 눈이 어두운 것을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 다고 말한다. ~중략~ 다만 그의 정신과 사랑과 소명의 참뜻을 담고자 했을 뿐, 이야기 중의 사건과 인물들은 많은 부분이 실제와 같지 않다. -쓰고나서 중에서-
이 후기를 쓰고 있는 중에 유투브의 ‘포근한 이불 속, 우리가 사랑한 클래식’이 들리고 가을의 강한 햇살이 눈을 부시게 한다. 신은 이런 햇살이 있게 하고 음악이 들리게 했다. 그러함 속에서 나는 오늘도 마음이 조금 더 정화된다.
November 24 2024
'책을 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들의 천국(天國) - 이청준 (2) | 2024.12.22 |
---|---|
모순-양귀자 (2) | 2024.11.10 |
은빛 비 -아사다 지로- (2) | 2024.11.02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지음- (1) | 2024.10.30 |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5) | 2024.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