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지음-
이 책은 지난 2022년 5월 한국에 갔을 때 교보문고에서 구입한 거다. 왜 이 책을 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죽음을 앞둔 노(老)학자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과연 죽음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였을 게다. 바로 읽으려고 샀고 읽기를 시작했지만 읽다 멈추고 다시 읽다 또 멈추기를 반복했다. 하루나 이틀 멈춘 경우도 있고 때로는 두세 달 멈추기도 했다. 게을러서가 아니라, 그리고 아끼고 싶어서도 아니라 주로 외면하고 싶어서였다. 어떤 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놓기도 했던 것으로 보아 ‘외면’이 분명하다. 죽음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슬프고 애처로워서, 또 죽음에 대해 더 알기를 거부하고 싶어서였다.
책은 김지수라는 기자가 이어령 선생님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내용인데 이런 대화의 장면이 있다.
“선생님, 이번 책의 제목을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고 할까 합니다.”
“그래, 하지만 내가 살아 있을 때는 내지 마. 저세상으로 갈 즈음에 이 책을 내게나. 라스트 인터뷰에서 자네가 썼잖아. 내가 사라진 극장에 ‘엔드 마크’ 대신 꽃 한 송이를 올려놓겠다는 얘기를, 나는 자네의 그런 맥락을 좋아했다네.” -본문 ‘마지막 선물’ 중에서 지은이와 이어령의 대화 중-
이어령 선생님은 지은이가 물은 책 제목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으로 이야기하자 바로 동의를 하지만 책을 자신이 살아 있을 때는 내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했다. 어떤 생각이 들어 그랬을까?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심장이 멎으면 대부분의 육체는 곧 썩어 사라진다. 그럼 그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추억,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에 대한 추억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나만 죽음에 대해 궁금할까?‘라는 것에 지은이가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이란 책을 쓴 LA의 장의사 케이틀린 도티를 인터뷰 했을 때 했던 말이이라며 책에 이런 부분이 있다.
“어차피 우리의 잠재의식은 끝없는 죽음을 생각하니, 혼자 두려움을 끌어안고 살지 않도록, 서로도와주자. -본문 ‘죽음이란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 거리는 유리그릇’ 중에서-
죽음이 뭔지 내 추억과 삶은 그냥 없어지는 건지 여전히 궁금하다. 지은이와 이어령 선생님의 이런 대화가 있다.
“요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지난번에 뵐 때 ‘마지막 우물은 죽음’이라고 하셨는데요.”
“죽음을 앞두면 죽는 얘기를 써야잖아? 나는 반대를 써요. 왜냐? 죽음은 체험할 수고 없으니까. 사형수도 예외가 없어요. 죽음 근처까지만 가지, 죽음을 모르니 말한 사람이 없어요. 임사 체험도 달아 돌아온 얘기죠. 살아 있으면 죽음이 아니거든.”
결국 죽음은 신의 영역인 영성이라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물론 영은 육체의 죽음과 관계없이 살아서 쌓는 지식, 생각, 기억과 마음 등의 모든 것이 영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고난에 처했을 때 인간은 비참해지거나 숭고해지거나 두 부류로 갈린다면, 그것을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영의 일이라네. 보통 때 사람은 육체와 지성, body와 mind로 살아가는 데 극한에 처했을 때나 죽음에 임박했을 때 spirit 영적인 면이 되살아는 거야. 내가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쓸 수 있었던 것도 딸과 손자를 다 먼저 보내는 극한 고난을 겪었기 때문이라네. -본문 ‘누가 짐승이 되고 누가 초인이 될까’ 중에서-
그럼에도 죽음을 너무도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삶의 길이는 사람마다 다른 데 그건 누가 어떻게 정하는 걸까? 얼마 전에 TV를 보는 데 어린이의 죽음에 대해 기독교인인 엄마가 “왜 내 아이는 이렇게 빨리 데려가셨나요?”라는 울부짖음에 목사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의 계획에 더 큰 쓰임이 있어 빨리 데려 간 것이다.”라니 엄마는 “그게 왜 내 아이어야 하느냐?”며 목사에게 달려들었다. 죽음은 운명이며 그걸 받아들이는 게 지혜라는 내용이 있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의 출발이지. 소크라테스가 대표적이야.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한 철학자였어. 그가 지혜를 따라간 건 운명을 믿었기 때문이라네. 신탁이 아테네에서 가장 똑똑한 자가 소크라테스라고 하니, 궁금해서 길을 나섰지. 그가 살펴보니 아테네 사람들이 다 똑똑한 척을 하는 거야. 자기는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사람들을 물어보면 다 안다고 하거든. 그때 신탁의 의미를 깨달았지. ‘아! 내가 모른다는 걸 안다는 게 이 사람들보다 똑똑하다는 이야기 구나.’” -본문 ‘지혜의 시작은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 중에서-
결국 죽음은 모른다는 걸로 이해를 해야 하는 건가? 그게 지혜로 연결되는 건가? 우리는, 아니 나는 삶의 대부분에서 죽음이라는 걸 망각하고 산다. 지독하게 궁금해 하다가 어느 순간에 까맣게 잊고 나와 죽음은 관련이 없는 것처럼 살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외면했던 것처럼 죽음이란 걸, 아무리 알려고 해도 모르니까, 두려우니까 외면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고 아팠지만 나 나았다고 하는 사람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면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은 아니구나.’라는 걸 깨닫기도 한다.
“죽음을 죽여버렸지. 깨끗이 포장해서 태우고, 추도 미사 드리고, 서둘러 도망쳤어. [죽음 앞의 인간]을 쓴 필립 아리에스가 쓴 글에도 나오지만, 현대는 죽음이 죽어버린 시대라네. 그래서 코로나가 대단한 일을 했다는 거야. 팬데믹 앞에서 깨달은 거지. 죽음이 코앞에 있다는 걸.” -본문 ‘죽음이란 주머니 속에서 달그락 거리는 유리그릇’ 중에서-
사람이 죽음에 대해 너무 집착하고 매달리면 스트레스가 커지고 그게 다른 병으로 이어져 가속도가 붙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최근에 들었다. 내용인 즉, 60을 막 넘은 한 여자가 건강진단에서 의사가 배를 만졌는데 무언가 잡히는 게 있다며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으라기에 MRI를 찍어 확인하니 췌장암4기였단다. 항암치료를 하다가 체력이 바닥나 중단하고는 ‘나에게 왜?’라는 자학하듯 하더니 갑자기 스트레스성치매가 걸려 어려워하다 췌장암이라고 알고 난 뒤 5개월 만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어령 선생님은 어땠을까?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말에 버려두라는 말이 있지? 버리는 것과 두는 것의 중간이야. 그런데 버려두면 김치가 묵은지가 되고, 누룽지가 숭늉 되잖아. 버리지 말고 버려두면 부풀고 발효가 되고, 생명의 스름대로 순리에 맞게 생명자본으로 가게 된다네. 그게 살아 있는 것들의 힘이야. 버리는 건 쓸모없다고 부정하는 거잖아. 버려두는 건, 그 흐름대로 그냥 두는 거야. -본문 ‘뱀 꼬리와 묵은지’ 중에서-
그렇게 이어령 선생님이 죽음에 초연하듯 그럴 수 있었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사람은 자학을 하고 어떤 사람은 신을 부정하거나 또는 애걸복걸하기도 하는 데 이 책을 통해 이어령 선생님은 그러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 진다. 무섭지도 반성이나 후회도 없었나? 그러한 초연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이 이어령 선생님을 “지성인”이라고 하는 데 ‘지성인이라 죽음을 초월해서 그런가?
“지성의 종착역은 영성이에요. 지성은 자기가 한 것이지만, 영성은 오로지 받았다는 깨달음이에요. 죽음의 형상이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로 올지, 온갖 튜브를 휘감은 침상의 환자로 올지 나는 몰라요.”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 돌려보내요. 한국말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죽는다고 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
어쩌면 지성인 이라는 그 분이, 죽어도 영은 살아있음을 깨우쳤기에 초연할 수 있다는 뜻인가? 어쩌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기에 초연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책을 읽어 갈수록 죽음을 앞두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더욱 믿어졌다.
“뒤 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거죠. 마이 라이프는 기프트였어요. 내 집도 내 자녀도 내 책도, 내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처음 받았던 가방, 알코올 냄새가 나던 말랑말랑한 지우개처럼, 내가 울면 다가와서 등을 두드려주던 어른들처럼, 내가 벌어서 내가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어요.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 -라스트 인터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 중에서-
돌아가니 괜찮고 선물로 받은 것이니 감사한 마음이 죽음에 대한 확실성 같았다. 책의 거의 끝에 ‘마지막 선물’이라는 부분에 지은이와 이어령 선생님의 대화에서는 멍해지고 한 참을 흐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
“말해보게.”
“혹시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세요?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 이라서요······.”
“보고 싶은 사람들이야 많았지. ~중략~ 못 견디게 보고 싶던 사람들인데 무뎌지더라고.”
“그리움도 무뎌진다고요?”
“그렇다네. 분노도 그리움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못 견딜 것 같고, 격한 감정이 오래가면 어떻게 살겠나? ~중략~ 별똥별이 훅하고 떨어지듯 그리움도 슬픔도 그렇게 찰나를 지나가벼려. 하지만 ‘왜 그렇게 보고 싶어 했을까?’ 이런 감정은 오래 남는다네. ~중략~”
~중략~
“지금껏 살아온 중에 제일 감각이 느리고 정서가 느린 게 지금이라네. 죽음을 앞둔 늙은이가 절실한 시를 쓸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아. 하나님이 잘 만드셨어. 내가 지금 20대 30대의 감각으로 죽음을 겪고 있다면, 지금처럼 못 살아. 내 몸은 이미 불꽃이 타고 남은 재와 같다네.”
“그런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도 무덤덤하신가요?”
“아니야. 신께 감사하지. 인간이 생생하게 고통 받을 것을 염려하여 감각조차 무디게 만드셨으니.” -본문 ‘마지막 선물’ 중에서 지은이와 이어령의 대화 중-
책을 다 읽고 반복해서 음미하고 메모했던 것들을 다시 보면서도 ‘죽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이어령 선생님은 죽음 앞에서 의연했음에 존경하고 감사드리게 되었다. 끝으로 책을 통해 알게 된 아름다운 과학적 지식 하나, 삶의 지혜 하나를 소개하는 것으로 책의 후기를 마친다.
"건강해 보이십니다.“
“나 같은 환자들은 하루에도 듣는 코멘트가 여러 가지야. ‘수척해 보여요’ 건강해지셨네‘ 시시각각 변하거든. 알고 보면 가까운 사람도 사실 남에게 관심이 없어요. 허허. 왜 머리 깍고 수염 기르면 사람들이 놀릴 것 같지? 웬걸. 몰라요. 남은 내 생각만큼 나를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도 ’남이 어떻게 볼까?‘ 그 기준으로 자기 가치를 연기하고 사니 허망한 거지. 허허.” -라스트 인텨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 중에서-
“난 옛날부터 참 궁금했어요. 왜 외갓집에만 가면 가슴이 뛸까? 왜 외갓집 감나무는 열린 감조차 더 달고 시원할까(웃음)? 그게 미토콘드리아(우리 몸의 세포 안에 존재하는 작은 기관으로, 세포호흡을 통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마치 세포안의 작은 발전소와 같다고 할 수 있죠. Google Gemini에서)는 외가의 혈통으로만 이어져서 그래요. 거슬러 올라가면 저 멀리 아프리카의 어깨 벌어진 외할머니한테서 내가 왔는지도 몰라. 허허.” -라스트 인터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 중에서-
October 2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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