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 크뢰거(Tonio Kröger)'는 중편에 가까운 단편소설이다. 토마스 만의 자전적 소설이자 성장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다. 주인공인 토니오 크뢰거가 어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어떻게 자라서, 어떤 갈등을 겪고 소설가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쓴 소설이다. 주인공 토니오는 크뢰거가(家)의 영사이자 큰 상회를 경영하는 좋은 집안의 아들로 크뢰거 집안이 선조 때부터 살아오던 유서 깊은 대저택은 도시 전체에서 가장 훌륭한 집이었다. 토니오의 아버지는 푸른 눈을 가졌고 항상 꽃 한 송이를 단춧구멍에 꽂고 다니는 키 크고 섬세한 옷차림의 신사이지만 아들의 좋지 않은 성적에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이다. 피아노와 만돌린을 기막히게 잘 연주하는 검은 머리의 정열적인 어머니는 아주 남쪽에 있는 나라에서 왔기에 도시의 다른 부인들과는 아주 딴판이며 아들의 성적에 대해 아무런 관심의 표명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토니오는 아들의 좋지 않은 성적에 화를 내는 아버지가 옳다고 생각했으면서도 평생을 아버지의 질책에 대한 강박관념에 산다.
‘토니오’라는 이름은 독일 북부에서는 굉장히 낯선 이름인 것 같다. 안토니오라는 이름을 가진 외삼촌의 이름을 따서 세례를 받았기에 토니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콤플렉스처럼 느껴 가까운 사람일수록 당당하게 ‘토니오’라고 불러 주기를 바라며, 누군가 크뢰거라 부르면 ‘토니오’라는 이름을 좋지 않아 그러는 것으로 매우 싫어한다.
토니오가 사랑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름이 한스 한젠이다. 금발머리에 파란 눈에다, 공부도 잘하고, 승마도 잘하고 체격도 당당하고 체조도 잘한다. 다른 친구들과 승마 얘기를 하고, 춤도 잘 춘다. 이 책의 저자 토마스 만을 동성애자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는데 토니오와 한스의 관계에서도 약간의 동성애자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푸른 눈과 금발을 가진, 항상 밝은 주인공 한스는 토니오의 눈에는 삶과 인생이 일치된 것 같은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다. 토니오는 그런 한스를 이런 식으로 부러워하며 사랑했다.
“그의 심장은 살아 있었다. 그 속에는 동경이 숨 쉬고 있었으며, 또한 우울한 선망과 아주 작은 경멸 그리고 무척이나 순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
토니오가 열여섯 되던 해 사랑에 빠졌던 소녀가 잉게보르크 흘름이다. 잉게보르크 역시 한스와 똑같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녀다. 머리를 만지기 위해 손을 올렸을 때 하얀 망사 소매가 팔꿈치까지 흘러내리는 모습이나 특유의 억양으로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울려 퍼지는 따스함에 황홀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것은 토니오가 사랑했던 한스 한젠을 쳐다볼 때 간혹 느끼던 마음의 떨림보다 훨씬 더 강렬한 것이었다며 잉게를 이렇게 그리고 있다.
“땋아 내린 풍성한 금발, 미소를 머금은 길쭉하고 푸른 눈, 주근깨가 총총 박힌 채 연하게 윤곽을 드러낸 콧등···.”
또한 토니오 자신이 얼마나 잉게를 사랑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사랑은 그에게 많은 고통과 번민과 굴욕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동시에 마음을 감미로운 선율로 가득 채움으로써 어떤 일을 온전하게 마무리 짓고 거기서 차분하게 무엇인가 완전한 것을 완성해 낼 수 있는 평정심을 가질 수 없게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기쁜 마음으로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몸을 완전히 내맡겼다. 그리고 온갖 정열을 다해서 그 사랑을 키워 나갔다. 그는 사랑이 인간을 풍성하고 생기 넘치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침착한 가운데 무엇인가 완전한 것을 창조해 내는 일보다 풍성하고 생기에 가득 찬 일을 동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잉게는 토니오에게 별 관심이 없다. 잉게의 굴욕적인 무관심에 토니오는 ‘행복이란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사랑받는 것은 허영심을 채우려는 매스꺼운 만족감에 불과하다. 행복이란 사랑하는 것이며, 사랑하는 대상에 아무도 모르게 슬쩍 다가갈 수 있는 조그만 기회를 노리는 것“이라며 자신을 달랜다.
토니오는 자아 분열의 모습을 자주 보인다. 한스와 함께 학교를 다니던 시절 시를 쓰지만 그것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이야기 하지 못하며 오히려 천박한 것을 하는 것인 양 숨기기도 한다. 크뢰거 가문의 연장자인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마저 그 뒤를 따라 죽음의 길을 떠난 후 상회는 등록이 말소되면서 가문이 몰락하고 어머니는 1년 상을 채운 뒤에 새로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나자 어머니의 행동이 경솔한 짓이라 생각 하면서도 그것을 터부시할 수 있겠는가 하면서 자신을 이렇게 경멸한다.
“그 자신이 시 나부랭이나 끄적거리면서 도대체 장차 무엇이 되겠냐고 물어도 대답조차 변변히 못하는 위인인 주제에···”
토니오는 그 이전에도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 될거냐?”고 물으면 그때그때 다른 대답을 하는 뚜렷한 인생관이 부족함을 증세를 표현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예술은 감미로운 향기를 담뿍 담은 공기를 호흡하는 것이라며 예술을 흠모하였다.
북독일 고향을 떠나고 저명한 작가가 된 뒤에 그와 나이가 비슷한, 서른이 조금 넘은 리자베타 이바노브나라는 이름을 가진 화가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 리자베타와 인간과 예술, 그리고 삶에 대해 대화를 하는 부분이 많은데 이때도 역시 예술가로서의 자존감의 부정을 나타낸다. 예로 “예술가들이란 항상 마음속에 모험을 품고 있는 허풍선 같은 족속입니다. 그러니, 제발 겉으로나마 마치 단정한 사람처럼 행동해야 하지 않겠어요···.“라던가, “예술적인 것은 오로지 우리들의 타락한 신경 조직, 가식 섞인 신경 조직에서 비롯되는 불안·초초감과 차디찬 황홀경일 따름입니다. 우리 예술가들은 일상의 인간적인 것에서 벗어나 비인간적인 것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또 이상하게도 인간적인 것과는 동떨어져 아예 관계 자체를 맺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라면서 예술가가 인간이 되어서 무엇인가 느끼기 시작하면 그것으로 그는 끝장난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토니오는 예술인을 일반인 즉 서민과 대비해서 자신은 서민으로 살지 못하는 것을 자책하듯이 이야기 한다. 이 대목에 이 소설의 가장 대표적인 표현이 나온다.
“리자베타 이바노브타! 제발 ‘천직’이니 ‘소명’이니 하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문학이라는 것은 결코 천직이 아닙니다. 그건 저주입니다.”
왜 문학을 저주라고 했을까? 통상적으로 저주는 신이 내리는 벌로 인식되어 있다. 그렇다면 “문학은 신의 저주”라는 글로 풀어 쓴다면 어떤 해석을 얻을 수 있을까? 인간은 신과 같이 전지전능하지 않다. 특히 삶은 자기가 뜻하거나 하고 싶은 대로 모두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과, 동시에 이는 신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예술은 인간이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 신은 인간에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나는 것을 사고나 예술이라는 공간에 가두었다. 창작의 고통을 산고의 고통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새로운 것의 창조를 위한 고통, 그것을 역설적으로 저주라고 표현한 것은 아닐까? 토니오가 덴마크로 여행을 떠나 호텔에 묵고 있을 때 한 그룹에 단체 손님이 댄스파티를 한다. 그곳에서 학창시절 사랑했던 한스와 잉게가 두 손을 잡고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문학을 하는 자신을 한탄하며 두 사람의 인간에 대한 부러움에 대해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다. “나도 너처럼 되고 싶어! 다시 한 번 시작하여 너처럼 자라고 싶단 말이다! 너처럼 올바르고 즐겁고 순박하게, 규칙과 질서에 맞게, 신과 세계의 동의를 얻으면서 자라나서, 아무런 악의가 없고 행복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싶구나. 잉게보르크 흘름, 너를 아내로 삼고, 한스 한젠, 너와 같은 아들을 두고 싶구나! 인식의 저주와 창작의 고통이 주는 저주로부터 벗어나 지극히 평범한 행복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찬미하고 싶구나···.”
하지만 토니오의 연인 리자베타는 문학에 대해 긍정적 것을 설명하며 토니오를 설득하려 한다. “문학의 작용이란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고 신성화할 수 있다든가, 인식과 언어를 통해 열정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사실 같은 거요. 문학이란 이해와 관용과 애정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문학 언어는 인간을 구원하는 힘이 있으며, 문학 정신은 인간 정신 전체를 두고 볼 때 가장 고귀한 현상이며, 문학 하는 사람은 완전한 인간이며 성자(聖者)와도 같다.”
하지만 토니오는 물러서지 않는다. 예술 하는 자신을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정의하면서 삶과 예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동경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주장한다.
“‘삶’은 정신과 예술의 영원한 대립 개념입니다. ‘삶’은 피비린내 나는 위대함과 야만적인 아름다움의 환영(幻影 : 눈앞에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즉, 우리와 같은 비정상적인 인간들에게는 정상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동경하는 영역은 정상적이고 예의 바르고 동시에 사랑스러운 삶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부하면서도 매력적인 모습을 띤 삶이랍니다!
세련된 것이나 상궤를 벗어난, 악마적인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그것에 깊이 열광하는 사람은 아직 예술가가 되려면 멀었습니다. 천진하고 소박하며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약간의 우정, 헌신, 친근감,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그리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은 아직 예술가각 아닙니다. 평범함이 주는 환희에 대한 은밀하고도 애타는 그리움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소설의 끝은 리자베타에에 편지를 쓰면서 자신은 두 세계 사이에 서있기에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다고 한다. 다른 예술가들은 자신을 시민이라 부르고 시민들은 자신을 체포하려 한다며 살아가는 게 힘들다고 한다. 예술가의 기질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깊이 뿌리박혀 있다면서 예술가는 일상이 주는 즐거움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한다. 토니오는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글거리는 허깨비들을 풀어주는 것이고 그들에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가장 깊고 은밀한 사랑이 향하는 곳은 금발과 푸른 눈을 하고 있는 사람들, 밝고 생기에 넘치는 사람들,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평범한 사람들, 즉 한스와 잉게와 같은 사람들이라며 이 사랑을 책망하지 말라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것이 가장 인간적인 사랑이라며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 토니오의 예술가와 서민 사이에 이원적 혹은 자신의 삶에 대한 다중적 자아분열의 모습을 그려내면서 아름다운 문장의 표현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여행의 목적지인 덴마크로 가는 배의 상황과 덴마크에 도착해서 해안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 등 두 곳이 아주 인상적이어서 따로 뽑았다.
“구름들이 빠른 속도로 달을 스쳐 지나갔고, 바다는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둥글고 고른 파도들이 질서 정연하게 밀려오지 않았다. 대신 바다는 저 멀리 창백하고 가물거리는 빛을 발하며 찢어지고, 채찍질당하고, 뒤흔들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또한 바다는 불꽃과도 같이 뾰족하고 거대한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핥고 솟아올랐다가, 거품이 부글거리는 깊은 물구덩이 옆에 톱니 모양의 괴이한 형상들을 치솟게 했다. 그러고는 거대하고 엄청난 힘을 지닌 두 팔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물거품을 사방에 집어던지는 듯했다.”
“바다의 그윽한 숨결이 모든 만물을 깨끗하고도 신선하게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그러다가 때로는 폭풍우가 치는 잿빛의 날들이 오기도 했다. 파도가 마치 뿔로 들이받을 듯이 달려드는 황소들처럼 머리를 숙이고 노호하면서 해변을 향해 쳐들어왔다. 그때 해변은 안쪽 높은 곳까지 파도에 씻기면서, 물에 젖어 반짝이는 해초와 조개 그리고 물에 떠밀려 온 나뭇조각으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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