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메 이야기

남도 나 같이, 끝도 처음 같이

송삿갓 2010. 3. 24. 22:49

중학교 다닐 때까지 키가 작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작지만 중학교 때 반에서 2번 이었으니까

지금보다도 훨씬 작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가훈처럼 사용하는 글귀가 중학교 1학년 때 급훈으로

“남도 나같이, 끝도 처음같이”입니다.

잘 지키지 못할 때도 있지만 자주 인용하면서 각인시키고

가능한 그렇게 살려는 노력을 합니다.

 

작은 키에 보잘 것 없는 생김새, 그래서 주목받지 못하던 내가

학교 유도부에 들어갔습니다.

어떤 계기로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중고등학생이 같이 있는 유도부에 들어가

몇 달 동안 무서운 선배들로부터 기합을 받으며 운동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주목 받고 싶어 그랬는지 모르지만 오래하지 못하고 그만 두었습니다.

 

나는 충청남도 연기군(지금 거론되고 있는 세종시)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곤 아버지가 일 하시던 서울과 고향인 전라남도 영광을 오가며 살다가

다시 외갓집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2학년을 마치면서 88올림픽 선수촌이 된 오금동이라는 곳을 이사를 해서

가락시장 앞에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했고

그 옆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나는 고향이 어딘가에 대한 혼란이 있습니다.

본적은 아버지의 고향이 전라남도 영광이지만 거기서 산 기간은 짧을뿐더러

기억도 거의 없고 외갓집이 있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곳이 고향 같습니다.

그런데 고향은 본적이 있는 곳이라는 것 때문에 영광이라 하게 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잘 아실지 모르지만 자랄 때

그리고 사회에 진출해서까지 전라도에 대한 편견과 터부시하는 문화로

고향이 영광이라 하면서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서울로 전학 온 지 2년 반이 지난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는 지금의 가락시장 근처에 중화요리 식당을 개업하면서

거기서 결혼할 때까지 주소지가 되었고 본적 역시 그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공부 잘 못했습니다.

시골에서 온 촌뜨기에 어렵게 살아야 하는 환경에서 공부를 멀리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본적도 없었고

아버지를 원망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화장실도 없는 철거민촌의 6평짜리 단독 주택이 우리 집이었고

아버지는 시골에 계신 할머니와 우리 가족을 부양하기에 허덕였던 것 같았고

생활비의 대부분은 정해진 일 없이 닥치는 대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시는 어머니가 담당하셨던 것 같으니

내 자신이 이상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할 여건이 못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무슨 자존심이 있었는지 늘 공부하라고 하셨고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사정도 하고 때로는 매로 다스렸습니다.

 

나는 군것질을 잘 못합니다.

특히 단 것을 잘 못 먹었는데 아마도 어렸을 때 많이 해볼 수 없어

그런 것으로 추측합니다.

남들이 군것질 하는 것이 부러워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두 살 아래인 동생을 데리고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습지만 아마도 내 스스로 일해서 돈을 만진 최초의 사건일겝니다.

 

장사를 해서 남은 돈(기억으로 18원)으로 동생 조금 주고

연탄 한 장에 미원 한 봉투사서 집에 두고

얼음 욕심에 한 덩어리 샀는데 너무 커서

남은 것을 아침에 먹겠다고 장독대의 항아리에 넣어 뒀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얼음은 없어지고 묶었던 새끼만 남았더군요.

 

그 사건으로 어머니에게 무자비한 난타를 당했는데

“하라는 공부 안 하고 누가 그런 것 하랬느냐?”며

“너만은 공부 시키려고 이렇게 고생하는데...”라며

한탄 하셔서 더 이상 산업전선에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많이 철부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아버지에 대한 두 가지 추억이 있는데

남한산성 밑에 거여동이라는 곳에 탄산약수터가 있는데

어느 가을날 논길을 따라 아버지와 걸으며

혀 위에 침방울을 만들어 날리며 약수터에 다녀온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와 함께는 첫 추억이기에 기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눈이 많이 오고 추운 겨울날 몸을 잔뜩 움츠리고 총총걸음으로 학교를 가는데

누군가 “권식아!”하기에 고개를 들어보니 일터에서 집으로 오시는 아버지였습니다.

추운데 버스타고 학교 가라며 5원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설의 세뱃돈을 빼고 평상시에 처음으로 받은 용돈으로 기억합니다.

당연히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갔죠.

 

아! 초등학교 4학년 때 예사롭지 않은 추억이 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야단맞고 아침을 굶고 도시락도 없이 학교 갔다가

하도 배가 고파서 미술시간에 쓰는 동그란 플라스틱 곽에 들어있는 풀을 먹고

배탈이 나서 끙끙거리자 담임선생님 내가 먹고 싶어 하던 급식 빵과 회수권을 주며

집으로 빨리 가라고 했던 기억이 있고

어머니가 싸 주신 도시락을 5학년 형에게 2원씩 받고 팔았다가 들켜서

무자비한 난타를 당한일도 있을 정도로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아들이었답니다.

 

중학교 때는 학교 옆에서 식당을 하는 부모님 덕분에 조금은 여유로워 졌던 것 같았고

학교 공부도 조금은 더 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해 봐야 반에서 15등 내외, 320명중 90등 내외였으니 주목받는 수준은 아니었죠.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시골에 계시던 삼촌이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면서

주소지가 우리와 함께 하게되어 잦은 첩촉을 하면서

세상살이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그분이 읽다 만 책을 많이 접하게 되면서

교과서, 참고서나 소년동아 등의 월간지 말고도

책 종류가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어려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두꺼운 책을 본다는 것도 깨닳았답니다.

 

에궁~ 오늘도 많이 길어졌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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