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메 이야기

크리스천이 되면서...

송삿갓 2011. 4. 27. 00:10

예년보다 조금 늦었던 부활 주일이 끝나면서 뭔가 분주하면서도 마음을 다 잡으려 했던 것들에서 평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고 충격 속에서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랄까 아니면 소통을 위해서 노력하였고 우찌무라 간쪼의 “회심기”를 읽으며 참 된 신앙인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습니다. 이를 QT 혹은 기도 내지는 회개라는 기독교적 용어가 있지만 거부감이 있어 그냥 소통의 노력이라고 표현합니다.

 

제가 크리스찬 이기는 하지만 대중식당에서 식사를 놓고 대표통성기도나 “은혜를 받았다”는 등의 기독교적 용어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은 신앙심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표현에 대한 쑥스러움이 많아 그런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많이 하였지만 남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겠다는 것으로 변을 합니다.

 

저의 크리스천 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내 성경을 처음 갖게 된 것이 중학교 때였는데 그냥 읽고 싶어 구입했었고 부활절에 삶은 계란 준다는 유혹에도 교회에 접근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목사 딸이 예뻐서 그래서 그녀가 놀러 오라는 것에 떨리는 가슴을 안고 녹슨 큰 철탑에 종이 있는 교회에 놀러 갔지만 마루를 통해 올라오는 습한 냉기의 냄새에 거부감과 음산한 기억이 교회의 첫 방문입니다.

 

이후 대학에 입학새서 학점은 없지만 꼭 수강해야 하는 필수과목인 채플 때문에 2년 동안 매주 예배당을 찾은 것이 정기적인 참석이었지만 그야말로 출석의 의미 이상은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20대 초반인 그 때 저명한 강사들이 강의 내용에 감동을 받은 것도 많지만 그 역시 강의실에서 듣는 수업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절에 다니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평안을 찾으면서 40이 넘으면 모아 놓은 책 싸들고 절에 들어가 살고 싶다는 꿈을 키웠던 시절 이었습니다. 지금의 아내가 그 허망 되고 책임감 없는 꿈을 접어야 한다는 결혼조건으로 접지 않았다면 지금 쯤 그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가족 중 아버지가 제일 먼저 크리스천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어머니 순이었는데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개종시키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하시다 어느 순간에 그만 두시더군요. 그래서 “왜 그만 두셨냐?”고 물었더니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거라는 대답을 하시더군요. 그렇게 몇 년이 더 흐르고 미국으로 떠나던 해에 이것저것으로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는 제 모습을 보고 저희 집으로 목사님에게 여러 번 심방하도록 요청하셨고 그것 역시 불편하다고 거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님은 수시로 찾아 오셨고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안 어느 날 목사님의 방문에 “버틸 힘이 없습니다. 오는 일요일부터 교회를 나나겠습니다.”라는 대답에 이어 혼자 가는 것이 너무 쑥스러워 딸과 함께 찾은 것이 교회의 첫 출석이었습니다.

 

좋더군요. 늘 세상에 혼자 떨어져 싸움을 해야 한다고 생각 했는데 모든 걸 내려놓으라는 설교에 이어 많은 교인들이 환영하며 위로해 주는 것에 쉽게 빠졌습니다. 원래 뭔가 빠지면 헤어나질 못하는 성격 때문인지 정말 깊이 빠졌습니다. 세례를 위해 받는 교육이나 성경공부 등은 새로운 것에 대해 배우는 것을 즐기는 나에게는 환상이었습니다.

 

그리곤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겨울 수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수양회 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어머니와 할머니가 두 손을 꼭 잡고 다니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고 아버지가 잠자리를 준비해 주시고 옆에서 같이 자고 아침에 일어나 같이 침구를 정리하고 새벽기도를 하는 것이나 같이 줄을 서서 식사를 하고 같이 성경공부를 하면서 감동과 감사가 넘쳤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그렇게 함께 한 적이 없는데 그리고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수양회가 그 모든 것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의 기도와 함께 1월의 차가운 물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곤 미국으로 왔습니다.

 

미국에 도착하여 사촌동생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도착한 지 2일 만에 첫 예배 참석한 교회가 지금의 교회입니다. 크리스천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싱싱함에 또한 한국에 막 온 신참 컴퓨터전문가에 책 편집까지 할 수 있는 재능이 많은 새교우로 대접받으며 뭐든지 열심히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그게 참신앙인이고 최고로 잘 하는 것으로 알고 내 자신도 우쭐되었던 것 같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긋난 신앙인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을 떠났다는 슬픔이나 외로움 그리고 새로운 환경의 적응이나 어려운 경제적 여건은 그런 신앙생활로 인해 참고 견딜 수 기본이 되었습니다. 좋지 않은 건강에 치료를 받으면서 더욱 그러한 것에 기대게 되었고 신앙만 같이 할 수 있다면 어느 누구와 어떤 형태의 모임에도 빠지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가족들과 멀어지고 관계에 병이 들어 큰 구멍이 생기는 것을 몰랐습니다. 밖에서는 좋은 교인, 좋은 사람이었는데 집에 들어오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며 거리를 두는 가족들이 미워지기까지 하면서 거리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설상가상 교회에서 더 많이 그리고 깊이 알아갈 수록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파벌이나 상대에 대한 모함이나 적대감은 물론 부조리에 추악함이 보였습니다. 거기에 경기가 주츰 하면서 교인들이 힘들어 하는데 담임목사의 사례비 인상은 내 종교관에 대해 혼란과 격함을 일으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례비를 인하하자고 주장하였더니 순식간에 많은 적이 만들어 졌고 열정과 마음은 일순간에 식어 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의 모든 봉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교회의 투사가 되었습니다.

 

가정불화의 마음은 교회와의 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었고 그로 인한 차가움은 다시 가족들과의 관계를 더욱 멀이지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지탱하여 준 모임이 “엠마오 제자반”이라는 작은 성경공부 그룹이었는데 교회나 가정에서의 부족함을 그곳에서 채우며 위로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그룹이 OM(Operation Mission)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배로 선교하는 r그룹으로 이해하는 단체인데 그 첫 과정의 Mission Perfective라는 과정의 이수였습니다. 세계의 많은 선교 석학들이 준비한 선교에 대해 집대성한 책을 사전에 공부하고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최악의 건강, 최악의 가정생활, 최악의 신앙생활 일 때 그 어렵고 두꺼운 책을 받아들고 6개월여를 정신없이 파고들었습니다. 육체적 통증이 너무 심해 같은 자세로 10분도 버티지 못할 때 몸을 뒤틀면서 읽고 메모하고 기록하며 준비하였습니다. 그렇게 준비하고 시작한 수업은 준비 부족한 강사들에게 실망을 하기도 하였지만 철저히 준비한 강사들(모든 강사가 목사였음)에게 매료되어 오랜만에 정말로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끝냈을 때의 뿌듯함이나 대견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지만 그로 인해 얻은 지식은 내가 선교학의 전문가가 된 것으로 착각이 들 정도로 즐거웠고 누군가와 선교에 대해 토론을 하거나 할 때 행복함을 만끽하면서 참 신앙인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가족들과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고 더 악화되었습니다.

 

집에 충실하지 않는 가장, 그리고 생활전선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가장이며 참 신앙인을 가장한 무능력자로 각인되어 회복이 불가능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 때 가정의 회복을 위해 중요한 터닝 포인트를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좋은 하루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