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어머니와 통화 중에
병원에 가자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씀을 듣고
아버지와 직접 통화를 하면서 “무조건 빨리 병원에 가세요.”라는 추궁에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한다.”라는 마지막 통화를 하였던
느낌, 목소리가 생생한데 3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흘렀다.
그 때 더 강하게 병원에 가실 것을 권유하지 못했던 후회
그래서 이 세상과 결별 하셨을 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이
마음 한 켠에 자리하여 수시로 나를 괴롭히듯 생각나고
어쩌면 아직도 생생이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내일이 만 3년 되는 날 이라 한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그리 많지는 않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추운 겨울 날
훌쩍거리는 코를 들이 쉴 때 어는 것 같은 추위를 느끼며
학교로 가고 있는데 직장에서 며칠 만에 돌아오는 아버지가
버스타고 가라며 주신 용돈,
그리고 한 번은 벼가 익어가는 계절
아버지와 함께 논길을 걸어 약수터에 가면서
입으로 물방울을 만들어 바람에 날리던 추억이
아마도 아버지와 단 둘이 만든 가장 낭만적이 추억으로 기억된다.
대학을 합격하여 학교 등록금을 내러 가는 날
버스 안에서 앉아 있는 아버지의 머리를 보며
쉰 머리가 여기저기 보여
“우리 아버지도 나이가 들었구나.”라는 추억이
지금의 내 나이보다 한 참을 어리셨고
내가 장가를 가던 때나 내 아이가 태어났던 때도
지금의 내 나이 보다 젊었었다.
명절이며 해 주시던 오향족발이나 오향장육은
지금은 어디에서도 먹을 수 없는 추억의 음식이 되어 버렸다.
마장동 시장에서 돼지족발과 내장, 고기 등을 직접사서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땀에 흠뻑 적시며
붉게 달군 철근으로 족발의 구석구석을 지져대는 것을 본 것이
전부였고 그 뒤는 어떻게 만드는지 알지 못하지만
좋은 한약재 냄새가 나는 고기와
고기를 삶아내고 남은 국물로 만들어 낸 짙은 고동생의 묵을
정신없이 먹어대던 것이 우리 가족들의 공통된 명절 추억이다.
명절 때 그 고기와 함께 곁들인 물만두 역시 최고의 음식이었다.
사람이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얇게 민 만두피에
돼지고기와 부추, 양파 등의 양념을 손으로 다진 속을
고의 갈비로 만든 숟가락으로 빗어낸 한 주먹도 안 되는 물만두 역시
이제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 되었다.
은행에서 새로 바꾼 물에 둥둥 뜨는 1원짜리 동전을 삶아서
만두의 일부에 넣어 그 동전을 찾는 어린이에게
상금을 주는 것은 중국의 풍토이지만
만두를 더 많이 맛있게 먹게 하는 우리 가족의 설 풍경이었다.
그런 몇 안 되는 강한 추억에
아버지는 늘 근엄하고 올바른 아버지다웠다.
내가 자라 장가를 가고 아버지가 되어서
추억 속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을 때
내 자신의 모습과 행동이
아버지답지 않다는 생각,
아버지를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오십을 넘긴 지금
때로는 철부지 같은 생각이나 행동에
그리고 자제를 잘 못해 실수를 하고 난 후
내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에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에
더욱 후회를 하고 자책을 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정신적 지주를 잃은 것 같고
세월이 흐르면서 잊혀 지는 것이 아니라
허전함과 슬픔이 더욱 깊어진다는 이야기를 한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가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갑자기 아버지가 생각나고
마지막 통화의 목소리나 감정이 되살아난다.
그러면서 “그 때 병원에 바로 가시게 했더라면..”하는
후회의 자책도 같이 하게 된다.
마지막 임종의 순간을 지켜보지 못했다는 후회는 별로 하지 않지만
명절에 음식을 만들 때
그리고 많은 시간들에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고
내가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행동을 하고 후회 할 때
“내 아버지는 안 그러셨는데”라는 생각과 함께
그리움이 깊어진다.
Aug 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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