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아틀란타 날씨는 초여름 같은 열기가 움직임을 둔하게 합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조금이라도 걸을라 치면 호흡이 가빠지기도 전에
가슴골 사이로 땀이 먼저 흐릅니다.
하늘은 꽃가루가 황사같이 날려 뿌옇고
차 위에 살포시 앉아 모든 차를 노란 자기 색으로 덮어버리곤 합니다.
참 간사하죠? 불과 한달반 전만해도 춥다며 움츠리다
그 뒤에 끊임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제발 비 좀 그만 내려라”했었는데
비 안 오고 날씨 더워지니까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되었으니 말이죠.
날씨가 더워서 라기 보다는 온 천지를 뒤덮을 것 같은 꽃가루를 씻어내기 위해서라도
비가 내렸으면 하는 마음인데 다행이 오늘 오후에 비 소식이 있네요.
마스터즈 하는데 거기는 비가 오지 말아야 더 좋을텐데 말입니다.
짖굿기도 하셔라......
형님의 글 중에 “문풍지”라는 단어를 보면서
참으로 우리 말중 정감이 가는 단어가 많음을 또 느낍니다.
맞습니다. 어렸을 적 시골에 살 때
다가오는 겨울 앞에 누렇게 변한 창호지를 뜯어내고
새 하얀 창호지를 바르고 앞문은 중앙의 조금 아래쪽에
조그만 유리를 넣어 밖을 볼 수 있도록 단장을 하고 겨울을 맞이하지요.
문의 가장자리에 창호지를 날개처럼 덧대어
문을 닫았을 때 공간을 막아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지혜가 담긴 문
추운 겨울 어느 날 조금 뜯어져 나풀거리던 문풍지가
쌩쌩 부는 겨울바람에 떨려 다라~~~~락 소리를 내면
다른 종이로 덧대기 시작하면서
누더기와 함께 조금씩 바래가며 겨울 났지요.
그러다 2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이사를 해서
지금은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가 된 오금동에 살게 되었습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하던 인조가
힘들어 오금이 저리니 쉬어가자고 하여 오금동이 되었다는 동네입니다.
그 동네는 이촌동을 강제 철거하여 이주시켰던 여러 동네 중의 하나로
한 부지가 6평씩 구분되어 분배해서
있는 집은 몇 부지를 합치고 없는 집은 그 6평에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6평에 지어진 집,
방 두 개, 조그만 부엌에
미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조그만 툇마루가 있어 신발을 벗어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찍어 내듯이 구조가 같은 가운데 구멍 세 개 뚫린 불럭 쌓아 만든 집이었습니다.
화장실은 없어 마을 공동 화장실을 써야 했고
겨울이면 차곡차곡 쌓여진 변이 얼어붙어 봉우리를 만들어 올라와 바닥 보다 높아져
결국은 대변을 볼라치면 닿을락 말락 해서 엉덩이의 조준점을 틀어야 했던
냉난방이 전혀 되지 않고 전구마저 언제 끊어진지 모르게 불이 들어오지 않아
밤이면 무서워서 가기 싫어하던 그런 공동 화장실이 있는 동네였습니다.
아버지는 어찌어찌 하여 어머니와 나, 두 동생을 거기로 이사하게 하였습니다.
부엌문을 열면 바로 공동 우물이 맞닿았고
그 옆에 장독대가 있어 크기를 달리한 항아리 몇 개가 있었죠.
동네가 만들어 지기 전에는 공동묘지였다는 동네에
어느 집이 잘 안되고 사람이 자주 아프면 무당을 불러
덩~덩~덩더쿵~ 하며 북과 징, 꽹과리를 치며 굿을 하고
“이 집에 죽은 귀신이 깔려 있다”는 무당의 말에
방바닥을 파 보면 정말 오래 된 시신이 나오던 동네,
세 동네로 구분되어 있던 사이사이 복숭아밭과 공터가 어린이들 놀이터였지만
여기저기 파 헤쳐진 무덤의 자리는
사각형의 관 모양의 구덩이가 있어 밤이면 나가기 무서워했던 동네였습니다.
그런 동네에 지어진 6평의 집에 방 한 개는 또 세룰 주었고
한 방에 올망졸망 사는 보금자리였습니다.
다른 집보다 좋게 한다는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불럭 두 장을 더 올려 지붕을 높게 수리한 집의 방 한쪽 벽에
미닫이로 만들어진 조금만 창이 있어 그 창을 통해
달 밝은 밤 자리에 누우면 달도 보고 별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의 겨울나기는 많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연탄 화덕 한 구멍이 있어 거기서 밥하고 국 끓이고, 난방을 하면서
솥에 물 담아 얹어두었다 아침에 가족이 나눠 찬물에 타서 세수를 하고
남은 물로 설거지를 해야 함에도
하루에 연탄 한 장으로 다 해결해야 했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난방이 방 구석구석 모두 따뜻 할리도 없어
가능한 화덕 가까이 잠자리를 만들고 이불 하나로
어머니와 나, 그리고 동생 둘 넷이서 자야 했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장난이라도 할라치면
풀썩거리는 이불에 더운 공기 빠져 나가니
움직이지 말라는 어머니의 하늘과 같은 명에 가만히 있다가
몸이라도 틀라치면 어머니는 “풀썩거리지 말라”며 호통을 치곤 하셨습니다.
그런 겨울 아침에 일어나면 벽 중간에 매달린 미닫이 창에는
하얗게 성에가 끼었고 그 밀도로 밖의 온도를 추측하곤 했답니다.
이불 밖으로 나온 얼굴에 입으로 후~ 하고 불면
입김이 서렸고 웃목에 두었던 자릿기가 꽁꽁 얼어
추위에 치를 떨며 이불 밖으로 나오기 싫어했던 집입니다.
쌩쌩부는 바람에 너풀거리는 창호지가 다르륵 하며 소리 내던 문풍지와 달리
창틀에 헐겁게 끼워진 유리가 달달거리며 나는 소리가
소음을 지나 자장가처럼 들리거나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로 착각을 하며 꿈을 꾼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집에 귀신만큼이나 무서운 게 있었으니 바로 연탄가스입니다.
저녁에 연탄가는 시간을 잘 못 맞춰서 갈아 넣고 충분한 화력이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면 연탄가스가 새어 나와 중독이 되고
아침에 일어나 그렇게 중독된 사람이 있으면
차가운 길바닥에 누이고 김칫국물이나 동침이 국물을 억지로 먹여 깨어나게도 하였지만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참사가 많은 겨울나기였습니다.
그렇게 춥게 사는 6평의 집에 가끔 아버지가 오시는 날에는
어머니가 화덕 마개를 더 열어 따스하게 보낼 수 있었고
뭔가를 사 들고 오시니 아버지 오시기를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겨울을 나고 봄바람이 따스해 지기 시작하면
집 앞 우물가에 큰 고무 다라에 물 받아 홀딱 벋기고 들어앉혀
겨우내 덧 씌워진 때와 터서 쓰라린 손등의 때를 불려
“못 살아도 깨끗하게 살자”는 어머님의 푸념 섞인 한탄과 함께
씻어내었던 동네의 그 시절 나는 10살, 부모님은 30을 갓 넘었으니
부모님의 고단한 30대 삶이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집니다.
어렸을 적 서울 살다가 아버지 고향 영광을 거쳐 외갓집 동네에 살다
다시 서울에서의 삶이 그렇게 시작 되었습니다.
우물 앞 6평의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