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약간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네요.
경기가 좋아 지고 있는지 지난 3월과 이번 4월 Sales가 조금 늘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매출이 늘면 자재 수요가 많아지고
Aging Payable과 Aging Receivable이 높아지면서
Cash Flow가 좋지 않아져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장 건물 SBA Loan을 Process 중인데 쉽지 않네요.
그래도 해결 될 것이라 생각하며 풀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이민 삶이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많지 만
한 편으로는 이만큼 사는 것에 대견하고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 형제들 이야기를 해야 되겠네요.
저는 5 형제 중 장남입니다. 셋째까지 두 살 터울이고 그 밑은 6살 아래,
그러니까 나 하고는 10년 차이나는 넷째와 한 살 아래인 막내가 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고향 즉, 충청남도 외갓집에서 태어났고
바로 밑에 동생은 이촌동 어디에서 태어났는데 잘 모릅니다.
그리고 그 밑 셋째는 지금의 경기도 부천, 옛 지명 소사에서 태어났습니다.
셋째가 태어나는 날 네 살 때 11월의 기억이 어렴풋이 있습니다.
어머니와 나, 동생 셋이 조그만 방에서 자고 있다가
어머니가 우리 형제를 깨우고 이부자리를 곱게 개어 윗목에 밀어놓고
우리를 거기에 조용히 앉아 있으라 하고는 혼자 몸부림치며 셋째를 낳았습니다.
아이를 거의 낳았을 무렵 동네 할머니가 와서 아이들 받아들고 어머니 양쪽에 누여 놓고
물을 끓여 씻어 주고 미역국을 끓이는 법석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셋째는 아들과 딸, 쌍둥이었습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계신 전남 영광으로 이사를 하였고
두 아이가 번갈아 가며 많이 울던 기억과
겨울이 채 지나지 않아 여자 아이가 죽어 강보에 쌓아
마을 뒷동산 어디로 옮겨가는 것까지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그 이후 우리는 집에서 그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는 금기로 되어 있었고
어머니는 누군가 자녀가 어떻게 되냐고 물으면
“딸은 낳아 보지도 못하고 아들만 넷”이라고 대답하곤 하였습니다.
아마도 세상에 태어나 얼마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아이를 가슴에 묻고
미안한 마음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잊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모르지만
늘 그렇게 대답하곤 하였습니다.
언젠가 내가 어머니에게 그 아이에 대해 물었는데
어머니 말씀이 먹는 것이 넉넉지 않아 젖이 충분하지 않았고
다른 이유식을 할 수 없어 굶어 죽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것도 넉넉지 못한 가사에 대한 원망스런 말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후 서울의 오금동 6평 집에 살 때 넷째가 태어났습니다.
다섯째인 막내는 아주 특이한 동생이죠.
그 아이는 내가 고등학교 다니 던 어느 날 9살의 나이에 양자로 들어 왔습니다.
어린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호적도 만들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헤어지면서
엄마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였고 아버지 역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면서
큰 아버지 집에 맡겨져 자라게 되었다고 합니다.
큰 어머니에게 구박을 받으며 호적이 없어 학교도 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우리 부모님이 선뜻 양자로 들이겠다고 하여 우리 형제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입적하여 벌금을 내면서 호적을 만들고 학교도 입학하였지요.
그 아이는 우리 형제들 중 유일하게 유치원을 다닌 인텔리로
처음에 왔을 때 엄청나게 똑똑하고 눈치가 빨랐습니다.
하지만 자라 청소년이 되면서 약간씩 틀어졌습니다.
자신의 태어난 배경에 대한 불만과 우리 가정 형편이
다시 기울어져 좋지 않을 때 청소년기를 맞이하였기 때문에
가 생각하는 충족한 생활을 하지 못하는 불만으로
집을 멀리하고 별로 좋지 않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큰 사고는 없었지만 말썽을 끌고 다녔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가정 형편에도 철부지처럼 사는 막내와 어머니의 갈등은
막내가 가정을 점점 멀리하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형들의 물건을 동의 없이 사용하거나 처분 하는 등의 행위로
형들과의 갈등으로 멀어지기만 하였습니다.
나에겐 그러지 않았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의 사건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막내는 군대를 제대하고 바로 집을 나갔고 나에게는 간간히 찾아와
용돈을 요구하거나 사고의 뒷 수습명목으로 돈을 타가곤 했습니다.
그러다 그것도 연락이 끊기고 결혼 했다는 소문만 듣다가
어느 날 명절에 아내와 딸을 데리고 집에 왔었는데
생활이 어려운 것 같이 보여 가슴 아파하기도 하였습니다.
더욱이 그 아내 역시 사생아이고 그녀와의 만남도 정식결혼이 아니라
그냥 동거 생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의 출생과 같은 삶을 자신의 아이에게 물려주는 것 같아
나 혼자 숨죽여 눈물도 흘리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미국으로 왔고 그렇게 몇 번인가 왕래를 하면서
어머니에게 돈을 빌리려다 어머니가 거절하자 발걸음을 끊었고
지금은 연락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재산정리를 하면서
그 막내가 호적에 있고 연락은 되지 않아 문제가 생겨
동생이 호적말소 절차를 진행하고 있지만
연락이 되면 계속 가족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우리는 독수리 오형제라고 하였던 추억도 있고
다섯이 자라면서 먹어치우는 과정에서
어머니는 무섭다고 할 정도로 왕성한 식욕을 가졌던 기억도 있는 오 형제가
나와 넷째는 미국에 둘째와 셋째는 한국에
그리고 막내는 연락이 되지 않은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옛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오늘도 형제들 얼굴을 떠 올리며 기도를 하고
하루를 시작해야 하겠네요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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