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유복렬 지음) 세 번째 이야기 - 인연
2014년 9월 26일, 올랜도로 떠나야 하는 날 묘한 감정에 휩싸인 아침, 출장 준비물이 있어야 하는 테이블 위에는 책 한권만 덩그러니 있다. 지난 몇 주를 정신없이 보내는 일정에 며칠 전부터 출장에 뭘 가지고 가야지? 생각하다 제일 먼저 준비해 놓은 물품이다. ‘왜 그랬을까? 나답지 않게 왜 그랬을까?’. 나는 원래 삼국지 빼고는 두 번 이상 읽은 책이 그리 많지는 않다. 하지만 이 책은 읽기를 두 번, 정리 해 본다고 한 번 등 벌써 세 번을 읽었기에 다시 읽겠다고 다른 것을 제치고 제일 먼저 준비할 이유가 뚜렷하지 않았다. 출장 하루 전 저자와 저녁을 하면서 “내가 유 작가에게 아부하려고 출장 물품에 작가님의 책을 준비하였고 이 번 기회에 한 번을 더 읽으려 합니다.”라고는 하였지만 그건 충분한 이유가 아니었다. 출장 준비를 하고자 했을 때 아무런 단순하게 생각 없이 책이 있는 곳에 마음과 손길이 갔고 출장 물품 1번이 되었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고 예측할 수가 없다. 나와 책의 저자는 1년 전만 해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고 그 이후에도 한인 행사에서 그저 한두 번 참석자 중의 한 사람으로 지나쳤던 사람이다. 지인의 권유에 책을 읽고 ‘이 사람 대단한 사람이다.’라는 느낌과 함께 늘 하듯 내 블로그에 책 후기를 남겼다. 저자가 그 후기를 보고 같은 애틀랜타에 있다는 이유로 나를 찾았고, 강연에 참석하여 만나 책을 선물로 받고, 우리 CBMC 모임에 초청하여 강연을 듣기 위해 연락 관계로 전화 통화는 몇 번 했지만 한 번도 사적으로 만난 일이 없다. 개인적으로 좋은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남자와 여자, 한국 공무원과 미국 이민자, 그럴싸하게 어울릴 명분이 별로 없었기에 가끔 한인 행사에서 만나면 반갑지만 여러 사람 중의 하나로 지나칠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였었다.
그러던 하루 그러니까 작가와 첫 만남이 있은 후(첫 만남을 작가가 나에게 책을 선물로 준 날로 인식) 6개월여가 지나 뜬금없이 전화가 왔다. “회장님 한국에서 연락 받은 거 있으세요?” 반갑긴 했지만 영문을 모르는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용인 즉 기독실업인회(CBMC)에서 귀한 손님을 모신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애틀랜타의 CBMC에 나 이외에 아는 사람이 없어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영문을 모르는 내가 애틀랜타의 CBMC 대표가 아니라는 생각에 알아보겠다고 해야 했지만 반가운 마음에 만날 것을 약속하였다.
전화를 받은 며칠 뒤 애틀랜타CBMC 전임 회장으로부터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받는다. 해서 “안 그래도 영사관에서 전화를 받아 만나기로 했다.”고 하자 “복잡한데 얽히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넘기라”는 조언을 듣는다. 헐~ 이야말로 대략 난감.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이미 약속한 것을 변경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결국은 연합회 회장을 대동하고 영사관을 찾았다. 그렇게 책의 작가와 나는 다시 대면을 하면서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이명박, 그분이 올랜도에서 있을 2014 CBMC World Convention에 가는 길에 애틀랜타지역 CBMC와 만남이 계획되어 있었다. 현지인 애틀랜타에서는 알지 못하였지만 한국CBMC에서 그렇게 기획을 하였고 영사관과 다른 루트를 통해 연락을 받은 것이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협의가 이루어지고 일을 진행해 갈수록 처음 생각했던 것 보다 복잡하고 미묘한 일들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이나 계획이 내가 실제로 감당하며 해야 할 일의 차이는 매우 컸다. 들어나는 일 보다는 들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이 몇 배는 많았고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와 순리에 맞지 않고 감당해 낼 수 없는 것들까지 밀려들어 난감해 할 때가 많았다. 여러 가지 큰 행사를 많이 한 마담 유, 때론 난감한 것들은 자기에게 미루라는 용감한 제안을 하면서 나에게 도움 주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의 저자 유복렬은 의궤를 전시한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하였을 때를 회상하며 ‘돌아온 의궤를 만나다’라는 제목의 플롤로그에 이렇게 적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타국의 오래된 고문서관에 있던 책들이 장엄한 숨길로 국민들과 만나고 있었다. 박물관에 도착하자 담당 학예연구사가 우리를 맞았다. 전시회장 입구 한쪽 벽면에는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 경과‘라는 제목으로 그동안의 협상 경위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내가 그 일을 했다는 대목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불과 몇 달 전까지 그 일에 매달렸고, 긴박했던 순간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했다.]
최선을 다하면서 순간순간 긴박하고 어려웠던 일들,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수 없이 있었겠지만 자신을 다독거리며 이를 악물고 이겨냈던 일들, 내 편조차도 나를 응원하지 않아 격어야 했던 많은 외로움을 물리치고 의궤를 이 자리에 놓이게 한 장본인으로써 자부심과 긍지가 크기도 하겠지만 어디에도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없는 현실 앞에 느껴야 하는 인간으로써의 섭섭함이 어찌 작을 수 있겠는가?
책에서 저자 유복렬이 노무현 대통령의 알제리 방문에서 부테플리카 대통령을 만나 정상회담에서 양국 간 협력협정의 서명식을 마친 후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서명에 사용한 펜을 통역자 자격으로 선물로 받은 후 느끼는 장면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대통령 공식방문에는 수많은 경호원과 의전 요원이 투입되고, 회담 의제에 따라 담당 부처 장관들이 수행하는 데다, 기업CEO들까지 동행하기 때문에 대통령 뒤를 따르는 통역을 배려해주지 않는다. 그저 외교통상부 직원에 불과할 뿐이다. 통역 없이는 아무것도 진행될 수 없지만, 그것과 배려는 전혀 별개다.] 분명 반드시 있어야 하고 필요한 사람인데 자신을 들어 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면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겠지 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인다.
이번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맞이하는 일을 함께 하면서 지금까지 그녀가 해 온 다른 일들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냐만 자신을 들어내지 않고 아주 작은 것까지 세심하게 배려하고 고려하며 이끌어 가는 그녀를 보면서 감탄과 함께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예전부터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마자 나를 들어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을 그림자의 옛말인 ‘그리메’라는 닉네임을 갖기도 했었다. 나 보다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한 사람 보다는 여러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며 한 단어로 그림자처럼 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해 오해도 받고 때로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원칙을 무너뜨리지 않으려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이 책의 저자가 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이 사람에게 배울 것이 많다. 이 사람과 친구 하고 싶다.’는 좋은 사람과 인연을 맺고 싶은 욕심이 나를 지배하였다. 그리하여 이번 여행의 준비물 1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책이 된 것 같다.
이명박 전 대통령과 올랜도로 가는 여행의 아침, 애틀랜타는 잔뜩 찌푸리고 갑자기 차가워진 가을바람, 마치 함빡눈을 쏟아 낼 것 같은 함박눈을 쏟아 낼 것 겨울 같은 날씨다. 긴장하고 바쁘게 움직였던 탓에 피곤이 겹쳐 몸과 마음이 흐린 날씨에 눌려 가을을 많이 타는 남자처럼 자꾸 처진다. 목 줄기를 자극하는 뜨거운 커피가 생각나기도 하고 가을에 어울리는 트랜치 코트에 양 손을 넣고 낙엽이 있는 길을 걸어야 할 것 같은 마음, 아님 침대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체온을 느끼며 뒤엉켜 게으름의 여유를 부리고 싶은 날씨다.
생각보다 조금 이르게 공항에 도착하였다. 시간 여유가 있어 챙겨 온 준비물 1호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를 펼쳤지만 무거운 몸과 마음으로 책이 들어오지 않는다. 비행기를 타고서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 시간보다 꿈을 꾸고 있는 듯 몽롱함에 자꾸 눈이 가라앉는다.
2014 World CBMC Convention을 위해 올랜도에 도착, 미국지역의 CBMC 동료들은 물론 한국CBMC 주요 인사들이 “이명박 전 대통령 모시느라 수고가 많았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리고 저녁에 국제CBMC 이사들에게 이명박 전 대통령을 수행한 Atlanta KCBMC 회장이라 소개할 때마다 ‘내 뒤에서 정말 수고를 한 사람이 유복렬 작가’라는 것을 중얼거리며 환대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올랜도의 둘째 날 아침 ‘한·미 한인CBMC 조찬행사’를 마치고 방에 와서 다시 책을 들으려다 화창한 날씨의 밖을 보니 방에서 있기 보다는 수영장으로 가는 것이 좋을 듯, 짐을 꾸려 밖으로 향했다. 적당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본격적으로 책 속에 파묻혔다.
리더십, 저자는 의궤 반환과정에 어려운 상대자였던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사무장 상송의 리더십 정체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옳지 않다는 확신이 있을 때는 대통령의 명령도 거부하는 그 뚝심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직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었고, 자신들의 존재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해주었던 것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의 상사가 직업의식과 소신을 지키기 위해 직을 걸고 대통령이 명령을 거부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는데, 누가 그 조직을 믿지 못하고 그 상사를 존경하지 않겠는가?]
리더십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신뢰를 주고 외부로부터 보호막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누구나 안다. 다만 그것을 제대로 실천할 줄 아느냐 하는 게 큰 문제인데 안 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안 되는 원칙을 고수하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관용과 덕을 베풀 수 있을 때 진정한 리더라는 뜻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 중의 한 사람이 이 책의 저자라는 것에 확신을 갖는다.
마드모아젤 같은 밝은 미소와 씩씩한 발걸음의 이 책의 저자 마담 유는 인간관계를 중요시하고 사람을 만난다는 것에 외교관이라는 직업에 대한 소명과 자부심이 있음을 강조한다. ‘햇빛과 재스민의 나라 튀니지’라는 제목의 글에서,
[떠돌이처럼 살아야 하는 외교관이라는 직업이 고달프다는 생각을 자주 하지만 정말 이 길을 가기를 잘 했다는 생각을 하는 때가 있다. 미지의 장소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나게 될 때다. 부임지로 향하는 마음이 설레는 것도 분명 이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중심은 사람이고, 외교는 바로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나는 외교관이라는 직업의 보람은 바로 사람을 마나는 데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에필로그에서도 볼 수 있다.
[이번에는 어떤 곳이 어떤 사람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안다. 그 무엇도 기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그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 그들은 숨겨진 보물 상자와도 같다. 내가 찾아내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막연한 기대와 설렘을 안고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그렇다. 영원한 마드모아젤 같은 마담 유는 언젠가 또 다른 길을 향해 떠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에 내가 좋은 인연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그렇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다. 내 마음에 잊지 못할 인연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사 그녀가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나는 그녀를 좋은 인연으로 기억할 것이다. 내 추억의 가장 좋은 페이지에 말이다.
이번 올랜도 여행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준비물 1호가 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좋은 인연으로 이어 지는 통로가 될 것 같은 좋은 예감이다. 돌아온 외규장각의 저주를 푼 마지막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이명박 전 대통령이다. 그 분이 애틀랜타를 경유 올랜도까지 함께 여행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 책의 저자 애틀랜타 영사관 유복렬 부총영사가 그리메로 나를 도왔다. 이렇게 묘한 인연을 뭐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여운에 숨을 고르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강한 햇살의 맑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에 어릴 적 ‘호랑이 장가가는 날’을 생각하며 후덥지근한 열기에 몸에서 땀을 줄줄 흘리는데도 뜨거운 커피가 생각난다. ‘이열치열?’하며 커피를 넘기는 호사를 누리며 시선은 비 내리는 하늘을 보고 머릿속에는 자신만만한 마드모아젤 유의 미소가 떠오른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다.
오늘도 역시 ‘Bonne Chance!!!'
'책을 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질문이 답을 바꾼다(원제목 : Power Question) 의 33가지 질문 (0) | 2014.10.15 |
---|---|
질문이 답을 바꾼다(원제목 : Power Question) : 앤드류 소벨, 제럴드 피나스 지음 (0) | 2014.10.15 |
바보 빅터 - 호아킴 데 포사다 (0) | 2014.09.20 |
일의 미래 - 린다 크랜톤 (0) | 2014.09.15 |
바보 이반 - 톨스토이 (0) | 2014.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