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송삿갓 2024. 10. 20. 21:06

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그럼 저절로 죽었단 말이지.”

저절로 죽긴 어떻게 저절로 죽냐. 자살을 한 거지.”

자살? 나무가 말야?”

그래 그 나무는 나를 좋아했으니까. 나를 좋아하지 않음 내 창가에 어떻게 그런 예쁜 꽃을 피울 수가 있겠어. 우리 집 능소화처럼 화려하게 피는 능소화를 난 어디서고 본 적이 없어.”

그래도 그렇지 나무가 어떻게 자살을 하냐?”

얘 좀 봐. 왜 못해. 나무는 자살할 수 없다고 누가 그래? 나무 우습게 보지 말아 너. 나무도 사랑을 잃으면 자살할 수도 있다는 걸 우리 집 능소화가 확실하게 보여줬잖아? 그래도 못 믿겠어?” -본문 일탈의 예감중에서-

 

이 이야기의 시작은 화자인 영빈, 그의 친구 한광, 그리고 두 사람에게 30여년 넘게 연민을 안겨준 현금 등 세 사람은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그리고 현재는 삼십여 년이 흐른 이야기다. 그들이 초등학교 시절 현금의 집에 피었던 능소화에 대한 이야기로 현금이 이사를 가고 그 꽃이 죽은 것에 대한 화자와 현금의 대화가 위에 소개한 내용이다. 책을 읽으면서 능소화가 어떤 꽃인지 몰라 구글의 ‘Gemni'에서 찾아보고서야 어린 시절 시골마을 어떤 집에 넝쿨지며 피었던 꽃임을 알게 되었다. 꽃은 많이 보아 아는데 이름을 모르는, 그럼에도 그냥 넘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아마도 찾는 불편이 있어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전화기를 통해서 쉬이 찾을 수 있음에 세상 좋다.‘는 개념없는 생각을 하며 잠시 멈추었다.

 

저자는 이 소설을 연재를 시작할 때 이런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단다.

 

장차 이 소설을 이끌어갈 줄거리는, 환자는 자기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생명의 시한 까지도-에 대해 주치의가 알고 있는 것만큼은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의사와, 가족애를 빙자하여 진실을 은폐하려는 가족과, 그것을 옹호하는 사회적 통념과의 갈등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통해 작가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자본주의에 해시서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소설뿐만 아니라 내가 읽은 저자 박완서의 많은 작품을 통해 내가 느낀 건 저자 박완서는 죽음에 대해 트라우마 같은 게 있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책의 끝에 [해설] 이런 내용에서도 엿보인다.

 

상처 입은 우리네 삶을 복합성을 헤집고, 악을 쓰고, 쓰다듬고 핥아주는 그녀의 이야기는 억압된 것들을 불러내고 재통합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 때문에 그녀의 글은 한바탕 굿판과도 같다. 박완서의 소설에서 굿판을 연상하는 이유는 단지 무녀의 사설처럼 풀어져 나오는 언술의 특징 때문만은 아니다. 30년 동안 작가 박완서가 매달려왔던 전쟁의 상처와 죽음의 문제나 가부장적 이념의 굴레, 자본주의의 속물성이 사실은 한데 덩어리져서 어딘가 가닥인지조차 찾기 어려운 복합성을 그대로 작품에 담아내기 때문이다. 박완서의 작품은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특징을 보이는 데, 이는 어느 한쪽만 슬쩍 잡아당겨도 놀라 자빠질만치 우악한 아우성이 쏟아져 나오는 현실의 얽힘을 푸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반복적인 치유의 과정이 굿판을 연상하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문학평론가 이신욱의 해설 중에서-

 

일제강점기일 지라도 병원에 가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맹장을 앓은 박완서의 아버지(할머니가 우겨 굿판을 벌렸다가 어이없게 사망했다.), 6.25전쟁 중에 부상을 당해 죽은 오빠, 그리고 폐암으로 죽은 남편과 교통사고로 읽은 아들 등 작가 박완서의 가까운 가족의 죽음에 대한 한을 풀어내려는 듯한 굿판을 작품에 쏟아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화자는 의사다. 하지만 매제의 죽음 앞에서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음에, “남편을 살려 달라.”는 여동생의 울부짖음에 마음의 방황을 하는 데 화자의 연인 현금이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어느 불문학자의 글에서 읽은 건데 불란서 사람들은 해가 지고 사물의 윤곽이 흐려질 무렵을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한대. 멋있지? 집에서 기르는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낯설어 보이는 섬뜩한 시간이라는 뜻이라나 봐. -본문 개와 늑대의 시간중에서-

 

이 책 해설가의 제목이 [개와 늑대의 시간]인데 그 아래 덧붙인 게 순치되지 않은 생명력이라고 되어있다. 일상에서는 느끼지 못하다 죽음 앞에서는 밝고 맑은 날에 땅거미가 스미는 듯한 섬뜩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죽음이 다가옴을 느낄 때 어떨까? 지금은 평온하지만 그 때는 또 다른 내가 어떤 행동을 할지 궁금하다. 책의 절정 같은 본문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 비슷하게 벌거벗고 순진무구하게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천태만상 제각기 다르게 죽는다. 착하게 살았다고 편하게 죽는 것도 아니고, 남한테 못할 노릇만 하며 살았다고 험하게 죽는 것도 아니다. 남한테 욕먹을 짓만 한 악명 높은 정치가가 편안하고 우아하게 죽기도 하고, 고매한 인격으로 추앙받던 종교인이 돼지처럼 꽥꽥거리며 죽기도 한다. 아무리 깔끔을 떨고 살아봤댔자 자식들한테 똥을 떡 주무르듯 하게 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 다년간 생명운동인지 환경운동에 몸담아 왔다는 노인은 생각과 행동이 일치한 이답게 벌레 하나 들꽃 한 송이도 아낄 것처럼 자비로운 인상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걸 알고부터는 혼자 죽기는 싫다고, 하늘과 땅이 맞닿아 맷돌질을 해서 삼라만상을 전멸시켜야 한다고 악을 쓰다가 죽었다. ~중략~. 이렇게 사람은 각각 제나름으로 죽는다. 이 세상에 안 죽을 사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죽을 때는 자기만 죽는 것처럼 억울해하는 건 이런 불공평 때문일까? ()도 없는 무, 호기심조차 거부하는 미지(未知:아직 알지 못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육신의 사멸은 의학이 예측할 수 있는 경과를 밟지만 정신의 사멸은 전혀 아니다.- 본문 오래된 농담 중에서-

 

최근에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사색하는 일이 많아졌다. 심장이 멈추면 피가 돌지 않고 썩어 토악질이 나는 악취를 풍기다가 큰 뼈들을 제외한 모든 건 자연의 한 줌이 되는 데 정신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내 육체에서 울고 웃고 누리고 하늘을 날던 내 생각의 정신은 대체 어디로.....

 

본문 중에 내가 느끼는 소소한 행복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 소개하는 걸로 이 책의 후기를 마친다.

 

혼자 지어먹는 것도 집 밥이 된다는 데 용기를 얻어 어느 날 집에서 밥을 지어보았다. ~ 중략~ 마침내 다 된 밥과 끓고 익어가는 반찬의 냄새가 어우러져 더 이상 좋을 수는 없는 절정에 달했다. 오장육부가 아우성치듯 맹렬한 식욕이 솟구쳤다. 그러나 꾹 참고 식탁 위에다 격식을 차려 밥상을 차렸다. 나는 반듯하게 차린 밥상을 받으며 자랐다는 아의식이 아무도 보는 사람 없는 데서도 그런 절차를 생략할 수 없도록 했다. -본문 일탈의 예감중에서-

 

October 19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