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송삿갓 2024. 10. 6. 21:47

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이 책은 [그리움을 위하여]로부터 시작해 [그래도 해피 엔드]라는 9개의 단편소설이 있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나도 사는 일에 어지간히 진력이 난 것 같다. 그러나 이짓이라도 안 하면 이 지루한 일상을 어찌 견디랴.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는 글을 썼다.

 

저자의 글대로 읽으면서 웃었고 고개를 주억거린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글에서는 공감을 하면서도 가슴을 찌르는 듯한 마음의 상처를 건드린 곳이 많았다. 이 책의 해설 [험한 세상, 그리움으로 돌아가기]을 쓴 김병익은 노년문학이라는 표현을 썼다. 가슴이 쓰렸던 건 나도 노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그동안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럴 것 없이 살았음으로 내 마음이 얼마나 메말랐는지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움을 위하여 중에서-

 

살갗이 마르고 자꾸 목이 마른 몸과 동행하듯 마음도 메말랐는지 그리움도 마르다는 느낌이 많았다. 책에서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라는 글을 읽고는 며칠을 그래 그런 축복을 나는 왜 외면했을까? 더욱 그리워하자며 마음에 굵고 진하게 그려 담아 수시로 바라보고 어루만지다 보니 가을도 느꼈다. 어제는 파란 하늘, 솔솔 부는 바람, 적당한 기온이 한국의 가을 같다는 느낌을 가졌다. 여기는 없는 코스모스와 고추잠자리를 마음에 그려 한껏 애무했다.

 

애무했다는 말이 나오니 책의 이런 글을 다시 찾았다.

연탄 갈비집도 영업을 시작했을 시간이다. 그 가게 앞을 카바이드와 연탄불 냄새를 그리워하며 천천히 걸어가는 늙은이가 눈에 선하다. 그는 누구일까, 애무랄 거라곤 추억밖에 없는 저 처량한 늙은이는.. -중략- 쌍쌍이 붙어 앉아 서로를 진하게 애무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늙은이 하나가 들어가든 나가든 아랑곳없으련만 나는 마치 그들이 그 옛날의 내 외설스러운 순결주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꼭지가 머쓱했다. 온 세상이 저 애들 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나는 젊은이들한테 삐치려는 마음을 겨우 이렇게 다독거렸다.” -그 남자네 집 중에서-

 

화자가 찻집에 혼자 앉아 있는 상황을 그린 부분인데 우연이 아니면 절대 가지 않을 그런 장소였을 게다. 한국에서 지하철을 탈 때 가끔 젊은 남녀 한 쌍이 탔을 때 여자는 허벅지를 거의 들어내 놓는 것이 부족해 조금만 구부리면 팬티가 보일 정도의 짧은 스커트를 입고 헐렁한 셔츠에 앞섬에 속옷이 들어나 보기에 민망하면서 고개를 돌리자면 흘끗흘끗 보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아챈다. ‘저 여자는 자기의 저런 모습을 같이 있는 남자에게 보여주기 위함인가, 아님 모든 사람들이 보아주기를 바라는가? 같이 있는 저 남자는 어떤 마음일까?“ 그러다 그래 젊을 때 저래보지 언제 그러겠냐? 마음껏 즐겨라. 한 때니라.‘며 눈길을 거두고 내 그리움을 애무하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잘 사용하지 않는 그래서 뜻을 모르는 단어가 많았고(실은 박완서의 거의 모든 책에서 그랬지만) 신박하다고 느낀 표현이 많았다.

“'엽렵하다' '스스럽다' '야비다리 치다'와 같은 이제는 거의 듣지 못하는 어휘는 물론, '낭탁(주머니) '근검하다(자손이 많아 보기에 매우 복스럽다)'의 낮선 단어에서 피어나기도 해서 '얕얕이(여유가 조금도 없이 밭으게)'처럼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마저 눈치로 받아들이게끔 넉넉한 마음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어휘만이 아니라 문장에서도 그랬다. 가령, 수록된 첫 소설 [그리움을 위하여]올겨울 추위는 유별나다. 눈도 많이 왔다. 스키 캠프 간 손자들한테서 걸려온 전화 목소리가 낭랑하다.” -해설 [험한 세상, 그리움으로 돌아가기] 중에서(김병익)-

 

해설의 글 말고도 섬이니까 과부들이 많아. 영감님이 상처하니까 다들 나 안 데려가나 끼룩끼룩 영감님을 넘봤다 나봐. -그리움을 위하여 중에서-” 같은 건 사전을 찾아보지 않고는 넘어갈 수가 없었다. 여기서 끼룩끼룩은 사전에 의하면 끼루룩끼루룩의 준 말로 무엇을 내다보거나 목구멍에 걸린 것을 삼키려고 목을 길게 빼어 자꾸 앞으로 내미는 모양이란다. 사전을 찾아보기 전에는 갈매기가 노래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영감님을 넘보기 위해 갈매기가 노래하는 걸 표현 할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 읽는 걸 잠시 멈추고 다시 찾아보게 되었다.

 

맑은 시냇물이 졸졸 새처럼 지저귀며 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길과 시냇물 사이 누렇게 시든 풀섶에 파릇파릇한 건 쑥잎일까, 민들레일까. 오면서 먼산에 잔설을 본 것도 같으나 등덜미에 내려앉은 햇살은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도타웠다. 무디어졌던 계절 감각이 눈뜨는 것 같은 설렘을 따라, 걸어오던 길을 벗어나 시냇가를 바싹 붙어 길 없는 길을 걷다가 편안해 보이는 둔덕을 찾아 앉았다” -후남아 밥 먹어라 중에서

 

이 대목에서 괜스레 눈물이 났다. 30대였던가? 삶이 힘들어 나 태어난 어머님의 친정동네를 자주 찾고는 했는데 대낮이라 마을은 거의 텅 비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누군가 사람이 있어도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니 외할머니 산소를 찾아 들, 산길을 걷고는 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 때 산골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며 어린 시절 어머님과 일을 하러 다녔던 생각에 어머님께 잘 해드려야 되겠다고 다짐을 수 없이 했건만 그러지 못함이 마음을 흔들었고 눈물로 밀어냈다.

 

요즘 들어 건망증이 더 심해진다. 무엇을 하려고 움직였는데 가다가 내가 무엇을 하려고 했지?’라는 건 예사고 잘 알던 단어가 어떻게 발음하는지 잊는 경우가 태반사고 이게 치매 증상인가?’라는 걱정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의 건망증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열쇠나 안경, 가위나 빗, 숟가락, 국자, 마시다 만 커피잔, 먹다 만 빵 조각, 읽던 책 따위가 내가 방금 쓴 근처나 늘 두던 자리에서 감쪽같이 없어지는 일 따위다. 그런 것들이 안 보이면 어디 두었더라, 그 물건들을 최근에 쓴 때로 거슬러 올라가 그때의 행동반경을 생각해낼 생각은 안 하고 내가 맨 먼저 자신있게 달려가는 데는 냉장고이다. 휴대폰이나 전기다리미를 어따 놓았는지 잊어버리고 찾다 찾다 나중에 냉장고 속에서 찾았다는 얘기가 건망증의 전형적인 증상처럼 되어 한동안 우스갯소리로 떠돈 적이 있다.” -거저나 마찬가지 중에서-

 

 

나는 내가 젊어 보인다는 자만심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노인석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도 해피 엔드 중에서-

한국에 있는 동안 지하철을 타면 눈지 보지 않고 노인석이 비어있으면 앉는다. 때로는 어떤 분이 내 앞에 와서 노려보는 경우도 있지만 무거운 짐에 꼬부랑 할머니가 아니면 모른척하고 버티는데 자만심을 접어서 인가? 내가 나를 사랑하고 아끼자는 마음으로 포장을 해서인가?

 

프랑스 니스의 [생폴 드 방스] 입구에 비상하는 새의 동상이 있다. ‘하늘을 날고 싶다.‘는 말이 절로 들 정도로 생동감 있고 나도 그 위에서 해 보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 고등학교시절인가 영화 [고래사냥]을 볼 때 젊은 영화 내용에 청년이 동해바다고 고래를 잡으러 가는 환상을 갖고 있었는데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충동을 가졌었다. 알래스카 크루즈를 갔을 때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배 위에서 뛰어내리면 날 수 있을 것 같은 충동이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죽음의 상자를 주머니에서 꺼내 검은 강을 향해 힘껏 던진다. 그 갑은 너무 작아서 허공에 어떤 선을 그었는지, 한강에 무슨 파문을 일으켰는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죽고 내가 죽는다 해도 이 세상에 그만한 흔적도 남기진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허공에서 치마 두른 한 여자가 한 남자의 깍짓동만 한 거리를 껴안고 일단 하늘 높이 비상해 찰나의 자유를 맛보고 나서 곧장 강물로 추락하는 환(:허깨비), 인생 절정의 순간이 이러리라 싶게 터질 듯한 환희로 지켜본다” -친절한 복희씨 중에서-

 

나는 자주 웃는다. 아직도 부족하지만 자주, 많이, 크게 웃으려 노력한다. 마음이 웃음을 토해내지 않더라고 표정으로 웃으려 노력한다. 그러면 마음도 웃음을 머금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다. 지금 이 책의 후기를 쓰는 중에도 그러고 있다. 책의 이런 글이 더 웃어보기를 다짐하며, 지금의 표정이 그러리라 믿으며 책의 후기를 마친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옷이나 음식 외에 표정에도 고급스러운 것이 있다는 걸 알았다” -친절한 복희씨 중에서-

 

October 6 2024